예지는 다소 주저했다. 커다란 철제 문을 앞에 두고 나니 막상 벨을 누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교복을 입은 그녀는 문 앞을 서성이고 한참을 생각했다.
'그때는 참 아무 생각없이 잘 드나들었는데....'
예지와 재혁이가 처음 만난 건 두 사람이 다섯 살 때인가 그런다. 예지로서는 그 당시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양가 부모님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아마도 그때쯤이지 싶었다. 그때 예지네 집은 여기 재혁이네 집에서 불과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았고 두 사람은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다가 같은 유치원을 갔다. 아이들을 태우러 오는 버스가 길 끄트머리에 정차하는데, 거기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예지와 재혁이의 엄마들은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예지 아버지가 하는 사업이 그럭저럭 굴러갈 때였고, 재혁이네도 지금처럼 엄청 잘 사는 수준이 아니어서 양가의 수준도 비슷했다.
여름이면 양쪽 집에서 번갈아가며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먹었고 겨울이면 번갈아 초대해가며 전골잔치를 벌이곤 했다. 술을 마시며 웃고 떠드는 어른들이야 밤이 깊도록 즐거워했지만 아이들은 놀다가도 금방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면 어느 집이든 방 하나에 이불을 깔아두고 두 아이를 나란히 눕혀 재우곤 했다. 그게 예지가 초등학교 때까지의 일이다.
띠리리링 띠리리, 띠리링-
예지가 벨을 누르자 전자음으로 된 시그널이 들려왔다. 잠시 후, 벽에 달린 인터폰을 통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시죠?
아, 저... 재혁이 친구인데요. 최예지라고....
달칵- 소리와 함께 인터폰이 끊겼다. 그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예지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렸을 때 평상을 두고 다같이 고기를 구워먹던 마당은 텅 비어있었다. 화단의 꽃은 마구잡이로 뻗쳐 있었고 잔디밭은 잡풀 반, 죽어가는 잔디 반이었다. 예지가 알기론 재혁이 엄마의 취미가 가드닝이었는데... 아무래도 사업이 바빠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몇 년만 더 두면 정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에 이르자 무뚝뚝한 표정의 아줌마 한 명이 서 있었다. 예지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모범생인 그녀는 일단 꾸벅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재혁이 친구...
아까 들었잖아요. 들어오세요.
네에.
말투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굉장히 쌀쌀맞은 사람이었다. 예지가 안으로 들어가 들고온 롤케揚?내밀자 그녀는 그걸 받아들 생각도 안 하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리어 멋적어진 예지가 오다가 빈손으로 오기 무엇해서 사왔다고 하자 고맙다는 소리도 없이 낚아채듯이 받아갔다. 부엌으로 향하는 여자의 등에 대고 예지가 물어보았다.
저, 재혁이는 아직 안 왔나요?
저야 모르죠. 방에 가서 기다리세요. 언제 올지 모르니까.
네에.
무뚝뚝하다 못해 싸늘하기까지한 말투에 예지는 다소 주눅이 들어 그대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누가 안내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이층 두번째 방이다. 문을 열자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떤 냄새가 훅 밀려왔다. 청소가 안 되어 있다거나 너저분한 것도 아니었다. 바닥은 깨끗했고 입다 벗어둔 옷가지가 널려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정제되지 않은 수컷의 향이라고나 할까. 물론 남자 형제를 갖지 못한 예지로서는 그냥 냄새가 좀 난다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그런 냄새였다.
생각보다 깨끗하네...
그러고 보니 사춘기가 지나고 남자방에 처음 들어와 본 예지였다. 그러나 재혁이의 방은 워낙 어렸을 때 수시로 드나들었던 곳이라 남자방이라는 실감이 잘 나질 않았다. 오히려 그리운 마음까지 들었다. 장난감을 담은 플라스틱 박스가 쌓여있던 구석은 이제 커다란 책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재혁이가 무척 좋아하던 공룡 장남감으로 장식되어 있던 벽은 커다란 평면TV와 게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그대로잖아. 하하.
