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5일 목요일

옆방의 소리

“어휴 자기 왜 그래, 아니 이렇게 서 가지고 어쩔려구. 좀 있으면 밥 먹으라고 부를텐데”
“나도 모르겠어 처갓집에 와서 그런가? 이상하게 꼴리네. 이것 좀 보라구. 후딱 한 번 하면 안 될까?
“어머머 자기 미쳤어. 그걸 꺼내면 어떻게 해. 정신 차리고 좀 가라 앉혀봐”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미진이네 집은 정릉 종점에서 10분 정도 올라가는 언덕배기에 있었다. 원래 넉넉한 집안이었는데 아버지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 번 낙선하고 나서 집안이 기울었고 집도 돈암동의 큰집을 처분하고 그 구석으로 이사를 온지 두 서너 달된 터였다.
안채는 방 세 개의 개량 한옥이었고 뒤뜰에 두 칸짜리 방 하나가 있는 별채가 있었는데 그 방 중간을 막아 왼쪽은 당장 쓰지않는 것들을 넣을 수 있는 짐방으로 쓰고 오른쪽 방을 미진이가 썼다. 그런데 칸막이가 엉성하여 조금 힘을 주어 밀면 무너지지 않을까 싶었으니 방음은커녕 숨소리까지도 들릴 정도였다. 미진이 방 쪽으로 조그만 책꽂이와 앉은뱅이책상이 놓여 있었으나 방음에는 크게 기여하질 못했다. 하기사 짐방으로 쓰자고 구분해 놓은 것이니 방음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리라.
그날 시집 간지 6 개월이 채 못 된 언니 부부가 아버님 생신이라고 왔고 안채는 집안 어른들이 써야한다고 해서 짐방으로 쫓겨 온 것이었다.

미진이는 대입 재수생으로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웠지만 막내딸을 끔직히 여기는 아버님의 배려로 가정교사를 두게 되었고 나한테 두 달째 배우던 터였다.
그녀는 키가 크고 날씬하다는 것을 빼면 평범해 보이는 여자 애였다. 공부도 그렇고 평소엔 말도 많지 않았는데 공부가 하기 싫거나 장난 끼가 솟으면 나한테 매달리듯이 영화 얘기를 해달라고 했고 그것도 실증이 나면 나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 묻곤 하였다. 사실 나는 얘기할만한 여성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재미삼아 적당히 꾸며 얘기를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래서요? 그래서요?” 하며 나한테 바짝 붙어 손이나 팔을 잡으며 흥미를 보이곤 했다.

“그래 그 여자하고 했어요? 했죠? 한거죠?”
“하긴 뭘 해 임마”
“선생님은 되게 밝힐 거 같아. 해보니 어때요?”

그녀가 내 허벅지를 툭툭 치며 물었고 내가 할 말을 잊고 얼굴이 벌개져 있으면 그게 재미있다고 깔깔 웃곤 하였다.
나는 그런 그녀의 스킨쉽이 싫지 않았으나 시도 때도 없이 좆이 텐트를 치던 시절이라 그걸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명색이 선생 아닌가.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내가 대학교 3학년이었고 그녀와 두 살 차이밖에 안 났으니 맞먹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관계였다 싶다.
그날은 미진이가 안채에 들어가 있어 공부를 늦게 시작했었다. 손님들이 많아 그냥 가야 되는 거 아닌가 생각했는데 미진이가 떡하고 식혜를 갖고 와 그걸 먹고 “오늘은 재미있는 영화 얘기나 해요 선생님” 하고 그녀가 나를 꼬시던 참이었다.

“못 참겠어? 손으로 빼줄까? 오늘은 왜 이렇게 커?”
“미치겠어 그냥 한 번 박자”
“아이구 이거 어른들한테 들키면 어쩔라 그래”
“자기도 꼴렸네 뭐. 자기 보지에 물이 흥건한데”
“자꾸 만지니까 그렇지 뭐. 빨리 해“

그 순간 숨을 죽이고 있던 미진이가 “미쳤어들” 이라고 낮게 응얼대며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얼굴이 발갛게 변해 있었다. 나도 숨을 죽인 채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이 밑으로 깔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 밑을 보니 주책없이 내 두 손이 잔뜩 꼴려 있는 내 물건을 바지 위로 움켜쥐고 있었다. 위로 솟은 내 물건을 보던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았다.
그 순간 옆방에서 언니의 쌕쌕대는 소리가 들렸고 남자가 여자의 보지에 방아질을 하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진이의 손을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그녀가 내 허벅지 위에 앉게 되면서 내 목에 두 손을 걸었다. 입술이 마주 닿았고 그녀의 혀가 내 입 속으로 들어왔다. 미친 듯이 그녀의 혀를 빨아들였다. 내 손은 어느새 그녀의 브라우스 속으로 들어가 탱탱한 젖을 주무르기 시작했고 그녀의 보지에 맞닿은 내 좆은 죽겠다고 용트림을 했다. 그녀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드는 느낌이 들자 나는 젖을 주무르던 손을 빼어 그녀의 허벅지 속으로 옮겼다. 한 여름에 입은 거라곤 얇은 면 팬티 하나 아닌가, 내 손 끝에 물기 젖은 그녀의 보지가 팬티 위로 닿았다. 팬티를 옆으로 제끼고 손으로 그녀의 맨보지를 훑었다. 그녀의 신음소리와 입에서 나오는 열기가 내 얼굴에 쏟아졌다. 그녀의 손을 끌어 내 좆을 쥐게 했다. 그녀가 꼼지락대며 내 자지를 주물렀다. 그녀의 엉덩이를 조금 옆으로 밀치고 바지 지퍼를 내리고 좆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진도가 졸지에 한까번에 나가니 나도 당황되는데 그 애야 오죽했겠나. 그녀의 입에서 큰 한 숨이 쏟아졌다.

“이상해요 선생님”

나는 얼른 손가락을 그녀의 입에 대고 소리를 내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보지와 자지를 주무르며 옆방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구 너무 좋다 자기도 좋지?‘
“난 조마조마해 누가 올까봐”
“스릴 있으니까 더 꼴려. 자기 보지가 꽉꽉 씹어”
“나도 이상해진다. 자기야 조금 빨리 좀 해봐. 그래그래 그렇게”
“뒤로 박게 해줘 응?”
“또 시작이다. 그냥 하지”
“자기도 좋으면서, 엎드려봐”

이번엔 쑤시는 소리와 살이 맞닿는 소리가 적나나하게 그리고 외설적으로 들려왔다. 내 좆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도 그녀의 구멍에서 손을 빼 크리토리스를 집중적으로 애무했다. 그녀가 머리를 뒤로 제치며 몸부림을 친다.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내 좆을 그녀의 보지에 박을까 말까를 맹렬하게 반복해 생각했다.

“미진아 우리도 박을까?”
“몰라”

나는 기특하게도 그 순간 박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만에 하나 미진이가 악이라도 써서 언니와 형부가 우리가 씹한 걸 알게 되면 낭패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녀를 일으켜 세워 나와 마주 보고 내 위에 걸터앉게 했다. 그녀의 보지가 내 좆을 눌러 걸터앉게 된 것이다. 얼굴을 마주 하게 되니 자연스럽게 키스를 하게 되었고 그녀는 시키지 않았는데도 손을 뒤로 하여 자기 엉덩이 밑으로 삐져나온 내 좆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젖과 보지 그리고 엉덩이를 바쁘게 번갈아 만지며 옆방에서 떡치는 리듬에 맞추어 내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었다. 거의 쌀 지경이었다. 그녀도 몸을 뒤로 제끼며 흥분의 파도를 타고 있었다.

옆방에서는 언니가 내는 고양이 소리가 점점 빨라졌고 좀 있자 형부의 그르렁 소리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둘이 싼 모양이다.

