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엄청난 소음들과 함께 많은 인파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
리도 들려왔고 비상구며, 계단부근에는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굉장한 무게감으로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뭐... 뭐야?’
난 단속이 떴다는 외침을 듣고서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맥주 한 잔을 따라두고 홀짝
거리기만 할 뿐이었던 나는 취하지도 않았었다. 왜 내가 이런 지구 종말과도 같은 날벼락을
겪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이미 가방이며 소지품을 챙기고 있던 석민과 민영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야! 좆 됐다... 째!”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건 석민이었다. 그는 가방과 담배, 그리고 민영
을 챙겨 전쟁과 다름없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해지며 그제서야 내가 미
성년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 뿐이었다.
“성현아~ 일단 흩어졌다가 이따 원투쓰리에서 봐!!”
그는 그렇게 다급하게 말을 던져놓고 이내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거짓말처럼 나와 그녀만이
남아버린 2층이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자 이미 경찰들에게 붙잡혀 도로가에 무릎을 꿇고
앉는 학생들이 보였다. 물론 거의 대다수의 인파는 도망을 간 상태였지만 도로에 꿇어 앉은
사람들도 꽤나 많은 수였다.
“누나! 우리도 도망....”
“이럴 때만 누나냐?”
그녀가 나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경찰에 붙잡히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 괜스레 겁이나
기 시작했다. 학교에는 100%알려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갈게 뻔했
다. 매 타작은 물론 지긋지긋한 반성문에 자칫하면 정학까지 당할 수도 있을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도 태연했다. 나는 다시 창가로 가 밖의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이미 출입구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성현아... 이리 와... 어차피 지금 나가도 잡혀~”
그녀의 차분한 음성이 재차 들려왔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무척이나 평안하고 부드러운 음
성이었다. 그러나 내 벌렁이는 심장이 차분해지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녀의 곁
으로 다가서려 할 때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다름 아닌 석민과 민영이었다. 잔뜩 똥
씹은 표정을 해가지고는 수 십 명의 인파와 함께 무릎을 꿇고 손을 든 둘의 모습을 보자 나
는 더욱 똥줄이 타들어갔다.
“아... 서... 석민이랑 민영이도 잡혔어!”
“후훗... 이리 와... 우린 괜찮을거야~”
“지금 밖에 장난 아니야....”
“그냥 오라니까?”
반항하던 한 녀석은 급기야 수갑까지 차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울상이 지어졌다. 그런 나를
보며 그저 따뜻한 웃음만 보내주는 그녀는 무슨 똥배짱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 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곧 파란 근무복을 입은 경찰들이 세 명이나 올라오
더니 주변을 둘러보다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늬들은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태연하냐? 나와!”
고개를 숙인 채 망연자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늬들? 당신 몇 살이야?”
“뭐? 당신?”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녀와 경찰을 번가르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미쳤는 줄로만 알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그려지는 숫자가 있었다. ‘32’ 너무도 당황스럽고
겁이 나 떠올리지 못했던 그녀의 나이 서른 둘이 떠오르자 내심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야! 민증 까! 어디서 국민의 지팡이라는 사람이 다짜고짜 반말이야!”
“뭐... 뭐?”
“민증까라고... 나 먼저 보여 줘?”
“..............”
그녀는 내가 그토록 왜 들고 왔냐고 구박하던 장지갑에서 주민증을 꺼내 경찰에게 내밀었
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를 확인 한 경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와 주민증을 번가르며
바라봤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어려 보여서....”
요즘에야 스쿨룩이니 뭐니 해서 여러 패션이 유행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 때 당시 스쿨룩이
라는 단어 자체가 있었는지도 모를 시절이었다. 너무도 당당히, 그리고 차분히 말을 하는
그녀는 사실 경찰에게 꿀릴 게 없었다. 하지만 걸리는 건 나였다. 이제 타겟을 바꿔 내게
신분증을 요구한 경찰이었다.
“이... 이봐! 자넨 학생 맞지?....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다는 속담은 사실인 듯 했다. 경찰은 교복을 입고 있
는 내게 반말을 하려다 끝내 존대말로 어미를 바꾸었다. 나는 뱃속의 모든 장기들이 전부
쪼그라들어 버린 상태였다. 뭐라 해야 할지 말도 나오지 않고 그저 도움의 눈길을 그녀로
향할 뿐이었다.
“아~ 보호자가 있잖아... 보호자가... 내가 얘 이모야”
“이...이모.... 보...호자세요?”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경찰이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그가 경찰이 아닌 의경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순 있었지만 어렸던 그 때엔 파란색의 근무복만으로도 나는 오줌을 지릴 정도로
쫄아 있었다.