아무도 없는데, 혼자 웃음이 나온다. 예지는 책장 하나에 다가가 꽂혀있는 만화책 하나를 꺼냈다. 만화책을 좋아하던 재혁이는 용돈만 받으면 그걸로 만화책을 사모았고, 이에 질색한 그의 엄마가 몇 번이나 그러모아 갖다버려도 기어코 다시 사다가 채워놓고 그랬다. 덕분에 당시 초등학생이던 예지는 돈 한 푼 안들이고 만화책을 실컷 볼 수 있었고, 토요일 저녁이면 재혁이네 집에 놀러와 밤늦도록 만화책을 보다가 재혁이 침대에서 잠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재혁이는 바닥에서 자야 했지만 그렇다고 예지에게 놀러오지 못하게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침대랑 책상은 다 바뀌었네...
어린이용 침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 놓여 있는 건 더블 베드쯤 되어보이는 성인용 침대였다. 어쩐지 거기에 걸터앉는 건 부담스러워서 책상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가 거기에 앉았다. 방금 책장에서 뽑아온 만화책을 몇 권 뒤적이다가 고개를 들어 책상 책꽂이를 살핀다. 그리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이 녀석이 이러니까 맨날 교과서를 안 가져오지...
거기에는 손때가 전혀 타지 않은, 아주 새책 그대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교과서가 좌르륵 꽂혀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한 권 뽑아서 살펴보았지만... 필기나 밑줄은 고사하고 낙서 하나 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학교에서 책을 받고는 그대로 갖다 꽂아두고 아예 신경을 안 쓴 모양이었다. 기가 막힌 예지는 혀를 차며 교과서를 도로 꽂아두었다. 옆 칸에는 자습서도 과목별로 주루룩 꽂혀 있었다. 이 역시 아주 깔끔한 새 책들이었다.
이것도 아예 안 보나...?
개중에는 그녀가 보는 것과 다른 출판사의 자습서와 문제집도 잔뜩 있었다.
'안 볼거면 달라고 해볼까...'
하고 생각하며 국어자습서를 향해 손을 뻗는데 등 뒤에서 문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재혁이었다. 세미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예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도 없이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어...와..왔어?
그러나 재혁은 대답도 없이 자켓을 벗더니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가 무얼 하는 건가 싶어서 멀뚱멀뚱 쳐다보던 예지는 그가 허리띠를 풀기 시작하자 비명을 지르며 두 눈을 가렸다.
꺄악! 변태! 너, 지금 뭐하려고....
그러자 무뚝뚝한 재혁의 답변이 돌아온다.
내 방에서, 내가 옷 갈아입는데 누가 뭐라 떠들어?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예지가 그렇게 눈을 가리고 가만히 있노라니 다시 문소리가 난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벌리고 방안을 살피자 재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옆에 딸린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샤워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바닥에는 대충 벗어던지 대혁의 옷가지가 뒹굴고 있었다. 심지어 팬티까지. 그걸 본 예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제서야 자신이 남자의 방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그냥 갈까.'
굳이 이렇게까지 만나서 이야기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이야기해볼까 싶기도 했지만 거기서는 눈도 많고 오늘처럼 괜한 오해를 사게 될 것도 같았다. 그런 것도 싫었다.
달칵-
망설이고 있는데 문소리가 난다. 노크도 없이 방으로 불쑥 들어온 사람은 아까 예지에게 문을 열어 준 아줌마였다. 말끔하게 개어놓은 옷가지를 들고 들어온 그녀는 욕실 앞에 그것을 내려놓고 바닥에 놓인 옷가지를 수거해갔다. 예지는 그제서야 재혁의 방이 깨끗한 이유를 알았다. 재혁이가 깔끔해서 그런 게 아니라 치워주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아줌마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예지에게는 딱히 말을 걸지도,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물소리가 그쳤다. 그리고 재혁이가 나온 모습을 보고 예지는 다시 또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야! 너어!!
아직 있었냐?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욕실을 나온 재혁은 알몸이었다. 그의 다리 사이에서 덜렁거리는 물건을 잠시나마 보고만 예지는 다시 또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가렸다.
옷을 좀 입어!
지금 입잖아.
예지는 무심하기 짝이 없는 재혁의 말투가 몹시 얄미웠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끝나고 띠리링- 하는 전자음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녀는 눈을 계속 감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살짝 뜨고 쳐다보니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재혁이가 TV를 켜고 침대에 기대 앉아 있었다. 손에는 게임기 조종간이 들려 있었다. 그걸 본 예지는 기가 막혀서 따져물었다.
야, 너 아까 나한테 저녁에 와서 이야기 하자면서. 근데 사람 불러놓고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긴? 게임 하려는데?