나는 한 참 꼴려있는 상태지만 옆방에 소리가 들릴까 싶어 그리고 안채에서 누구라도 올까 싶어 미진이를 일으켜 세우고 옷을 추슬러 준 후 공부하는 자세로 앉게 했다. 내가 미소를 보내자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사며 부끄럽다는 표시를 했다.

옆방의 두 사람이 안채로 가고 나서 일하는 아줌마가 우리들도 와서 밥을 먹으라 했으나 아까 떡을 많이 먹어 생각이 없다고 물린 후 우린 다시 껴안고 키스하고 서로의 보지와 자지를 주무르고 그리고 어렵사리 잠깐 박았다가 그녀가 너무 아프다고 해 빼고 그리곤 마지막으로 그녀의 보지를 빨아주어 거의 까무러치게 하는 걸로 사제간의 러브스토리의 첫 막이 내려졌다.

어찌 생각하면 미진이의 언니와 형부 덕에 너무 쉽게 섹스플레이가 시작되었지만 그 다음부터 의례 그렇듯 일사천리로 풀린 건 아니었다. 그녀가 몸을 사려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의외로 내가 조심을 해서였다.
당시 ROTC 훈련을 받았던 나는 여자관계로 군사훈련이나 학업에 차질이 생기는 것을 몹시 우려하였었고 미진이의 성격상 일단 섹스관계가 깊어지면 학교고 뭐고 때려 치고 결혼부터 하자고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다고 타고난 색골인 내가 그냥 지냈겠는가.
그 애는 하루 짙은 애무가 이루어지면 그 다음 날은 그래도 공부랍시고 하는데 이틀째가 되면 안절부절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리듬에 맞춰 질펀하게 애무를 하곤 했다. 키스하고 만지고 핥고 빨고 그러나 가급적 박는 건 자제를 했고 끝내는 그녀의 입이나 몸에다 사정을 했고 그녀에게는 입으로 보지를 빨아주어 오르가즘에 오르게 했다.
남자는 싸고 나면 만사휴의인데 미진이와 나는 싸는 건 일주일에 한 번 정도이고 나머지는 거의 애무로 시간을 보내니 하루 온종일 둘이 함께 꼴려서 서로의 몸에서 손을 떼질 못하곤 했다. 내 좆은 항상 서 있었고 그녀의 보지도 항상 흥분상태로 씹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 둘은 또 다른 한 쌍의 씹하는 소리를 듣고 드디어 죽살나게 후벼 파기 시작했다.
그 해 방학을 얼마 앞둔 7월 초, 방학이 되면 내가 예비사단에 입소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 전에 추억을 만들자고 그녀가 졸라 인천 송도엘 갔었다.
그때도 송도는 지저분하였으나 튜브를 붙잡고 바다 속에 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서로의 몸을 주무르며 키스하며 지냈다. 물 속에서 서로의 자지와 보지를 만지고 비비고 문지르고 하는 그 맛은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아무튼 한나절 그리 보내고 나니 온몸이 화상을 입었고 소금기가 몸에 말라붙어 찝찝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 우리는 몸이나 씻고 가자고 근처의 장급 여관엘 들어갔다.
둘이 옷을 벗고 욕실에 들어가 물을 끼얹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어느 년놈이 우리와 벽을 같이 한 옆 욕실에서 붙어 씹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이것들 분명히 여자가 엎드려 욕조를 잡고 남자가 뒤에서 박는 모양인데 이 변태들 씹을 하며 남자가 여자의 볼기를 손바닥으로 치는 것이 분명했다. 온갖 쌍욕을 주고 받으면서 말이다.

‘아이고 보지 찢어진다’
‘내 보지를 찢어 줘’
‘괜챦아 더 세게 때려’
‘자기 좆대가리가 목구멍으로 나오는 거 같애’
‘니 보지는 개 보지야’
‘너 이년아 내 좆 박으면서 김 가놈 좆 생각하지?'
'뭐해 내 젖이 놀쟎아 젖좀 주물러 줘'


난리굿을 하며 씹질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씻지도 못하고 서로 껴안고 벽에 기대어 그들의 음담을 들으며 잔뜩 꼴려 서로의 보지와 자지를 쥐어뜯다가 너무나 꼴려 선채로 내 좆을 그녀의 보지에 박아버린 것이다. 그리곤 그들의 리듬을 따라 씹질을 하며 흥분의 깔딱고개를 수없이 넘다가 질탕하게 서로의 좆물과 씹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그들이 조용해진 후 우리는 욕실에서 그들이 했단 거와 똑같은 폼으로 박으며 그들보다 더 외설스런 쌍소리를 해가며 맛나게 씹을 즐겼다.

여름방학 기간 내가 훈련을 받는 동안 그녀는 학원엘 다녔고 방학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 사제는 다시 만나 공부와 사랑을 계속하였다. 그해 겨울 그녀는 놀랍고 자랑스럽게도 흑석동에 있는 C대에 입학을 하였다.

첫사랑 - 11부

사랑 앞에 나란 놈은 또 다시 약해져버렸다. 매몰차게 몰아붙이면 그녀가 내게 잘못했다 용
서를 구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내가 빌고 말았다. 누가 상대방을 더 좋아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녀가 없으면 안된다는 걸 재차 깨달았고 이제는 지울
래야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그녀를 평생 가슴이라는 공간에 새겨놓은 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자존심 따윈 필요없어!’

드라마의 대사처럼 나는 내 자신을 타이르고 두둔했다. 자존심으로 그녀를 지우려 했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쯤 정신병원에 갇혀 평생을 낙오한 듯 후회와 체념을 되풀이하며 살고 있
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난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아니 놓지 않았다. 멀어지는 그녀를
쫒아가 발목을 붙잡았고, 나를 버리려는 그녀에게 매달려 애원을 했다.

사랑?
아직은 어린 내게 사랑이란 그저 같이 있으면 좋고, 곁에 두고도 보고 싶은 것이 전부였다.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두 다리를 벌려주는 것도 사랑이겠지만 그보다도 나를 향한 마음이
수줍은 여고생과도 같은 그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쓰는 것도 사랑이었다. 난 그 사랑을
지키고 갖기 위해 나의 모든 걸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나는 버스를 타고 석민의 학교 앞으로 갔다. 무작정 찾아갔다. 요즘처럼
휴대폰이 있거나 삐삐가 있어서 약속을 따로 할 수 있는 장치도 없었지만 나는 그의 행적을
꿰뚫고 있었다.

먼저 찾아본 곳은 인근의 당구장이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 즐길만한 꺼리는 별로
없었다. 오로지 당구 아니면, 노래방, 그것도 아니면 농구 뿐이었다. 가끔은 오락실에 진을
치고 앉았을 때도 있었다. 지금은 동네에 한 두 군데나 있는 당구장이지만 그 때는 경쟁이
라도 하듯 줄지어 있던 당구장이기도 했다. 나는 석민의 학교 주변의 당구장을 돌며 그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노래방도 동시에 찾아 헤멨다.

‘학교 근처에 없으면... 시내에 있을텐데...’

학교 인근에는 석민의 흔적이 없었다. 간간이 중학교 시절 동창을 만나 그의 흔적을 물었지
만 정확히 알고 있는 친구는 없었다. 답답하기만 했다. 내가 왜 그를 이리도 애타게 찾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단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건, 바로 내일 밤 치러질 수도
있는 첫경험에 대한 대비였다. 석민의 첫경험 이야기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려면 그를 찾는 게 급선무였다. 누군가에게 첫경
험의 준비를 묻고 준비한다는 게 다소 창피한 일일수도 있었지만 그녀 앞에서 창피한 것보
다는 낫다는 판단이기도 했다.