“얜 술도 안 먹었어, 내가 혼자 먹기 적적하고 골뱅이 먹고 싶다길래 같이 온 거야...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닙니다.”
경찰은 머리를 갸우뚱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통하지 않는
방법일 테지만 허술했던 그 시기엔 보호자라는 타이틀 하나만 있으면 왠만한 문제는 쉽게
해결이 되던 때였다. 어쩌면 허술했다기보다 사람 냄새나는 세상이었다고나 할까?
“오~ 우리 마누라 쎈데?”
“으이그... 바보같이 잔뜩 쫄아가지고는?”
경찰이 되돌아가고 다가오던 나머지 둘에게 문제가 없다는 듯 제스처를 보이자 다시 1층으
로 방향을 바꿔 내려가는 그들이었다. 돌아가는 경찰의 모습을 보면서 벌렁이던 심장이 점
차 정상적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곧 평안해졌다.
“쫄긴 누가 쫄아!”
“칫!”
그녀 역시 태연한 척 했지만 속이 탔는지 따라 놓은 맥주를 단숨에 비워냈다.
“가! 가자...”
“어딜?”
왠지 내려갔던 경찰들이 재차 올라와 나를 잡아갈 것 만 같았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남의 돈을 훔쳤거나 빼앗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엄청나게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행동
했다.
“여기 싫어... 불안해...”
“푸흣! 지금 나가면... 나중에 니 친구한테는 어떻게 설명하려고? 이모랑 같이 있어서 괜찮
았다고 하려고?”
그녀 말이 옳았다. 불안한 마음에 당장에라도 술집을 나서면 아무런 제지 없이 풀려난 나와
그녀를 보고 분명히 또 다른 추궁이 들어올 것이었다.
“그... 그럼....”
“남은 거나 빨리 먹어... 여기요... 시원한 냉수 한 잔만 주세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술집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던 아르바이트생도 나와 그녀를 이
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술을 퍼먹었음에도 당당하게 나란히 앉아 술잔
을 기울이던 우리가 아마 신기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창가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
심한 몸부림을 부리다 수갑을 찬 녀석을 비롯해 몇 명은 경찰차에 오르고 있었고 화장을 아
주 웃기게 한 여학생 하나는 술에 완전히 취해 거의 기절 상태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나
마 얌전히 말을 잘 듣던 석민이나 민영이 같은 부류는 무언가를 적는 경찰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가 하면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분명히 나라에서 정해놓은 법을 어겼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사람은 술집에 가지
말라는 법을 어겼음에도 내겐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고 겁을 먹었음에도
화살은 나를 비껴갔다. 분명히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유부녀인 누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도 법과 같은 테두리를 벗
어날 수도 있는거겠지?’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부추기며 다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든든했다. 그녀의 손길이... 마치 보호막이 둘러쳐진 것처럼 나는 따뜻
하고 포근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하얀 목덜미로 갈빛의 맥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귀여운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느꼈다. 세상의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나는
그녀 곁에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그녀가 어떤 여자였건 중요치 않았다. 그리
고 앞으로 그녀가 어떤 여자가 될 것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원하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맥주와 음료를 홀짝거릴 뿐이
었다. 잡은 손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 첫 데이트이자 그녀를 더욱 간절히 마음에 품은 날이
기도 했다.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고 전혀 어린아이처럼 굴지 않았다.
‘썅! 이미 어린애 티는 다 냈는데 뭘 어린아이처럼 굴지않아!’
마음이 평안해지고 긴장됐던 몸이 풀리니 그제서야 그녀앞에서 철부지 같은 모습을 보인 나
를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팔릴 쪽은 다 팔렸는 걸... 그리고 그렇게 그곳을 빠져나
왔다. 한바탕 소란이 있던 자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술집과 출입구는 말끔하게 정리
가 되어 있었고, 그런 일이 있어선지 그 앞을 지나는 학생들의 발길도 뜸해져 있었다. 벌써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택시타자~”
집에는 가기 싫었지만, 나는 학생이었고 등교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유부녀였다.
싫어도 가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택시정류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우리.... 걸어 갈까?”
“여기서?”
바보처럼 반문을 했다. 나는 항상 그렇지만 그녀 역시 나와 1분 1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서인가? 걸어가자는 말에 ‘집까지 너무 멀어~’라고 답을 할 뻔 했다.
“왜? 싫어?”
“아... 아니! 걷자... 그래... 걷자~”
여전히 맞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열대야는 물러나고 밤이 되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
더위와는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밤길을 나란히 걷
기 시작했다.
이런걸까? 데이트라는 게...
그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행복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늦은 시간까지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꿈만 같기도 했다. 그녀와 나는 그저 한가해진 도로가를 걸을 뿐이었다.
