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회사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지난해 이미 다른회사로 인수합병 된 상황에서 구조조정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누적된 적자를 줄이고, 기업회생을 위한 대규모 인원감축에 우리 남편 역시 예외가 될수는 없었다.
“당신은 괜찮은 거야? 우리 예진이 이제 대학도 가야하는데..”
돈 많이 들어간다는 예체능을 전공하고 있는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남편의 실직만은 막아야 했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야? 차라리 빨리 인사결정이 났으면 좋겠어. 이건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니 원...”
평생을 지금 회사에서 일 해온 남편이었다.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남편은 만약 지금 회사에서 해고된다면 재취업이 쉽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 저녁에 직원 가족들 초대하는 저녁식사자리가 있어.”
“갑자기 웬 저녁식사?”
“그러게나 말이야. 언제 해고될지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밥사주면 누가 좋아한다고. 당신도 오지마.”
남편은 오지말라고 했지만 회사에서 주최하는 행사에 불참했다가 행여라도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석하지 않을수 없었다.
“거봐,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나도 오길 잘했지?”
남편은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다들 뒤에서는 안갈거라고 욕하고 난리였는데..”
식당은 인파로 넘쳐나고 있었다.
때때로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보였고, 어수선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자. 요즘 회사 분위기도 안좋은데 오늘은 제가 사는 것이니 마음껏 드시고 잠시나마 마음의 짐은 내려놓으세요.”
제일 상석에 앉은 사람이 말을 마치고 나자 식당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와~~~”
“짝짝짝~~~”
남편은 혼잣말로 궁시렁 거렸다.
“씨발.. 인간들 전부 속보인다. 속보여...”
“왜 그래~ 당신도 인상 좀 펴.”
남편은 항상 이런식이다.
마음에도 없는 말이나 행동따위는 할줄 모르는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남자.
그런 남편은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는 의리있고, 믿음이 가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상사입장에서는 곱게 보일 리가 없을테다.
남편은 기분이 언짢은 듯 술을 연거푸 들이켰다.
“많이 마시지 마~ 제발 인상도 좀 펴고~”
하지만 남편은 내말을 듣지 않고, 계속 해서 술을 마셔댔다.
“장과장~ 음식이 맛이 없나?”
“아...아닙니다. 팀장님.”
“아니면?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표정이 왜그래?”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남편옆에는 젊은 팀장이 다가와 있었다. 아까 인사말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런거 없습니다.”
남편은 그렇게 말했지만 표정만은 잔뜩 찌푸리고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불만 있으면 얘기해. 오늘은 특별히 다 들어줄테니까.”
“정말입니까? 그럼 다 이야기해도 됩니까?”
남편이 눈을 치켜뜨고 팀장을 쳐다보는 것을 보니 심상치 않아보였다.
나는 얼른 두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호호~ 팀장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장과장 안사람됩니다. 제 술 한잔 받으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술잔을 팀장에게 건넸고 다른사람들이 눈치 못채게 남편의 팔을 꼬집었다. 괜한 술주정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였다.
“장과장에게 이렇게 예쁜 와이프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이제 서른정도 되었을까?
나보다도 훨씬 어려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구조조정을 총괄하는 팀장이 된 건지는 의아했지만 직책이 높은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음. 자 내 술도 한잔 받아요.”
“네~”
나는 팀장이 주는 술을 원샷으로 한번에 다 마셨다.
“오~ 잘 마시네~ 술이 쎈가봐요.”
“호호~ 팀장님이 주는 술이라 달아서 그런가봐요. 호호호..”
남편은 아양떨고 있는 내 모습이 보기 싫었는지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과장~ 어디가나. 같이 술한잔 하지?”
“됐습니다.”
남편이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가버리자 팀장은 기분이 언짢은 듯 보였다.
“호호~ 저희 남편이 사람은 좋은데 좀 융통성이 없죠? 팀장님이 이해하세요.”
“훗... 그럼 남편 대신 한잔 더 할래요?”
“네~ 저야 영광이죠. 호호..”
“이거 장과장 하고는 전혀 다르네요.”