시내에 있다면 석민은 민영과 함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의 질문 공세는 헛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아예 질문 자체를 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가 학교 부근에 있
길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이미 지워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 친구란 놈이 찾으면 꼭....’

한동안 그녀에게 빠져 석민을 비롯한 내 주변인들에게 너무도 소홀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후회되거나 크게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누구나 자신이 정해놓은 가치관
에 따라 행해지는 일의 우선순위가 정해지듯 단연 내겐 그녀가 1순위 였을뿐이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검게
틴팅이 된 도로가의 허름한 상가로 삼삼오오 몰려 들어가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볼 수 있었
다. 만화방이었다. 속는셈치고 나도 그들 무리를 따라 만화방으로 들어서자 이미 빼곡하게
소파를 차지하고 있는 학생무리들이 보였다. 테이블엔 만화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라면
그릇부터 왕소라 같은 과자봉지까지 테이블을 헝클인 채 말 그대로 초만원 상태였다.

뿌연 담배연기 사이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간히 낯이 익은 얼굴을 가진 녀석들이 보
이기는 했지만 석민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뒤돌아 나오려는데 무척이나 익숙한
뒷통수를 가진 녀석이 보였다. 석민이었다.

“으이그~ 보라모델 두고 청승맞게 뭐하냐?”

석민은 내가 다가온지도 모른 채 성인 만화에 푹 빠져 있었다. ‘미아리 텍사스 블루스’라는
만화였는데, 제목만 봐도 딱 사창가에서 주먹 쓰는 내용이 그려지는 표지를 가지고 있었다.

“어? 왠일이냐? 니가?”
“왠일은... 재밌냐? 나가자!”

“나, 이것만 보고~”
“아~ 씨발! 친구가 찾아왔는데... 만화나 처 볼 생각이냐?”

총 14권 완결에 이제 2권째를 보던 석민은 한참 재미있게 보던 만화책을 카운터에 맡기며
계산을 했고 곧 함께 만화방을 나섰다. 그리고 인근의 커피숍으로 발걸음을 옮겨 파르페 두
개를 시켜놓고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에 꼬라 물었다.

“근데 니가 여기까지 왠일이야?”
“친구보러 왔는데 왠일은......”

“병신~ 뭐냐? 니 얼굴만 봐도 다 알아~ 뭐야?”
“뭐긴...”

석민은 음흉한 눈빛을 해서는 아주 얄밉게 담배를 빨아댔다.

“근데 너 그 누나는 뭐야~ 졸라 미인이던데... 어디서 만난거야?”
“큭! 채영이?”

“캬~ 이름도 채영이... 뒤에 ‘영’자가 들어가는 애들이 예쁜 애가 많은가 봐~”
“민영이... 채영이?”

석민의 말을 들어보니 그럴싸 한 것 같기도 했다. 워낙 이것저것 잘 끼워 맞추기도 하는 녀
석이었지만 왠지 그의 말은 신임이 가기도 했다. 잡기에 능한 친구이기에 그 머리로 공부를
했더라면 하버드를 수석으로 졸업을 했어도 했을 놈이었다.

“뭐야~ 진짜 찾아온 이유가?”
“이유는 무슨....”

“솔직히 안 깔래? 너 진짜 서운하려고 한다~”
“알았어... 알았어...”

나는 속으로만 앓고 있는 나의 첫사랑이 너무나 아련해 석민에게 털어놓으려 했지만 왠지
그의 입에서는 좋은 얘기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에다 자존심마저
센 내 성격상 모조리 말을 하기란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뭐야... 답답하다!”
“나, 내일 채영이랑 자기로 했는데...”

나는 차마 그녀가 누구이고, 나이가 몇인지에 대해서는 비밀이 붙이기로 했고 석민을 찾은
진짜 목적만을 말하기 시작했다.

“오~~~~~~ 미친놈! 자랑하러 왔냐?”
“자랑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돼?”

“공짜로?”
“또 뭐~ 파르페 내가 살 게!”

“아! 쪼잔한 새끼! 집도 잘 살면서...”
“그게 그거랑 뭔 상관이야! 알았어.. 나중에 밥 살게!”

대충 석민에겐 그녀를 어떻게 만났는지, 어디서 만났는지와 같은 과정적인 설명을 무시한
채 오로지 나의 궁금증에 대한 말로 이끌었다. 대충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성적 지식이란 그저 앞 위 다 자른 알맹이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차근차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선 노트와 필기구를 꺼내 메모까지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짜식! 그럼 지금부터 강의 들어갈 테니까 형 얘기 잘 들어 둬!”
“빨리 시작이나 해~”

아마 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초롱초롱 빛나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한 여자를 위해 이
렇게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하는 것을 그녀는 알까? 그녀의 마음이 어떻건, 그녀가 나를 부
른 목적이 어떻건 간에 만반의 대비를 해 놓는 게 절대적 효율가치로 따져봤을 때 쓸데없는
소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중요한 건, 분위기야...”
“분위기?”

“솔직히 나도 첫경험을 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했지만, 알고 보니까 그게 가장 중
요해... 쓸데없이 긴장을 하게 되면 실수를 많이 하고, 또! 경험상 졸라 빨리 쌀 수도 있다는
거지”
“분위기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데?”

“그러니까... 뭐 술을 간단히 마신다던가~ 아니면 작은 스킨십부터 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흥분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필요한데... 솔직히 그게 졸라 어려워”
“그 어려운 걸 어떻게 하냐?”

“그건 니가 알아서 하고! 두 번째는 거칠게 굴면 안 된다는 거지! 솔직히 발가벗은 여자가
눈 앞에 딱 나타나면 아주 눈알이 돌아서 가슴을 빨고 보지를 우왁스럽게 만지게 되어 있
어, 여자들은 그런 거 진짜 싫어하거든? 그러니까 할 줄도 모르면서 흉내나 내는 거라면 차
라리 애무단계를 건너 뛰어!”
“그럼 아예 만지지도, 빨지도 말라는 거야?”

“아! 멍청아! 어설프게 흥분시키려고 들지 말란거지... 첫경험이잖아~ 채영인가 걔도 뭐 처
음이나 다름 없을 텐데 뭘 알겠어? 괜히 흥분시키려다 흥이 깨질 수도 있으니까 너무 애무
에 몰두하지 말라고~”
“아... 그... 그런 거야?”

석민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는 결국 잘못된 선생에게 잘못된 지식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
이 들었다. 사실 나는 처음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섹스를 경
험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석민의 첫경험을 받아준 민영 역시 해봐야 고등학생이 얼마나 해
봤겠는가? 확실한 건 나는 석민과는 다른 첫경험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너! 선생님이 말씀하시는데... 딴 짓하는 것 좀 봐~”
“병신! 그런 건 나도 다 알거든!”

그의 말에 흥미가 없어지고 있었다. 이미 그 남자가 그녀를 범하는 것을 두 번이나 목격한
나로서는 석민의 말이 그저 어린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고 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이 든 것이다. 솔직히 그 남자는 그녀에게 그 어떤 분위기도 잡지 않았고, 애무도 별
다를 게 없었어도 그녀를 환락으로 충분히 몰고 가버렸던 기억에 나의 고집이 귀를 막아서
고 있었다.

“니가 안 해봐서 그런데... 해 봐라~ 구멍 찾기도 졸라 힘들다!”
“웃기시네... 됐어~”

“어? 정말이라니까? 구멍 찾다가 시간 보내고... 쪽팔리게 여자가 구멍으로 자지를 인도해주
지... 그게 끝인 줄 아냐? 들어가 봐라~ 아마 경험해보지 못한 졸~~~~~~~~~~라 좋은
촉감에 바로 머리가 하얘지면서 좆물을 찍! 싸버리고 말걸?”
“병신! 그래도 너처럼 3초는 아닐거다! 너 아직도 그렇게 빨리 싸냐?”