이렇다 할 대화도, 저렇다 할 무엇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좋았다.
“아~ 좋다! 이렇게 걷고 있으니까... 우리 진짜 연인사이 같지 않아?”
제법 싱겁게 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도 나처럼 고개를 들어 하
늘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곧 나의 팔을 감싸며 팔짱을 끼어왔다.
“그렇게... 좋아?”
술이 제법 들어간 이유에서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냉정할 만큼 차분했다. 그녀의 적당한 가
슴봉우리가 팔뚝에 눌려오고 있었지만 전처럼 늑대로 변신하기엔 나의 정신이 너무 청아했
다.
“그럼... 좋지...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응......... 몰라.........”
그녀는 모른다면서도 더욱 몸을 내게 안겨왔다. 비록 팔짱을 낀 상태라 안아줄 수는 없었지
만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안아주고 싶었다.
“나, 너 안 놓을거야... 놓지 않을게...”
“피~ 안 돼 그럼...”
그녀의 입술이 삐죽거리며 부정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대답에서 진정성을 찾기 힘들었
다. 여자의 ‘노(No)'는 ’예스(Yes)'라는 공식을 철저히 믿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너 놓지 않을거니까 너도 다른데 가지 마... 평생 내 곁에서 살아...”
“어떻게 그러냐? 까불면 혼나요~”
그녀가 팔짱을 풀며 다시 손을 맞잡았고 노는 손이 나의 얼굴로 올라와 코를 가볍게 비틀어
주었다. 그녀의 손목 부위에서 풍겨지는 살내음이 어찌나 아득한지 하마터면 길바닥에 그대
로 쓰러져버릴 지경이었다.
“오늘 같이 잘까?”
“미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 역시 나의 손을 더욱 꽉 잡아주었다. 그러면서 나의 어깨에 머리
를 기대어왔다.
“오늘... 너무 재밌었어... 성현아... 내가 언제, 너 아니면 이런 황당한 일을 해보겠니... 고마
워”
그녀는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즐거워 해주었다. 틈만 나면 나를 챙겼고 틈만 나면 나를 바
라봐 주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여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또 그 강함 속
에 누구보다도 여린 여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다가서면 한걸음 달아나는 그녀였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녀 역시 나처럼 세상이
만들어 둔 테두리 안에서 갈등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
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사이가 진전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버스로 20여분 거리를 순식간에 온 것 같았다. 벌써 보여지는 모든 것이 익숙하고 눈을 감
고도 집을 찾아갈 수도 있을 만큼 눈에 익은 동네의 초입에 다다르자 벌써부터 아쉬움이 들
어왔다.
“거의 다 왔네?”
“그러게... 걸어와도 뭐... 그리 안 머네~”
동네에 들어서자 그녀가 은근슬쩍 머리를 만지는 척 하더니 곧 손을 빼냈다.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지 서운함이 들었다. 되도록 끝까지 잡고 갔으
면 하던 바람이 깨어진 탓인지 갑자기 그녀에 대한 욕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 손에 들
어왔을 때는 몰랐던 조급함이 멀어져가자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채... 채영아...”
한발짝 앞선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자 자연스럽게 마주선 상태가 되었고, 그녀의 얼굴을 보
는 순간 덥썩 그녀를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왜 이래... 동네에서...”
지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는 사방을 살피며 슬그머니 몸을 빼냈다. 불타는 청춘의
마음도 몰라주고 빠져나가는 그녀가 야속할 뿐이었다.
“약속 하나만 해!”
“무슨 약속?”
나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굳게 잡아 쥐고 눈에 힘을 주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애써 외면
을 하는 건지 그녀는 그저 귀여운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가지만 마! 아니 가더라도 어디 가는지 알려주고 가”
“무슨 소리야... 이 맹추야~”
“기다려 줘... 조금만, 아주 잠깐이면 돼~”
“야! 앞뒤 몽땅 다 자르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듣니?”
그녀가 언젠가는 도망을 갈 것만 같았다. 아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기 전에 미연
의 방지를 한다는 게 겨우 어디로 갈지 알려주고 떠나라는 약속 뿐이었지만 그거라도 받아
놓지 않으면 안심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언젠간 어디론가 갈 거 아냐... 내가 가지 말란다고 안갈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갈 때 가더라도 어디로 가는지 알려만 주고 가라고... 응?”
“글쎄....”
“약속해!”
“그럴게...”
대답만 남겨둔 채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걸었다. 실룩대는 엉덩이를 바라보며 당장 그녀를
품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쩌면 유
부녀인 그녀와 내가 이토록 연인의 모습처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 같이 가~”
뒤늦게 그녀의 꽁무니를 따라 뛰었다. 그러자 그녀도 덩달아 달음질을 쳤다. 뛰는 모양새가
어찌나 귀여운지, 유독 발달된 하체가 실룩대는 모습은 귀여운 오리 한 마리가 달음질 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찌 남자의 속도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녀는 곧 내게 덜미를 잡혔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귀엽게 웃음을 번지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대문 앞이었다.