저녁이라 해놓고 시간도 말 안 해주고, 그리고 막상 왔더니 집에도 없고.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전화를 하지 그랬냐.
난 너 폰번호 몰라.
그러자 재혁이가 예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안해진 예자가 묻는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 뭐... 니가 진짜 나한테 관심이 없었구나...해서.
관심이고 뭐고, 학교에선 제대로 이야기도 안 했었잖아.
...그랬나.
재혁은 다시 시선을 TV로 향했다. 조이패드를 몇 번 누르자 화면이 바뀌면서 어떤 비행기가 나타나 총알을 쏘기 시작한다. 참다 못한 예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냥 갈래. 잘 있어.
문가로 가던 그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호칭에 우뚝 멈추고 만다.
야, 곰탱아.
그녀는 고개를 홱 돌려 재혁을 째려보았다.
야! 너! 나보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어! 그게 대체 언제적....
그럼, 지금은 곰돌이 팬티 안 입냐?
당연히 안 입... 야! 내가 그걸 너한테 왜 말해야 돼!
씩씩거리며 따지려는데 재혁은 빙긋 웃을 따름이었다. 그는 리모콘을 들어 TV를 끄며 말했다.
알았어. 니가 안 입는 걸 확인시켜 주면 앞으론 절대로 곰돌이라고 부르지 않을게.
뭐?
예지는 재혁의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 했다. 약 30초 정도의 침묵 후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가방을 재혁에게 집어던질 정도의 정신을 차렸다.
미쳤어?
그녀의 손가방을 가볍게 받아낸 재혁은 여전히 빙글거리며 말했다.
농담 아닌데? 만약 지금 확인 안 시켜주면 내일부터는 학교에서도 곰돌이라고 부를게. 곰돌이 반장... 이렇게 말야. 그리고 누가 왜 니가 곰돌이냐고 물으면 내가 보았던 광경을 정확하게 묘사...
시끄러!
예지는 소리를 빽 질렀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소꿉친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젠 아주 저질이 됐구나? 다시는 너한테 말도 안 걸꺼야. 여기도 안 올 거구!
그러자 재혁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평소의 무뚝뚝한 어조로 돌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 원래 저질이야. 그거 이제 알았어?
....뭐?
그렇잖아.
재혁이 침대에서 내려와 예지에게 다가왔다. 안 그래도 키가 큰데다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니 올려다 볼 수 밖에 없다. 예지는 살짝 무서워졌다.
내가 그렇게 저질인거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지난 몇 년동안 나 쌩깐거 아니었어? 봐도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학교에서는 말도 안 섞고?
그...그거야, 너랑 나랑 같은 반도 아니고....
올해는 같은 반 됐잖아. 근데 왜 나한테 인사도 안 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건데?
.....
그래놓고 이제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 니가 추천 받아야 되는데 내가 걸리적거린다고?
그렇게 말한 적 없어!
그거나 이거나! 썅! 내가 그렇게 느꼈다면 어쩔래!
재혁의 표정은 자못 험악했다. 살짝 쫀 예지는 말꼬리를 내리며 말했다.
....불쾌하게 느꼈다면 미안해. 그렇지만 난 그냥....
겁이 먹은 듯한 예지의 표정을 보면서 재혁은 아차 싶었다. 뒤로 한 걸음 물러난 재혁은 다시 침대로 돌아가 걸터앉았다. 그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니가 왜 미안하냐, 븅신이냐? 잘못은... 내가 했는데...
방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쭈볏거리던 예지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알았어. 담임한테는.... 뭐, 다시 이야기 해볼게. 추천이야... 뭐... 어떻게 되겠지.
담탱이가 진짜 그렇게 이야기했어?
'뭐가.
내가 범생이처럼 굴면 너한테 추천 준다고? 진짜루?
뭐, 일단은... 다른 선생님들도 의견을 내는 거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혁이가 고개를 들고 예지를 쳐다보았다.
좋아. 니가.... 추천 받도록 도와줄게.
뭐? 정말?
뜻밖의 협력에 예지는 대번에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재혁은 그렇게 좋은 녀석이 되지 못 했다.
단, 조건이 있어.
이어지는 재혁의 제안을 듣고 예진는 가방을 집어 던지려고 했지만, 이미 집어던진 후라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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