이미 석민의 대강연은 흐지부지 목적을 잃어 버렸다. 결국 그 목적을 흐린 건 나였지만 아
쉽거나 다시 목적을 바로 잡고 싶지는 않았다.

“아~ 씨발... 말도 마! 진짜 해 봐... 해 봐야 내 마음 안다!”
“맞구나? 아직도 10초냐?”

“솔직히 졸라 쪽팔리다니까? 그래도 10초는 넘는데 1분을 못 넘기겠어...”
“그렇게 좋냐?”

“진짜 장난 아니라니까~ 아... 진짜 민영이를 빌려주고 싶지만 그건 안 되고... 아무튼 해
봐.. 해보면 알아~”
“고맙다! 시간 내줘서...”

“고맙긴... 사까시도 해달라고 하고! 그건 더 죽여~”
“민영이도 해주냐?”

“씨발... 말도 마! 빨리면 뿌리가 뽑힐 것 같을 정도로 쭉쭉 잘 빤다!”
“그래? 좋겠다! 씨발놈아!”

“아... 안 되겠다! 민영이 만나러 가야지~”
“왜? 오늘 한 떡 치게?”

“너 때문에 졸라 꼴렸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냐?”

“같이 갈래?”
“됐다! 눈치 없이 니들 빠구리 뜨는데 내가 왜 끼냐! 됐고 내일은 나, 니네 집에서 자는 거
다~ 알았지?”

솔직히 석민이 너무 부러웠다. 그 녀석이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걸 보니 섹스라는
게 정말 좋긴 좋은 것인가 보다. 나를 두고 먼저 가버린 적이 별로 없던 녀석이었는데 파르
페도 절반이나 남긴 채 쏜살같이 달려 나가는 모습을 보니 어린 내가 감당해 내기가 쉽지
않은 커다란 쾌감과 흥분이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결국 석민의 몫까지 전부 비우고
난 뒤 나는 커피숍을 빠져 나왔다.

석민과 함께 한 1시간여가 나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시간이었다. 버스를 타려다 결국 걷기
로 한 나는 땅바닥에 채이는 돌멩이를 몰고 가며 그녀를 떠올렸다. 자전거는 학교 거치대에
단단히 묶어 두고 왔기 때문에 결국 빠른 버스 대신 걷는 것을 택한 것이다. 아침에 그렇게
날을 세우고 싸운 기억부터 울고불고 매달린 기억,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남긴 내일의 약속,
과연 그녀가 무슨 생각으로 밤에 나를 오라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밤이라는 것을 해
석하면 내게도 다리를 한 번 벌려주겠다는 뜻이라고 생각됐지만 지금까지의 그녀는 결코 나
와는 섹스를 하려하지 않을 것이다.

‘밤이라고 하면... 하아~ 모르겠다.’

정말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순순히 몸을 허락한다면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저번처
럼 강제로 그녀를 안으려는 실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니까...

정말 더디게 가던 시간이었다. 겨우 다음날이 됐고, 겨우 수업이 끝났다. 그리고 겨우 집에
도착을 해서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어제부터 이어져 온 첫경험의 환상은 밤이 다가올수
록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고, 떨림과 걱정으로 머리는 쥐가 날 것만 같았다. 든든하게 저
녁을 먹었고 혹시 몰라 마렵지도 않은 똥을 싸기 위해 변기에 죽치고 앉아 있기도 했다.

“석민이냐?”

나는 걸리지도 않은 전화기를 붙들고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한 수단
이었지만 엄마는 드라마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나의 연기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어? 니네 집에? 잠깐만... 엄마! 나 오늘 석민이네 가서 자도 돼?”
“맘대로 해”

전화를 끊고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더위에 지쳤는지 잔뜩 쪼그라든 자지가 몇
가닥의 털을 머금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 정성스레 자지를 닦고 아빠의 면도기로 아직은 솜
털이지만 거뭇하게 자란 콧수염까지 밀어냈다. 볼에 올라온 몇 개의 여드름을 손질하고 엄
마의 보디클렌저로 말끔히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그녀의 팬티가 아닌 검정색
삼각팬티를 찾아 입었다.

‘준비 끝!’

첫경험의 기대와 그녀와 첫날밤을 보낸다고 생각하니 꿈만 같은 기분이었다. 물기를 말리고
말끔한 교복을 챙겨 입으면서도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는 내 얼굴을 거울에 비쳐보며 콧노
래까지 흥얼거렸다. 만약 주택복권 1등에 당첨되고 난 후 당첨금을 받으러 갈 때의 기분이
그보다 좋을까? 세상에 태어나서 그토록 긴장되고 기대되는 느낌은 또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엄마! 갔다 올게!!”
“말 시키지 마! 이누무새꺄! 지금 얼마나 중요한 시점인데!”

여전히 드라마에 푹 빠진 엄마는 짜증까지 내며 나의 외박을 허락했다. ‘저벅 저벅’ 발에 채
이는 몽돌의 기분이 좋았다. 발에 밟혀 바그락대는 소리도 그녀의 창문을 훔쳐볼 때와는 달
리 기분 좋게 울렸다.

‘완전 범죄...’

대문을 열었다 나가는 척 다시 닫고 나서야 나는 미미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그녀의 집으로
발길을 옮겨갔다. 비록 내일 학교가는 날이기에 옷을 쫙 빼입지는 못했지만 깔끔하게 다려
진 교복으로 갈아입었고 좋은 냄새가 나는 샴푸와 클렌저로 몸을 닦은 나는 영혼까지 깨끗
해진 느낌이었다.

‘채영이는 무슨 옷을 입고 있을까?’

왠지 그녀도 아주 청순한 속옷과 함께 티 없이 깨끗한 흰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데이트를 하자며 입고 있었던 그 하이얀 민소매 원피스와 그
녀는 너무도 잘 어울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청순하면서도 깨끗한 이미지, 전혀 아줌마라고
느낄 수 없는 새내기 여대생의 느낌이었다.

“똑, 똑~ 누나~~~”

떨리면서도 부푼 가슴을 안고 나는 조용히 그녀의 현관을 두드렸다. 아직 9시도 되지 않은
저녁이었지만 내겐 충분히 밤이었다.

“누나~ 똑! 똑! 똑!”

혹시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누나라는 호칭으로 그녀를 불렀다.
엄마가 들을까 목소리도 크게 내지 못했지만 충분히 집안의 그녀는 들을 수 있는 목소리였
다.

“누나! 누나~~~”
“들어와!”

현관 안쪽으로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만으로는
그녀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잽싸게 문을 열고 들어가
서는 현관문을 잠그고 집안의 모든 창과 커튼부터 닫아버렸다.

‘씻나보구나? 으흐흐흐흐’

음흉한 생각을 굳이 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소리에 나의
오감은 온통 붉은빛 욕정으로 가득차고 있었다. 의식적이 아닌 무조건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책가방을 소파 옆으로 두고 교복 상의를 벗어 구겨지지 않게 소파의 팔걸이에 올렸다.
흰색 면티 만을 입은 채 그녀가 씻고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지나지
않아 샤워기에서는 물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몸의 물기를 닦아내는지 수건의 마찰소리가 들
려오는 것 같았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르릉...”

전화벨 소리에 평화로이 끓어오르던 심장이 놀랐다.

‘왜 나만 있으면 이렇게 전화가 오는 거야!’

굳이 내가 있을 때만 전화가 오는 건 아니겠지만 유독 그렇게 느껴졌다. 누군가 그녀를 감
시하고 있다는 망상도 가져보지만 그럴리는 없을 것이다. 요즘처럼 CCTV나 몰카라는 개념
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엔 미행이나 나처럼 훔쳐보는 게 아니면 영화에서나 나오는 허구라
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채영아~ 전화 오는데?”
“신경 쓰지 마~”

“계속 울려~”
“괜찮아~ 이따 또 전화 하겠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던가? 사실 나는 뜨끔할만큼 못된 짓을 했거나 부적절한 짓을 하
지 않았음에도 가슴이 떨려왔다. 불순한 생각을 한 탓일 것이었다. 나는 벽면에 걸린 그녀
의 결혼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사진에서만큼은 누가 뭐래도 너무도 행복함이 감도는 느낌
이었다.