“하아... 하아... 휴우.... 꼴에 남자라고 드럽게 빠르네!”
숨이 차오르자 다시 격정적인 목소리가 나오는 그녀였다. 순간적으로 자지가 벌떡 일어서는
느낌이 들었고 잠시 눌러둔 욕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꼴에 남자다! 꼴에 남자가 얼마나 남자다운지 보여 줘?”
“푸흣! 또.. 또 까분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밀며 대문과 대문을 잡아주는 벽돌기둥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잔
뜩 성이 난 자지를 그녀가 분명히 느낄 수 있도록 바짝 들이댔다.
“어때? 좀 떨리나?”
“......... 떨리긴... 비켜! 들어가게!”
몸부림치는 그녀를 안으며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독하지는 않지만 쌉싸름한 맥주의 향기가
혀에 고루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입속은 너무나 달고 부드러웠다. 많지 않은 물기가
나의 입안으로 잔뜩 빨려 들어오는 느낌과 함께 나의 이성은 점점 땅바닥으로 떨어져버리고
있었다.
“쪽! 쪼옵, 쪽!”
예상대로 그녀는 나의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류 야설이나 야동에서 보는 것처럼
그녀가 나를 리드하지도 않았다. 첫키스의 느낌, 온몸에 전기가 자잘하게 퍼지고 손끝과 발
끝 그리고 자지끝이 저려왔다. 말초신경이 살아 움직이듯 무언가가 꿈틀대는 느낌이었고 그
녀의 입속으로 들어간 나의 혀는 뜨겁지는 않지만 청량감 있는 촉촉함이 잔뜩 베어 나오고
있었다.
“쪼~옵! 쪽...”
그녀의 아랫입술이 통통하다. 그녀는 뭐든지 위엣 것보다 아랫것이 더욱 통통한 듯 했다.
나의 입술에 씹히고 있는 그녀의 아랫입술은 촉촉한 푸딩처럼 말캉하면서도 말랑했다. 그리
고 나도 모르게 침범한 그녀의 가슴 언저리는 나만큼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아... 채영아...”
비록 티셔츠 위였지만 가슴의 포동포동하고 말랑한 살점의 느낌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바깥이 아니라면, 만약 그녀의 침실이었다면 그녀는 나의 모든 욕정을
받아 줄 것처럼 수동적이었다.
입안은 달달한 그녀의 향기로 가득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왠지 그녀의 입이 전부 닳아 없
어져버릴 것처럼 캔디를 빠는 느낌이었다. 나의 첫키스를 그녀에게 바쳤다. 그리고 나의 동
정 역시 나는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잊지 못 할 첫키스는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채영이 왔냐?”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와 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단숨에 떨어져 입술과 옷을
매만졌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돌아선 그녀와 내 앞으로 결코 반갑지 않은 남자가 대문을 열
고 있었다.
“오... 오빠!”
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 남자였다. 그녀의 내연남이건, 뭐건 전혀 반갑지 않
은 사내, 아저씨들만 입는다는 목 늘어난 흰 런닝셔츠와 후줄근한 면반바지를 입은 그 남자
는 그녀와 나를 번가르며 쳐다보고 있었다. 징그럽게도 길다란 털이 숭숭 난 그의 젖꼭지가
늘어난 런닝셔츠 사이로 고스란히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넌 뭐야?”
전에도 나를 보고 ‘뭐야?’라고 물었던 남자였다. 머리가 나쁜 건지, 아니면 그녀와 볼 때 마
다 함께 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사람을 꼭 그렇게 기분 나쁘게 물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병신, 멍청이같은 새끼!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나는 그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변명을 늘어놓기도 전에 집으로 향하는 정원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아... 나... 내가 정말 싫다...’
자책을 하고 자책을 해도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겠다는 다짐은 그저
머리로만 하는 다짐이었다. 차라리 ‘나서지 않는 게 그녀를 돕는 걸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라도 하고 움직였으면 자책은 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은커녕 그 남자를 피
해 이미 내 방으로 돌아와 버린 상태였다.
‘에잇! 오늘도 한 판 하겠군?’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남자가 여자를 기다린 이유가 뭐겠는가? 그리고 남편도 아닌 불쌍
한 남자가 그녀의 집에 들어와 있는 이유가 뭐가 있겠느냔 말이다. 신경질스럽게 교복을 벗
고 양말을 벗고 있는데 방문이 스르르 열리고 있었다.
