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5일 화요일

작은사랑

밤새 여기서 놀면 안돼?
바람이 차잖니. 사람들도 뜸한 시간이니까 이젠 들어가자.

밀물이 시작되면서 한낮에 저 만치 넓게 펼쳐졌던 백사장은 어느새 모래턱만 남긴채 출렁이는 바닷물로 가득했다.
수만명이 함께 사용하는 목욕탕처럼 뒤 범벅이 됐던 해변가는 쓸쓸하게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삼삼오오 모닥불을 중심으로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다정한 연인들, 좋아서 웃음으로 입이 ?어질 듯 떨들어대던 아이들도 이젠 잠이 들었다.
모래 언덕 사이로 이따금 아쉬운 연인들이 뒤엉켜 있지만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갯바위에 걸터앉아 소주병을 까 내려가던 젊은이들도 이젠 지쳐서 어슬렁 거리며 잠자리를 찾는 시간이다.

밤새도록 전구의 빛이 꺼지지 않을 것 같던 노점상들도 하나 둘 사라져가는 인파를 의식한 듯 가게 문을 닫고 있다.

진아는 친구랑 이 해변가에 놀러왔다.
못가게 말리는 부모님을 겨우 진숙이랑 같이 가는 것이라며 설득해서 어거지로 내려온 바닷가지만, 막상 기차를 타고 보니 진숙의 옆에는 허우대 멀쩡한 남자애가 있었다.
머스매와 놀러가는 것을 감추려고 진아를 꼬득였던 것이다.

밤이 왔다.
적어도 진숙은 머슴애를 밖에 재우고 자신을 방안에서 자게 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진숙은 방구석에서 둘이 달라 붙어살며 자신이 어떻게 밖에서 쭈그려 잠을 자고 있는지 알바 없어 했을 뿐만 아니라 바닷가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첫날 밤은 그렇게 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밖을 내다 보려니 했다.
함께 내려온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라도 삐끔 밖을 내다보고 밥이라도 함께 하자고 할 줄 알았다.
진숙은 그 날도 대낮부터 머슴애와 들러붙어 하루종일 헉헉 소리만 밖으로 품어냈을 뿐이다.
진아는 진절미가 났다.
유일한 친구였던 진숙이 년이 벌써 몇일째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머슴애와 붙어 먹는지 짜증만 나기 시작했다.

저년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꼬득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초라한 자신의 몰골을 어디다 하소연할까 싶어 울고 싶었다.
정처 없이 바닷가를 몇번이나 돌았는지 모른다.
파도 깊이 자신을 던져봐도 해변가로 자꾸만 밀려나왔다.
부표 멀리까지 헤엄치며 속상한 마음을 달랬지만 부글거리는 마음은 식을 줄 모른다.
진아는 지금 부표에 메달려서 생각중이다.
지금 당장 보따리 싸들고 집에 가야겠다 싶었다.
진숙이 년이 혼자 재미보는 들러리로 자신의 인생을 낭비했다는 것이 너무 분했다.
숨을 고르려고 애를 써도 진정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힘차게 부표로 헤엄쳐온다.
웬만한 사람들은 부표까지 위험해서 오지 않는데 누굴까 싶어 궁금했다.
남자였다.
건장한 어깨를 가진 남자가 푸푸 숨을 고르며 힘차게 부표로 다가오고 있다.

이봐요, 아가씨. 괜찮아요? 그 사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진아에게 물었다.
네? 진아는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의아해한다.
아까부터 계속 부표를 붙잡고 있어서 물살에 떠밀려간줄 알고 구하러왔어요. 사내는 숨을 고르며 진아의 의문에 대답했다.
아, 저 수영 잘해요. 그냥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겼었던걸요. 밝은 표정으로 사내의 걱정에 화답했다.
그랬군요. 하지만 멀리서 보면 자살할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안도하며 청년이 말한다.
여기 수상안전요원이에요? 진아가 물었다.
아뇨, 물놀이하던 중에 아까부터 뭔가 매달린 사람이 보이길래 구해야 할 것 같아서 ... 
전 멀쩡해요. 한번 볼래요? 저 모래사장까지 누가 먼저 헤엄치나? 진아가 제의했다.
좋아요. 그럼 먼저 출발해요. 사내는 진아가 여자라는 점을 고려하여 먼저 출발할 것을 제의했다.
진아는 한결 좋아진 기분으로 힘차게 뭍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청년도 힘차게 뒤를 ?아오고 있다.
진아는 장난기가 발동하여 중간쯤 와서는 허부적 거리며 물 먹을 연기를 한다.
청년이 얼른 다가서며 버둥거리는 진아의 머리채를 붙들고 목을 껴 안아 배영이 되도록 몸을 돌려버린다. 질질 끌려가듯 진아는 배영 자세로 청년의 팔 힘에 뭍까지 딸려갈 판이다.
됐어요. 장난친거에요. 진아가 놔 달라고 애원했다.
어휴, 물에선 장난치면 큰일나요. 하며 청년은 감았던 팔을 풀었다.

바닷가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진아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뛰어든 청년이 있는 한 적어도 오늘은 외롭지 않다.
밤이 깊어 간다.
청년은 이젠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며 진아를 자꾸 밀어 넣는다.
갈 곳이 없다.
이틀간 툇마루에서 쪼그리고 새우 잠을 잤을 뿐이다.
더러운 기분으로 다시 그 집에 돌아갈 수는 없다.
적어도 이 청년이 있는 한 한잠을 못자더라도 여태까지 진숙이가 행했던 어떤 일보다 행복할 것 같았다.
낯선 이 남자에게 몸을 풀 수도 없다.
몇일 째 헐떡이던 진숙의 숨소리는 더욱 들을 수 없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밤바다의 날씨가 제법 쌀쌀해 진다.