‘아저씨도 참... 불쌍한 사람이네요’

그녀를 바라보며 한없이 웃음을 짓고 있는 그녀의 남편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불뚝
이 사내에게 다리를 벌려주는 것도, 나 같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그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며 잔뜩 추파를 던지는 걸 그는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 한 가정을
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는 밤낮없이 삶의 전쟁터에서 땀을 흘리고 있지만 그 땀이 과
연 누구를 위한 땀일까? 라는 의문이 들곤 했다.

‘아저씨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누나를 포기할 순 없어요’

웃고 있는 그에게 죄송스레 머리를 꾸벅 수그렸다. 내가 그녀의 남편에게 할 수 있는 건 진
심을 다 한 사과 뿐이었다.
그녀의 집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깨끗하게 느껴졌다. 씽크대며 침실의 침대, 바닥까지 반짝
반짝 빛나는 느낌이었다. 왠지 나에게 오늘 밤이란 평생에 잊지 못 할 무언가를 선사해 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때 그녀가 욕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허~읍!’

비록 내가 바라던 흰색의 원피스는 아니었지만 짧은 빨간색의 반바지와 작디 작은 흰색의
티셔츠가 그녀의 몸통에 감겨 있었다. 아무것도 프린팅 되지 않은 흰색티는 깔끔한 느낌이
었고 허리부분이 고무줄로 된 빨간색 반바지는 무척이나 편해보였다. 특히 그녀의 골반과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은 반바지에서는 그녀 특유의 육감적인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
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

아직 물기를 잃지 않은 그녀의 고운 얼굴이 마치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은은하게 광채를
띄고 있었고 아직 말리지 않은 머리위엔 수건 하나가 물기 머금은 머리카락을 감싸 안고 있
었다.

“채... 채영아~”

귀신에라도 홀린 사람처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얀 피부 톤에 매료된 나는 자연
스럽게 그녀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뭐야~ 앉아 있어~ 나 머리 말려야 해~”
“내... 내가 해줄게~”

“됐어~ 할 줄도 모르면서...”
“아니, 할 수 있어! 엄마 하는 거 봤단 말이야~”

머리에 두른 수건을 풀며 젖은 머리의 물기를 닦아내던 그녀가 안방으로 걸었고 나 역시 그
녀의 뒤를 따랐다.

“뭐야? 더운데 커텐이랑 창문은 왜 죄다 닫아버렸어?”
“아... 그... 그게...”

“너! 혹시...”
“호... 혹시 뭐! 엄마한테 걸리기라도 할까봐 그런거지 나 아무런 생각도 안했어!”

“누가 뭐래? 풋!”
“뭐... 그... 그렇다고!”

그녀가 피식 웃음을 번졌다. 화장대의 거울에 비친 그녀의 표정이 티 없이 맑게만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의 뒤에서 흡혈귀처럼 그녀의 가는 목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어흐~ 너 뭐야~ 절루 가서 티비나 보고 있어!”
“싫어!”

거실엔 커다랗지는 않았지만 생생하고 바른 목소리로 여자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킨과 로션을 찍어 바르며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보다. 여전히 검고 길다란 머리카
락에서는 물기가 흐르고 있었고 그녀의 흰 티셔츠가 물기에 조금씩 젖어가고 있었다.
로션을 다 바른 그녀는 곧 드라이어를 집어 들었고 전원버튼을 눌러 따뜻한 기운의 바람이
나오도록 했다.

“해줄래?”
“으... 으응!”

귀여웠다. 그리고 사랑스러웠다. 내게 드라이어를 넘겨주고 그녀는 자신의 무릎에 손을 짚
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천사가 따로 없다. 정말이지 이런 여자가 어떻게 자신의 남편을 두
고 다른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아도 괜찮아... 넌 내꺼야’

촉촉한 머리카락이 손에 닿았다. 향긋한 샴푸냄새와 함께 매끈한 느낌이 가득했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에 드라이어 바람을 대어 주며 싱그러움을 화사하게 바꿔나
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덜미와 무릎에 올려진 손에는 긴장감이 옅보였다. 아마 그녀에게
도 지금 시간이 나처럼 긴장되고 있는 모양이다.

“잘 하는데?”
“잘 해? 나 말고 또 누가 머리 말려준 적 있어?”

그녀가 살랑살랑 도리질을 쳤다. 기분이 좋았다. 어찌되었건 그녀에게도 나는 첫경험을 안
겨 준 남자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기분이 째질 것 만 같았다.

“안 힘들어? 힘들지?”
“힘들긴... 근데 머리가 생각보다 길다~”

“완벽하게 말리려면 20분 정도는 말려야 해~”
“그렇게나 오래?”

촉촉함에서 점차 보들거리는 부드러움으로 변해가는 머리카락이었다. 은근슬쩍 그녀의 목줄
기를 스치는 나의 손가락도, 긴장감 있게 목에 힘줄을 세운 그녀도, 시끄럽기까지 한 드라
이어의 소음 속에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느껴갔다. 모르긴 모르지만 분명 그녀도 나의 손
길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면 됐다! 고마워~”

여자의 튕김이란 것, 무작정 튕기고 거부하는 건 매력이 없다. 그렇다고 줄 듯 말 듯 약올
리는 것 또한 남자 입장에선 매력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아쉬울 정도의 마음만 주었고, 아
쉬울 정도의 스킨십을 허락했으며 아쉬울 정도의 시간만을 허락했다.

“조금 덜 마른 것 같은데?”

아쉬움에 나온 말이었다. 그저 그렇게 그녀의 머리를 말리며 밤을 새워도 좋을 만큼의 시간
을 잘라내며 웃어주었다.

“괜찮아... 이 정도면 자연스럽게 말려도 돼~”
“그... 그래...”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에 쥐고 있던 드라이어를 그녀에게 넘겼다. 할 일이 없어지다 보니 아
쉬움과 함께 허탈함마저 감돌았다. 드라이어를 정리하고 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 괜스
레 뻘쭘해진 나는 다시 거실로 나와 소파에 기대앉았다.

‘일부러 저러는 건가? 나 애닳아 죽으라고?’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은 전과 다름없이 무척이나 차분하고 밝은 표정이었지만
가까이 다가서려 하면 계속해서 밀어내고, 멀어졌다 싶으면 조금씩 다가와 주는 거리싸움을
끈질기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거리싸움이 짜증이 나거나 신경질이 나지
는 않았다. 그러려고 하면 눈 녹듯 녹아버릴 만큼 달콤한 스킨십으로 나를 제어했다.

얼마 후 그녀가 다시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음료 두 잔을 따라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와 앉
았다. 방금 샤워를 마친 그녀였던 만큼 향기로운 향내음이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저녁은 먹었어?”
“응... 엄마가 차려줘서... 먹고 왔어~ 채영이는?”

“난, 별로 생각이 없어서...
그래도 뭣 좀 먹어야지~“

아주 간단하고 간결하게 저녁식사 여부와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로 대화를 꾸려갔다. 어떻
게 보면 누나와 동생 사이라고 보여졌고, 또 어떻게 보면 신혼부부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해 나갔다. 그러다 다시 그녀의 집으로 전화벨이 울려 퍼졌고 그녀는 자연스럽게 무선전화
기를 집어 들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늘 그이 들어오는 날이야”

“몰라~ 온다는 데 내가 어떻게 알아”

“내일!”