‘아! 팬티!!’
나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침대위의 이불을 끌어 아랫도리를 가렸다. 너무도 급박한 상황이
라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의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분명히 여자팬티를 입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냥 넘어갈 엄마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볼 것도 없는 놈이 가리긴 뭘 가리누?”
“왜?”
엄마의 반응을 보니 여자팬티를 입은 아들의 모습은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내심 한숨 돌
리고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으며 더욱 이불을 견고하게 몸에 감았다.
“왜 그렇게 놀래... 또 딸딸이 쳤어?”
“아! 엄마!”
“아니면 뭘 그렇게 가려대냐고 이누무새꺄!”
“아냐... 아무것도...”
“왜 이렇게 늦었어?”
“그... 그냥 친구들이랑 시내에서 있다오느라고...”
“친구? 친구 누구? 여자?”
“여... 여자는 무슨... 서.. 석민이랑...”
엄마의 주특기인 꼬치꼬치 캐묻기 신공이 나왔다. 엄마가 그렇게 의구심을 갖는 것도 이해
는 할 수 있었다. 언제나 학교가 파하면 그녀를 보고, 느끼기 위해 바로바로 들어오던 아들
녀석이 12시가 넘어서 들어온 걸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다고 생각 들었다.
“석민이? 아까 10시쯤 넘어서 전화 왔던데? 너 있냐고...”
아! 그랬구나... 아마도 석민은 내가 무사한 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괜히 엄마가 오해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 아까 석민이 만나고 다른 친구랑 잠깐 놀다 들어 온 거야~ 다음부턴 일찍 올게~”
갑갑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옷을 갈아입고 씻으러 들어가거나 아니면 자겠다고 엄마
의 등을 떠밀었겠지만 누나의 팬티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
했다.
“석민이가 그러드만! 너 여자친구 생겼다면서?”
“아~ 또 뭔 소릴 들은 거야... 아냐 석민이가 오해 한 거라고~”
“오해는 무슨... 지 여친이랑 니 여친이랑 같이 놀았다며?”
“아~ 아니래도! 나 피곤해... 잘거야!”
“그래라! 넌 인정머리도 없는 녀석아! 엄마랑 얘기하는 것도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아무튼 내일 얘기해!”
“알았다... 알았어... 으이구, 아들 놈 키워봤자라더니.......”
“그런 거 아니라고 쫌!”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조금만 서운하게 하면 뒤돌아서며 신세한탄을 하듯 중얼거렸고
그럴 때 마다 나의 마음은 미안하기도 하면서 조금은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 꽃무늬 빤쓰는 여친이 사준거냐? 아주 야하던데?”
“아휴... 엄마! 쫌!!”
“너 이런 날씨에 그런 빤쓰 입으면 불알에 습진 생긴다~”
“엄마!”
어쩌면 엄마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은 항상 마지막에 툭하니 던져놓고 가는 말들일지
도 모를 일이었다. 지난 번 담배 얘기도 그랬고, 예전 오징어 사건도 그러했던 것 같다. 괜
스레 아들녀석이 상처나 받을까, 엇나가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한 반항심이나 키우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엄마는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보다는 훨씬 자
유롭고 밝게 선도를 하는 편이었던 것 같다.
너무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반바지만 주워 입고 침대로 몸을
뉘였다. 다가가면 멀어지는 그녀의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 강한 쾌감을 알려준
첫키스를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하악! 악! 아~~악!”
그러나 그런 서정적인 기분을 만끽하기엔 너무나 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평소보다는 조금
작게 들렸지만 분명히 그 목소리는 언제나 나의 귓가에 들려오는 파괴력 있는 색녀의 목소
리였다. 자동적으로 자지가 불끈 서버렸고 무시 못 할 질투심과 괜한 짜증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 저 남자가 오지만 않았어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탐하고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주무르는 동안 나는 첫경험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런 반항 없이 나의 애무와 키를 받아주던 그
녀였기에 나의 기대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
려버린 남자가 벌써 그녀의 다리 사이를 농락하며 그녀를 쾌락의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조용히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서 퍼져 나오는 불빛의 근원을 찾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게 들리더라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몽돌의 소리를 잔뜩 죽여 창가로 다가섰지만 그녀의 창은 굳게 닫혀 있
었다. 그리고 불빛과 함께 강하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색소리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윽! 하윽! 오... 옵빠.... 으윽....”
“오늘따라 왜 이래?”
“커윽... 하윽! 하악! 악! 악!”
“너 뭐야... 오늘 무슨 물을 이렇게 많이 흘려?”
“주... 죽을 것 같아... 흐응... 허윽... 옵빠... 나... 나 좀 어떻게 해죠... 흠!”