팀장 비위를 맞추느라 술을 연거푸 몇잔 들이키고 나자 금새 취기가 올라왔다.
“뭐야.. 벌써 취했나?”
“호호.. 아직 끄떡없어요.”
하지만 자꾸만 어지러웠다. 앞에 앉은 팀장 얼굴이 두 개로 보였다가 세 개로 보였다가 그랬다.
“장과장이 와이프 반만 따라가도 좋겠구만. 흐흐..”
착각이었을까?
정신이 몽롱하고 어지러운 가운데서도 팀장의 끈적한 눈길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는 팀장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가슴에 닿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는 부하직원 와이프고, 나이도 팀장보다 더 많은 아줌마였다.
나는 어떻게 하든 남편이 팀장에게 잃어버린 점수를 메꾸어주고 싶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사람은 구조조정팀장이었고, 나는 팀장에게 잘보이고 싶었다.
“저희 남편 잘 좀 부탁해요. 호호..”
“흐흐.. 그거야 장과장 하기 나름인거고.”
“무뚝뚝하고 융통성없지만 좋은사람이이에요.”
“후후... 그런가? 어떤면에서?”
“네??”
“장과장이 어떤면에서 좋은사람이라는 거지?”
“일도.. 잘하고.. 열심히 해요.”
“나도 직원들 인사고과보고서를 봐서 대충은 알고있는데.. 장과장은 글쎄...”
다소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팀장을 보자 남편이 어쩌면 구조조정대상이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희 남편도... 구조조정대상인가요?”
팀장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팀장은 술을 한잔 더 권하면서 말했다.
“마셔요.”
“네..”
같이 술을 마시고 나서 팀장이 알 수 없는 말을 남겼다.
“혹시.. 장과장을 위해 무엇이든지 할수있어요?”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물론이에요.”
“후후..”
팀장은 주변을 의식한 듯 눈치를 보더니 내게 가까이 와서 낮게 속삭였다.
“설사.. 당신의 몸이래도?”
“네..??”
내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자 팀장은 크게 웃었다.
남편은 아침부터 화를 냈다.
“당신 어제 팀장앞에서 무슨 짓이야? 당신이 술집여자야?”
“술집여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당신이야 말로 팀장앞에서 비위 좀 맞춰주면 안돼? 내가 오죽하면 그렇게까지 했겠어.”
“그깟 회사가 뭐라고. 새까맣게 어린새끼한테 아부까지 해가면서 회사다닐 마음 없으니까 앞으로 그런짓 하지마.”
“뭐라고? 그럼 우린 뭐 먹고 살아. 예진이 대학도 가야하는데 학비는 어떻게 해결하려고!”
“에이 씨발!!”
“어디가! 밥은 먹고 가~”
“됐어!!”
남편은 어제 내가 팀장앞에서 비위맞춰주고 같이 술을 마셨던게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속상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비위맞춰주는 거야 얼마든지 할수있지만 팀장이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그게 내 몸이래도? 날?’
혼란스러웠다. 그 말은 나를 원한다는 건가?
말도 안돼.
거울 앞에 섰다.
40대 초반치고는 아직 군살하나 없이 매끈한 몸매다. 키도 170에 가까워서 몸매만 따지고 보자면 날씬한 아가씨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거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설마.. 진짜 그 팀장에게 내 몸을 허락하려고?
미쳤다. 진짜 미쳤다.
-따르르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술이 많이 취하셨던데.”
어제 봤던 팀장이었다.
“네... 어쩐일로..”
“후후.. 어제 제가 했던 말..”
“술기운에 농담삼아 했던 말이라는 거 알고 있습니다. 신경쓰지마세요.”
“후후.. 농담이 아닌데요?”
“네?”
“어제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세히 말을 못드렸는데. 어떠세요.”
“네?”
“후후.. 어제보니 화끈하실 것 같던데. 지금 제가 거래를 제안하는 겁니다.”
“거래요?”
“장과장의 자리보전을 대가로요.”
“그럼... 진짜로 저와...”
“확실하게 대답해주세요. 저도 찌질하게 매달리는건 딱 질색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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