“됐어... 바쁘다며 됐어... 혼자가라며? 혼자 갈거야!”

“몰라... 끊어!”

그녀가 담담하지만 딱딱한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 내용만 들어보아도 그 남자라는 것
이 느껴졌다. 남녀 사이라는 게 한순간에 비틀어 질 수도 있는 것이라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그 남자의 애정전선에 이상한 기류를 느낀 건 어제 오늘이 아니었다. 그토록 강렬한
신음을 뿜어내며 정열적인 육체의 대화에는 별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녀와 그 남자
의 대화에는 항상 날선 칼날이 곤두서 있는 느낌이었다.

‘언젠가는 일이 터져도 터지겠구만...’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와 그 남자 사이에 지독히도 못된 저주를 퍼부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남자의 곁에 있는 그녀가 안쓰럽다고 할까? 헤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
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그럴 리가~ 성현이랑 같이 있게 돼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

가까이 다가오는 그녀를 살포시 받아주었다. 나의 어깨에 가벼이 느껴지는 그녀의 머리가
와 닿자 참으로 약한 여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성현아... 내가 왜 좋아?”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나도 가끔은 그런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곤 했었다. 그러나 나조차
도 왜 그녀가 좋은지 해답을 찾지 못했었다. 단순히 그녀의 색스러움이 좋았다던가, 아니면
예쁜 얼굴이 좋았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그녀의 가슴에 새겨질 수 있는 근사
한 말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
“없어? 좋은 이유?”

“아.. 아니... 그냥 다 좋아~”
“피~~~”

왠지 모를 답답함이 나를 가로막아서고 있었다. 나는 바지주머니에 든 담배를 꺼내 입에 물
었고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이자 조금은 불안함이 사그라지는 것 같
았다.

“나, 나쁜 사람이지? 학생이 이렇게 담배를 피우는데도 그냥 내버려두니 말이야~”
“쳇! 그런 게 어딨어?”

“아냐... 나 나빠... 그래서 성현이한테 미안해...”
“됐거든! 너 자꾸 그러면 나 정말 나쁜 짓 한다?”

“그러면 못써~ 난 성현이가 정말 잘 돼서 다시는 나 같은 여자 안 만나기를 바래”
“또! 자꾸 그런 말하면 나 정말 화낼거야~”

“정말이야...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됐어! 난 너만 있으면 돼!”

급격히 우울해진 그녀를 느꼈다. 말투도, 표정도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쇠잔해지는 느
낌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그녀의 얼굴에서 따뜻한 기운의 미소를 짓게 하고 싶었다.

“아~ 그래도 성현이가 지금 옆에 있어서 누나가 얼마나 든든한지 알아?”
“칫! 맨날 어린애 취급하더니...”

“아니야... 어린애... 다 컸다! 우리 성현이...”
“으이구~ 사랑스런 내 마누라!!”

그녀가 나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고 질세라 나도 그녀의 엉덩이와 골반을 토닥여주었다. 그
제서야 작게나마 미소를 보여주는 그녀였다.

“근데... 내일 어디가?”

나는 그녀가 전화통화를 할 때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그제서야 묻고 있었다. 분명히 전화통
화로는 그 남자가 같이 가주었으면 하는 뜻으로 말을 했지만 그 남자는 바쁘다는 말로 그녀
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 같았다.

“응? 으응... 내일 낮에... 갈 데가 있어~”
“어디? 어딘데?”

“있어~ 뭘 그렇게 맨날 꼬치꼬치 캐물어?”
“궁금하니까 그렇지, 내 마누라가 혼자가야 한다는데... 같이 갈 수 있으면 가주려고”

“됐네요! 됐어~ 혼자가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쳇!”

역시나 그녀는 순순히 말을 해주지 않았다. 뭐 이런 경우가 한 두 번인가? 언제나 그녀는
나의 물음에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를 않았다. 잠시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다 보니 마음이
무척이나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내 곁에 없으면 안 될 사람이라고 확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나의 작은 몸짓이 그녀를 위로했고 그녀의 존재가 나를 위로하고 있으니 천생
연분이 따로 없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잠깐만...”

그녀가 나를 벗어났다. 그러더니 안방으로 천천히 사라졌다가 곧 무언가를 들고 다시 소파
로 왔다. 손에는 아세톤과 화장솜이 들려 있었다.

“에고고... 나이 먹으니까 움직이는 것도 힘들다... 헤헷!”
“나이는 무슨, 진짜 가끔 말하는 거 보면 완전 아줌마라니까?”

“그럼 내가 아줌마지! 처녀냐?”
“뭐야? 그건?”

“매니큐어 좀 지울려고~”
“왜? 이쁜데?”

“응? 으... 응... 벗겨지고... 색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지워야 해~”
“내가 해줄게!”

“됐어~”
“아... 아아아아... 내가 해줄게... 응?”

나도 모르게 어리광을 부리고 말았다. 어른처럼 행동해야겠다는 다짐은 뒤로 한 채 무작정
그녀의 손에 들린 아세톤과 화장솜을 뺏어냈다.

“그래... 그럼... 니가 해 줘...”
“앗싸~~”

화장솜에 아세톤을 적셨다. 그리고 가녀린 그녀의 예쁜 손을 잡아 나의 무릎위로 올렸다.
그리고 엄지손가락부터 말끔하게 매니큐어를 지워나갔다.

“잘 하네... 성현이?”
“잘하지? 그치?”

나는 엄마 손의 매니큐어를 몇 번 지워준 적이 있었다. 독하게 붙어있던 매니큐어가 녹아내
리며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게 신기했던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만큼 말끔하고 깨끗하게
그녀의 손에 있는 빨간 자욱들이 지워지고 있었다.

“깨끗하게 해 줘~ 알았지?”
“걱정 마셔~ 지우고 나면 무슨 색 바를 거야? 내가 칠해줄까?”

“응? 그... 그래... 무슨 색 바를까?”
“글세... 손톱이 예뻐서 안 발라도 될 것 같은데?”

“그.. 그래? 그럼 바르지 말까?”
“그냥 투....명.....”

나는 우쭐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보자마자 몸이 굳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울고 있었다.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고, 툭 건드리기만 해도 주륵 흘러내
릴 것 같았다.

“뭐해... 빨리 지워주지 않고...”
“왜..... 그래?”

“뭐... 뭐가...”
“왜 우냐고!”

“아... 아냐... 아무것도...”
“뭐가 아무것도 아냐?”

“그... 그냥... 성현이가 이렇게 손톱도 지워주고, 날 사랑해줘서... 고마워서...”
“쳇! 별게 다..... 울지 마!”

“아...알았어... 안 울게...”
“울지 마~ 울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 울지 마...”

나는 결국 그녀를 안아주기 보다는 고개를 숙여 다시 손톱을 지워주기로 했다. 왠지 그녀를
위로한답시고 안아 주다보면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흐를 것 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은
태어나서 본 슬픈 눈 중에 가장 슬픈 눈이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나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난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한쪽 손을 다 지우고 나머지 손의 매니큐어를 지워나갔다. 아주 꼼꼼하고 말끔하게 그녀의
손톱을 지워나가며 왜 그녀가 불쌍하게 여겨지는지 알 수 없었다. 괜히 불쌍했다.

“성현아~”
“왜!”

나의 슬픈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퉁명스레 대답을 했다.

“아... 아니다...”
“왜! 왜 그러냐고~”

“아무 것도 아니야....”
“싱겁기는.... 쳇!”

그녀의 손과 발톱에 칠해진 붉은 색 매니큐어를 전부 지우자 그녀는 욕실로 가서 손과 발을
씻고 나왔다. 여전히 눈에는 눈물의 흔적이 남은 듯 촉촉이 젖어 있었다.

‘오늘따라 이상하네...’