“너, 솔직히 말해... 개갈보 같은 년! 윗집 학생하고 잤어?”
담배를 빨아댈 정신조차 없었다. 우연히 들은 그들의 대화소리에 나란 놈이 회자되고 있었
기 때문이다.
‘정말? 누나가... 누나도 나랑?’
정신없이 신음을 토하는 그녀에게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아냐... 아냐 오빠... 난 오빠만 있으면 돼”
“웃기시네... 그럼 질질 싼 이건 어떻게 설명할건데? 앙?”
“아~~~악! 저.. 정말이야... 난 정말...”
“솔직히 말 안 해? 보지 확 찢어버린다?”
“악~~~~~~! 아파! 옵빠... 악!!!!”
“그러니까 좋게 말 할 때 솔직히 말해”
도대체 뭘 어쩌고 있길래 그녀가 그토록 심한 고통의 신음을 토해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그녀의 솔직한 대답이 더욱 궁금한 나였다.
“새... 생각은 해 봤어...”
“뭘? 뭘 생각해 봐?”
“그 아이랑 하는 거...”
“뭘 하는데?”
“아~~~ 아프다니까?”
“그러니까 자세히 말해!”
“성현이의 자지를 내 보지에 꽂는 상상...”
“그래서 보지가 이렇게 질질 싸고 있는거야?”
“그.. 그런가 봐....”
“그 새끼한테 대주기만 해! 그럼 정말 니 보지 불로 확 지져버릴테니까”
“걱정 마! 요즘은 오빠가 말한 것처럼 그이 랑도 안하고 있으니까!”
“그래? 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정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험악한 말은 그만해”
“근데 밖에 있는 가방은 뭐야? 윗집 꼬맹이꺼야?”
“으... 으응.. 아까 친구랑 놀러간다고 맡겨 달란거야... 엄마한테 걸리면 혼난다고”
“정말이야? 너 거짓말 하면 진짜 보지 확 찢어 버릴거야!”
“아... 알았어... 그러니까 좀 살살해주면 안 돼?”
“웃기지마! 너 같은 개보지는 아주 좆같이 다뤄줘야 말을 잘 들어!”
잔인하면서도 가혹하리만치 들리는 그들의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의 가방이 그녀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가여웠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거의 고문과도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녀는 즐기는
것이 아닌 그 남자의 성향을 따라주기 위해 고음의 신음을 질러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
고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져왔다. 어쩌면 나의 접근이 그녀를 더욱 그런 고통 속으로 몰아세
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 누웠다. 여전히 아래층에서는 고음의 신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
고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더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버리고 말았다. 차라
리 그녀의 남편이었다면 그런 말이 당연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의문의 그 남자
입에서 남편도, 그리고 나도 섹스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더욱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까... 저 남자의 정체가 뭐냔 말이야!’
머리가 복잡해지더니 곧 두통이 시작됐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그녀가 도대체 왜 원치도 않는 섹스를 하고, 그녀와는 전혀 어울
리지 않는 남자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해야만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최소한 내
가 아는 그녀는 유리만큼 약하고, 청초한 들풀처럼 청순하며, 폴짝폴짝 뛰노는 개구리처럼
활달한 성격이었다. 순수하고, 부드러우면서 여고생 같은 풋풋함까지 갖춘 여자가 왜 저런
고통 안에서 울분을 삼켜내야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변태 같은 성향인 건가?’
그녀는 내가 그녀의 속옷을 훔치고, 강간을 하겠다고 달려들었을 때도 욕을 하거나 엄청난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타일렀고 이해를 해 주었다. 그 때 나는 그녀가 흥분 상태인 나
를 자극하지 않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인 그녀의
성격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부탁을 거부할 줄 모르는 순하고 순종적인
여자라는 생각에서였다.
정말이지 그녀도 알 수 없는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
록 그녀에 대해 많은 걸 알지는 못했지만 내가 아는 그녀와는 너무 괴리감이 크게 느껴졌
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그녀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그녀는 그녀대로, 또 나는 나대
로 고통에 신음만 할 뿐이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머리를 감싸고 고민해봤자 이렇다 할 정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
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의 사랑을 받아줄 수 있는 그녀도 아니었다. 이런 지리한
미온적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만 하는 게 지루할 법 했지만 나에겐 그런 미온적인 것이라도
그녀를 볼 수 있고, 그녀를 간간히 느낄 수만 있다면 만족이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엄마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 씻고 아침까지 먹었다. 엄마는 나
를 계속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깨워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던
놈이 스스로 일어나 제 때 등교준비를 하는 게 이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가방은?”
“하... 학교에 두고 왔어~”
“왜?”
“그... 그냥...”
“그럼 도시락은?”