혼자 왔어요? 진아는 청년에게 물었다.
아뇨, 가족이랑 함께 왔어요.
결혼했어요?
아뇨, 부모님을 모시고 왔는데 바쁘다며 돌아가고 혼자 남았어요. 청년이 쑥스럽게 대답한다.
그럼 급할 것도 없는데 왜 자꾸 가라해요? 진아가 물었다.
그런 댁은 왜 안 들어가려고 하죠? 청년이 되 물었다.
전 혼자 왔어요. 바다가 좋아서 혼자 왔어요. 진아가 독백하듯 대답했다.
혼자왔다구요? 눈이 휘둥그레진 청년이 물었다.
바다가 좋잖아요. 혼자 이렇게 밤새도록 앉아있다 또 날이 밝으면 바닷가에 들어가곤 하죠. 진아는 거짓말을 쉽게 풀어 놓았다.
음, 진짜 바다를 좋아하는 분이군요? 청년이 말한다.
네, 바다가 좋아요. 하늘을 봐요. 별이 총총하죠? 서울에선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을 보려고 바닷가에 왔어요. 혼자 왔어요. 진아는 넋두리 하듯 말을 이어간다.
전 몇일 더 있을꺼에요. 이 바다가 좋아서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왔으니까요.
그래요? 전 내일 아침 서울로 떠나요. 청년이 대답했다.

진아는 아득했다.
몇일 더 남아 자신과 함께 해주길 바라며 몇일 더 있을거라 말했건만 무심한 청년은 당장 내일이면 자신과는 완전히 모르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소리가 점점 멀리 들렸다.
진아는 몇일째 잠을 설친 탓도 있거니와 청년의 떠난다는 소리에 혼절하듯 모래언덕에 쓰러지고 말았다.

눈을 떴다.
진아는 따뜻한 온돌이 들어오는 호텔에 ‡또賤 있었다.
짠 물에 흠뻑 젖었던 옷가지들이 그대로 사각거리는 소금이 되어 온 몸에 붙어 있었다.
눈을 뜨니 청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절친한 진숙이 마져 욕정을 위해 자신을 버렸건만 처음 만난 이 청년은 한잠도 자지 않고 자신이 깨어나길 기다렸다는 사실에 목이 메였다. 눈물이 났다.

일어났군요. 여긴 열두시까지 사용할 수 있어요. 
피곤이 풀릴때까지 계속 쉬세요. 전 이만 서울로 올라가렵니다. 청년이 말했다.
아뇨, 저도 나갈래요. 진아는 개운해진 몸을 움직였다.
샤워를 하세요. 몸에 소금이 듬뿍 발라진 것 같잖아요? 청년이 권한다.

진아는 시원한 물줄기를 뒤집어썼다.
상쾌한 아침이다.
청년은 샤워가 끝날때까지 잠시 밖에 나가 있었다.
갈아입을 옷가지를 걸쳤지만 진숙이가 묵고 있는 숙소에 가야만 짐을 챙길 수 있다.

전 이만 가렵니다. 청년은 문을 삐끔 열고 작별 인사를 했다.
기차를 타고 가나요? 진아가 물었다.
네, 기차 여행이 좋잖아요. 편하기도 하고...
몇시차에요? 진아가 다급하게 물었다.
열한시반 열차에요. 청년은 대답하고 훌쩍 호텔을 떠나갔다.

진아도 급한 마음에 달리듯 달리듯 진숙이 묵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진숙은 아직도 머슴애와 붙어 떨어지지 않는 가쁜 숨결을 토해내고 있었다.
방문을 확 열어 채쳤다.
발가벋은 두 년놈이 뒹굴고 있다.
진아는 그 년놈들이 보이지 않았다.
구석에 나뒹굴던 자신의 보따리만 챙기며 진숙의 얼굴에 침을 타~악 뱉었줬다.

서둘러야 한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르는 그 청년을 위해 내 달려야 한다.
그 사람의 이름이라도 알아뒀으면 좋으련만 하는 아쉬움으로 머리가 빼곡했다.

열차는 예매가 끝난 상태라서 더 이상 표를 구할 수 없었다.
무작정 역사로 뛰어 들었다.
황급히 떠나는 열차 꼬리에 몸을 실었다.
어찌 잽싼지 누구도 진아를 잡을 수 없었다.
벌금이 수천만원이 들더라도 이 기차를 타야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기차를 붙잡았다.

기차는 달리고 있다.
오징어 땅콩을 파는 사람들이 맴돌고 있다.
복잡한 틈새를 이리저리 헤메고 있다.
절박한 마음에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숲을 헤집고 있다.

청년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진아는 한시간 가까이 헤맨 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눈 앞에 선연히 나타난 청년의 가슴이 그리웠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진아는 그 사람들이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알 필요도 없다.
무작정 달려들어 그 사내의 품에 자신을 묻었다.
엉엉 울었다.
그 청년은 자신을 가만히 보듬어 주었다.
오빠!! 진아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되어 얼룩졌다.
옆좌석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슬며시 자리를 비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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