첫경험을 생각하고 부푼 마음으로 그녀를 찾아온 나였지만 그녀의 눈물로 마음이 경건해지
기까지 했다. 그녀는 내게 기댄 채 티비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그저 무성영화를 보는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냥 기분 탓인가?’

어쩌면 그녀가 부끄러워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입으로 밤에 내려오라
는 말을 했고 막상 시간이 지나니 그 말의 후회와 부끄럼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생각도 해
봤다.

“뭘 이런 걸 봐~”
“왜!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

“느낌 안 봐?”
“느낌? 그거 누구 나오는건데?”

“우와~ 진짜... 이정재랑 김민종이랑 우희진 나오는 거... 몰라?”
“에이~ 그런 건 애들이나 보는 거지~”

“야망이 뭐냐! 야망이... 진짜 아줌마도 아니고...”
“으유! 요게!”

그녀가 나를 보며 조막막한 주먹을 쥐어 보인다. 어설프게 막는 척을 하며 그녀를 와락 끌
어안았고 그녀는 그대로 내 품 안으로 안겨왔다. 하늘하늘한 머리카락이 볼에 닿아 부벼지
며 순식간에 잠자고 있던 나의 성욕이 심장을 벌렁이며 용솟음쳤다.

나는 그녀를 감고 있던 두 손을 풀어 은근슬쩍 그녀의 가슴을 잡았다. 한 손에 가득 들어
오는 크기의 가슴에서는 말랑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이 전해져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피하지도 않았고 내 손을 저지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 그녀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티셔츠가 밀려올라가며 얇
은 허리가 드러나고 실크와 비슷한 느낌의 브래지어가 손 안으로 가득 들어왔음에도 그녀는
그저 티비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부드럽다... 따뜻해...’

점차 복잡한 머리가 단순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목표 그대로 나는 첫경험의 딱지를 떼기 위
한 단순목적형의 두뇌로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숨이 빨라지고 거칠어졌다. 이미 커질대
로 커져버린 자지는 부러질 것 같았고 매끈한 그녀의 속살에 정신마저 아득해지고 있었다.

다시 손을 움직여 그녀의 브래지어 안으로 손을 욱여넣었다. 옷 위에서 만지는 것과는 확연
히 다른 느낌의 양감이 느껴졌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푹신하면서도 탄력이 넘치는 부드러
움과 처음 만져보는 여자의 유방이라는 사실이 완전히 나의 욕정을 끓게 해버렸다.

“아파... 살살...”

나도 모르게 그 느낌을 강하게 느끼고 싶어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 모양이다. 그녀의 입에서
는 무한한 허락의 멘트가 흘러나왔고 그 목소리에 더욱 간절해지고 있었다. 서두르지 않으
려 했다. 석민의 말대로 서두르기보다는 천천히 그리고 무드있게 행동하려 했다. 하지만 서
툰 나의 손은 다시 그녀를 아프게 했다.

“아파~ 뒤에 후크 좀 풀어줄래?”

내게 기대고 있던 그녀의 상체가 적당히 간격을 두며 떨어졌다. 나는 그녀의 등 뒤에 붙어
있는 브래지어 후크를 찾았다. 그리고 양손에 잡힌 그것을 비틀어 한 번에 분리를 해냈다.

‘어? 쉽네?’

아마도 그녀의 속옷을 가지고 놀던 경력이 한 몫 했을 것이다. 석민은 결국 풀어내지 못한
것을 나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풀어낸 것에 자신감이 붙었다. 최소한 그 녀석보다는 첫
경험을 잘 치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었다.

“들어가자~”

나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입술을 앙다물며 눈을
살짝 찡긋하는 그녀의 표정은 ‘Yes'였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고
그녀는 내 목을 감싸며 무한하게 예쁜 미소를 건네주었다.

‘예쓰! 예쓰! 좋아!’

생각보다 가볍지는 않았다. 그녀의 얇은 허리나 작은 어깨만 보면 그랬다. 하지만 풍만하다
싶을 정도로 잘 발달된 엉덩이와 골반에서 느껴지는 탄력은 그 무게를 인정할 수 있었다.

침대에 그녀를 눕혔다. 흰색 티셔츠 안에는 이미 풀어진 브래지어의 끈이 옆구리로 흘러내
려 있었고 침대에 눕혀지자마자 살포시 눈을 내리감아 버리는 그녀는 섹시하다기 보단 나와
동급생의 여고생처럼 가늘게 긴장을 한 모습이었다.

‘예쁘다~’

나는 팬티만 남기고 옷을 훌렁 벗어버린 채 그녀의 곁으로 누웠다. 그리고 우선 거추장스러
운 티셔츠와 브래지어를 벗겨내었다. 눈 앞에 펼쳐진 여체에 나는 침을 꿀꺽 넘길 수 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희고, 탐스러우며, 매끈한 몸매를 가진 그녀가 떨고 있었다. 꿈에서나 그
리던 그녀가 내 눈앞에 수줍은 자태를 하고 그렇게 유혹해왔다.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누웠다. 그리고 그녀와 나란히 옆으로 누워 눈과 눈을 맞췄다.
말없이 그녀의 눈과 코와 입술만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행복해지는 마음이 너무나 비대해지
고 있는 느낌이었다.

“바보~”
“내가 왜 바보야?”

그녀가 항상 말하듯 나를 바보라 했다. 옆으로 누워 두 팔을 모아 가슴을 가리고 있기는 했
지만 그녀의 가슴골이 나를 미치게 했다.

“널 어쩌면 좋니?”
“어쩌긴... 사랑해 주면 되지~”

나는 그녀를 끌어당겨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눈을 살포시 내리 깔며 나
의 입술을 받아주었다. 처음으로 여자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가녀린 허리를 감싸고 나머지
한 손으론 여체를 안은 내겐 그 어떤 보상보다 값지고 황홀한 경험이 되고 있었다. 그녀의
긴장감 넘치는 허리라인을 쓰다듬을 때 마다 손 끝에는 황금빛 가루가 묻어 날것처럼 보드
라운 느낌이 찾아왔고 뜨거운 입김이 뿜어져 나오는 입술이 느껴질 때는 내 스스로가 가루
가 되어 날아갈 것 만 같았다.

“오늘은... 네게 맡길게... 네게 맡길거야”

잠시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그녀는 밤에 내려오라던 이유에 대해 간접적으로 답을 해 주었
다. 다시 키스를 나누며 그녀의 빨간 반바지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잘록한 허리 아래로
탄력 넘치는 골반과 탱탱한 엉덩이를 지나 허벅지에 쓸려 내려가는 그녀의 반바지와 팬티는
힘없이 그녀의 몸에서 분리되어 떨어져버렸다.

“허~ 업!”

훔쳐보던 그녀의 여체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시각적인 곡선은 물론이고 베이비 파우더를
잔뜩 뿌려놓은 듯한 고운 피부의 촉감과 상상 이상의 풍만한 가슴선, 그리고 고불거리는 수
풀이 돋아난 영광의 언덕은 신세계를 경험하는 남자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충분했다. 특히
가슴은 전에 봤을 때 보다 훨씬 커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확실히 커져있었다.

“예쁘다... 정말 아름다워...”
“고마워~ 예쁘다고 해줘서...”

보답이라도 하듯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내가 그러했듯 천천히 나의 팬티를 분리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과 손이 살갗에 스칠 때 마다 전해져오는 전류와 아득한 부드러
움에 혼이 쏙 빠져버릴 것만 같았다.

“채영아!”

발목에서 팬티가 분리되는 순간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침대로 다시 쓰러져 버렸다. 그녀의
배에 닿는 자지엔 말로 표현 못 할 기대와 환희가 느껴졌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지?”