“냅둬... 그냥 사먹을게~”
나는 엄마가 건네주는 도시락을 마다하고 집을 나섰다. 들고 가려니 불편하기도 했지만 온
통 그녀에 대한 생각과 걱정 때문에 도시락은 그렇게 중요치 않은 물건이었다. 학생이 가방
도 없이 학교를 간다는 것, 참으로 우스운 얘기지만 어쩔 수 없이 자전거의 자물통을 풀고
다시 그것을 돌돌 말아 자전거의 몸통에 다시 자물쇠를 잠갔다.
“성현아!”
처음으로 그녀가 반갑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미웠다. 내 가방을 가슴에 안은 채 서
서히 다가서는 그녀를 바라보다 애써 눈을 피하자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서는 가방을 내밀며
말했다.
“왜 그래? 성현이 뭐 화나는 일 있어?”
“없어! 가방 이리 줘!”
뭐 특별할 것도 없는 가방이었다. 그저 평범한 모양에 평범하게 볼펜 몇자루와 실내화, 그
리고 분명히 고약한 냄새를 풍길 빈 도시락만이 들어 있을 것이다.
“성현이 화났구나?”
변함없이 밝은 얼굴의 그녀였지만 그런 얼굴표정이 싫었다. 차라리 강하고 단호하게 나를
밀어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내게도 그 남자에게 주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었다. 자꾸만 그녀의 맑은 얼굴에 빠져 들어가는 내가
싫을 지경이었다.
“.............”
나는 대꾸 없이 자전거를 돌렸다. 그리고 낚아채듯 가방을 잡고 등으로 울러맸다. 미운 그
녀의 얼굴을 보면 또 다시 햇살 같은 맑은 미소에 내 마음이 녹아버릴까 애써 시선을 피했
다. 그러자 그녀가 자전거를 붙잡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성현이 삐치니까 더 귀여운데?”
“도대체 왜 그래? 왜 당하고만 살아?”
바보 같은 나였지만, 나만큼 바보 같은 그녀가 미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 슨 소리야?”
“어제! 다 들었어! 너 바보야? 싫으면 강하게 거부를 하면 되지 왜 애원을 하냐고 그 새끼
한테!”
“너............... 됐어! 빨리 학교 가~”
“싫어!”
잠시 그녀가 변명처럼 무언가를 말하려 하다가는 급선회를 했다. 그녀 얼굴에는 그 맑던 미
소도 사라져 있었지만 불안하게 마구 떨리는 눈동자가 나의 떨리고 복잡한 마음만큼이나 힘
겨워 보였다.
“아니, 할 말은 해야겠어!”
나는 다시 자전거의 받침대를 내려 세워두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
남자가 집에 있건 없건 그건 중요치 않았다.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 남자는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나는 그 남자에게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애원을 했든, 아니면 협
박을 했을 것이다.
“학교 늦어, 일단 학교부터 가! 이따 얘기 해”
“아니, 이대로 가 봤자 하루 종일 짜증만 날거야”
“왜 그래... 내 일이야...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알아! 아는데 니가 너무 바보 같아서 참을 수가 없어! 남편이라면 이해하겠어... 도대체 왜
그렇게 당하고만 사는 거야? 솔직히 그 남자가 샘이 나기도 했었어... 그런데 이젠 아니야,
밉고 증오스러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아프게 하잖아!”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네가 그렇게 함부로 말 할 일이 아니야... 빨리 학교나 가!”
“너도 나 좋아한다며?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고 힘들어 하는데... 너 같으면 그냥 보고만 있
겠어? 오죽 답답하면 내가 이래?”
“그 마음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래서 그러는 거라고!”
“.................”
“속상하게 왜 그러니? 솔직히 내가 널 엄청나게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치자! 너와 내가 행복
하게 맺어질 수 있는 사이니? 그런 나이차니? 그런 조건이니?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해”
“뭘 그만해? 싫어! 너 좋아하는 건 내 자유야...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그럼 너도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왜! 도대체 왜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 너에 대한 마음이 네 말대로 호기심이나 단순히 여
자의 몸에 대한 것이라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겠어!”
그녀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곧 거실의 창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소파 아래서 담배를 꺼내 불
을 붙였고 재떨이를 꺼내며 소파에 앉아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꼬아 내린 두 다리가
어찌나 가늘고 길다랗게 뻗어 있던지 눈을 두기가 미안할 정도로 예뻤다.
“내가 언제 좋아해달라고 했어? 사랑해달라고 했냐고!”
그녀는 나지막히 말을 꺼냈다. 소파 앞에 던져진 담배와 라이터를 붙잡아 불을 붙이고 그녀
와 같이 옆자리에 몸을 날려 앉았다. 나는 그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었는데 그녀에겐 간섭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왜 내 인생에 들어와서....”
“너야말로... 왜 내 인생에 들어와서 짜증나게....”
넋두리를 하듯 우리 둘은 그저 담배만 연신 피워대고 있었다. 담배가 가진 장점 중에 하나
가 흥분된 마음을 녹여 내리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와 나는 짧아진 꽁초를 재떨이에 비
벼끄며 나란히 현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현아...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너의 마음이 그저 호기심이라고만 생각했어... 진심으로
내게 다가오는 너를 더 이상은 볼 면목도, 용기도 생기지 않아....”
“무슨 뜻이야? 앞으로는 날 보지 않겠다는 뜻 같은데?”
그녀가 생각을 정리한 듯 조용히 말을 건네왔다. 그러나 그녀가 내뱉는 이별선고는 마음이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여전히 뜨겁고 강하게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시작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별이라는 게 더 우습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 없
이는 정말 못 살 것만 같았다.
“맞아.. 이제 그만 하자, 뭐... 시작한 것도 없지만 서로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아... 안 돼! 싫어! 나... 난 그렇게 못해....”
“성현아!”
“아.. 안 돼... 알았어... 나 누나한테 이제 간섭 안 할게.... 응? 제발...”
나는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로서도 ‘안보면 되지!’ 하고 털어놓은 말들이었지만
막상 그녀가 이별을 선고하자 나의 마음은 그녀를 붙잡으라 마구 외쳐대고 있었다.
“아니,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이제 나도 널 볼 자신이 없어...”
“왜? 아니야... 날 왜 못 봐? 우리 그냥 이렇게 잘 지내면 돼... 응?”
“......................”
“귀찮게 안할게... 더 이상 그 남자에 대해 이렇다 간섭 안할게...”
나는 그녀의 맨다리를 붙잡고 사정을 했다. 목석처럼 굳어 내내 다른 곳만 쳐다보던 그녀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슬펐다. 지금 보고 있는 여자를 앞으로 보지 못할 걸 생각하니 못
견딜 것만 같았다.
“늦었어! 빨리 학교부터 가~”
“까짓 학교! 필요 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자꾸 왜 그러니? 성현이 니가 힘든 만큼 나도 힘들어! 그러니까 그만 하자고!”
“힘들게 안할게... 제발~”
나는 두 손을 모아 빌기까지 했다. 몰랐다. 나조차도... 내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다랐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몰라도 또 아픔은 다가 올거야... 그러니까 그만 하자~ 착하지?”
“아직 내 마음은 너를 놓지 않고 있다고! 마음이 이런데 어떻게 그만하자 그래?”
“마음.........이 안 놔줘?”
“그래!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잖아! 그 남자가 너를 그렇게 아프게 하고 너를 탐하는데도
내 마음은 계속 너를 잡고 있잖아!”
눈에서 눈물이 뚝 흘러내리고 말았다. 쪽팔리게 울지는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뜨겁게
타고 내리는 눈물을 보이고 만 것이다. 그러자 그녀가 보드라운 두 손으로 나의 눈물을 닦
아주더니 나를 가득 안아주었다. 나 역시 꿇었던 무릎을 세우며 그녀를 품안 가득 안았다.
달콤한 향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살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아기같거나, 또는 청포도
의 진한 향기와도 같은 풋풋한 향기였다.
“녀석...”
그녀가 나의 뒷통수를 부드럽게 만져주고 있었다. 어찌나 부드럽고 황홀한 손길인지 그대로
그녀 곁에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어서 학교 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귓가에 울리는 그녀의 낮은 음성에 손끝부터 발끝까지 퍼지는 묘한 감정에 심장이 울컥거리
고 있었다.
“나중에... 나 행복하게 해주려면... 좋은 대학가야할거 아냐~”
그녀가 나를 떼어 놓았다. 그리고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까치발을 들어 내 입에 입을
맞춰왔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첫키스보다 강렬한 쾌감이 온몸을 스쳐가고 있었다.
“후회 안하지?”
“안 해... 그런 거~”
“나중에 나 원망하기 없기다?”
“내가 왜 누나, 아니 널 원망해~”
“약속 할 거지?”
“응”
“그럼... 내일 저녁 때 내려와... 밤에~”
“바... 밤에?”
그녀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나의 입술을 스쳤다. 그리고는 새댁이 남편 출근길을 재촉하는
듯 팔짱을 잡아끌며 등교를 재촉했다.
‘채영아~ 그래... 난 너만 있으면 돼... 사랑한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페달을 밟으며 등 뒤로 멀어지는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밝은 햇살
보다 더욱 밝게 빛나는 그녀를 잃을 뻔 했던 나의 집착에 꾸지람을 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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