그녀가 눈에 힘주어 물었다. 그녀의 말 뜻을 나는 전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는 그 어떤 후회도 감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얼
굴을 내 가슴에 묻으며 강렬하게 안겨왔다.

“난, 후회할 것 같아... 그런데 성현이 네가 좋다면 따를 수 있어...”

난 서두르지 않았다. 그렇게 안겨온 그녀를 말없이 안아주기만 할 뿐이었다.


끝.........

첫사랑 - 10부

갑자기 엄청난 소음들과 함께 많은 인파들의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비명소
리도 들려왔고 비상구며, 계단부근에는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굉장한 무게감으로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뭐... 뭐야?’

난 단속이 떴다는 외침을 듣고서도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맥주 한 잔을 따라두고 홀짝
거리기만 할 뿐이었던 나는 취하지도 않았었다. 왜 내가 이런 지구 종말과도 같은 날벼락을
겪어야 하는지 영문도 모른 채 이미 가방이며 소지품을 챙기고 있던 석민과 민영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야! 좆 됐다... 째!”

우리들 중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건 석민이었다. 그는 가방과 담배, 그리고 민영
을 챙겨 전쟁과 다름없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해지며 그제서야 내가 미
성년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을 뿐이었다.

“성현아~ 일단 흩어졌다가 이따 원투쓰리에서 봐!!”

그는 그렇게 다급하게 말을 던져놓고 이내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거짓말처럼 나와 그녀만이
남아버린 2층이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자 이미 경찰들에게 붙잡혀 도로가에 무릎을 꿇고
앉는 학생들이 보였다. 물론 거의 대다수의 인파는 도망을 간 상태였지만 도로에 꿇어 앉은
사람들도 꽤나 많은 수였다.

“누나! 우리도 도망....”
“이럴 때만 누나냐?”

그녀가 나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경찰에 붙잡히고 있는 사람들을 보자 괜스레 겁이나
기 시작했다. 학교에는 100%알려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부모님의 귀에까지 들어갈게 뻔했
다. 매 타작은 물론 지긋지긋한 반성문에 자칫하면 정학까지 당할 수도 있을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도 태연했다. 나는 다시 창가로 가 밖의 상황을 예의 주시했다.
이미 출입구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성현아... 이리 와... 어차피 지금 나가도 잡혀~”

그녀의 차분한 음성이 재차 들려왔다. 나의 걱정과는 달리 무척이나 평안하고 부드러운 음
성이었다. 그러나 내 벌렁이는 심장이 차분해지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녀의 곁
으로 다가서려 할 때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다름 아닌 석민과 민영이었다. 잔뜩 똥
씹은 표정을 해가지고는 수 십 명의 인파와 함께 무릎을 꿇고 손을 든 둘의 모습을 보자 나
는 더욱 똥줄이 타들어갔다.

“아... 서... 석민이랑 민영이도 잡혔어!”
“후훗... 이리 와... 우린 괜찮을거야~”

“지금 밖에 장난 아니야....”
“그냥 오라니까?”

반항하던 한 녀석은 급기야 수갑까지 차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울상이 지어졌다. 그런 나를
보며 그저 따뜻한 웃음만 보내주는 그녀는 무슨 똥배짱인지 알 길이 없었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 곁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곧 파란 근무복을 입은 경찰들이 세 명이나 올라오
더니 주변을 둘러보다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늬들은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태연하냐? 나와!”

고개를 숙인 채 망연자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늬들? 당신 몇 살이야?”
“뭐? 당신?”

나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녀와 경찰을 번가르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미쳤는 줄로만 알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그려지는 숫자가 있었다. ‘32’ 너무도 당황스럽고
겁이 나 떠올리지 못했던 그녀의 나이 서른 둘이 떠오르자 내심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야! 민증 까! 어디서 국민의 지팡이라는 사람이 다짜고짜 반말이야!”
“뭐... 뭐?”

“민증까라고... 나 먼저 보여 줘?”
“..............”

그녀는 내가 그토록 왜 들고 왔냐고 구박하던 장지갑에서 주민증을 꺼내 경찰에게 내밀었
다. 그리고 그녀의 나이를 확인 한 경찰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그녀와 주민증을 번가르며
바라봤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어려 보여서....”

요즘에야 스쿨룩이니 뭐니 해서 여러 패션이 유행을 따르고 있었지만 그 때 당시 스쿨룩이
라는 단어 자체가 있었는지도 모를 시절이었다. 너무도 당당히, 그리고 차분히 말을 하는
그녀는 사실 경찰에게 꿀릴 게 없었다. 하지만 걸리는 건 나였다. 이제 타겟을 바꿔 내게
신분증을 요구한 경찰이었다.

“이... 이봐! 자넨 학생 맞지?....요?”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다는 속담은 사실인 듯 했다. 경찰은 교복을 입고 있
는 내게 반말을 하려다 끝내 존대말로 어미를 바꾸었다. 나는 뱃속의 모든 장기들이 전부
쪼그라들어 버린 상태였다. 뭐라 해야 할지 말도 나오지 않고 그저 도움의 눈길을 그녀로
향할 뿐이었다.

“아~ 보호자가 있잖아... 보호자가... 내가 얘 이모야”
“이...이모.... 보...호자세요?”

순진하기 짝이 없는 경찰이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그가 경찰이 아닌 의경이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순 있었지만 어렸던 그 때엔 파란색의 근무복만으로도 나는 오줌을 지릴 정도로
쫄아 있었다.

“얜 술도 안 먹었어, 내가 혼자 먹기 적적하고 골뱅이 먹고 싶다길래 같이 온 거야...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닙니다.”

경찰은 머리를 갸우뚱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통하지 않는
방법일 테지만 허술했던 그 시기엔 보호자라는 타이틀 하나만 있으면 왠만한 문제는 쉽게
해결이 되던 때였다. 어쩌면 허술했다기보다 사람 냄새나는 세상이었다고나 할까?

“오~ 우리 마누라 쎈데?”
“으이그... 바보같이 잔뜩 쫄아가지고는?”

경찰이 되돌아가고 다가오던 나머지 둘에게 문제가 없다는 듯 제스처를 보이자 다시 1층으
로 방향을 바꿔 내려가는 그들이었다. 돌아가는 경찰의 모습을 보면서 벌렁이던 심장이 점
차 정상적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곧 평안해졌다.

“쫄긴 누가 쫄아!”
“칫!”

그녀 역시 태연한 척 했지만 속이 탔는지 따라 놓은 맥주를 단숨에 비워냈다.

“가! 가자...”
“어딜?”

왠지 내려갔던 경찰들이 재차 올라와 나를 잡아갈 것 만 같았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남의 돈을 훔쳤거나 빼앗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엄청나게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행동
했다.

“여기 싫어... 불안해...”
“푸흣! 지금 나가면... 나중에 니 친구한테는 어떻게 설명하려고? 이모랑 같이 있어서 괜찮
았다고 하려고?”

그녀 말이 옳았다. 불안한 마음에 당장에라도 술집을 나서면 아무런 제지 없이 풀려난 나와
그녀를 보고 분명히 또 다른 추궁이 들어올 것이었다.

“그... 그럼....”
“남은 거나 빨리 먹어... 여기요... 시원한 냉수 한 잔만 주세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술집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던 아르바이트생도 나와 그녀를 이
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술을 퍼먹었음에도 당당하게 나란히 앉아 술잔
을 기울이던 우리가 아마 신기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창가로 다가가 밖의 상황을 살폈다.
심한 몸부림을 부리다 수갑을 찬 녀석을 비롯해 몇 명은 경찰차에 오르고 있었고 화장을 아
주 웃기게 한 여학생 하나는 술에 완전히 취해 거의 기절 상태에 빠져 있는 듯 했다. 그나
마 얌전히 말을 잘 듣던 석민이나 민영이 같은 부류는 무언가를 적는 경찰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가 하면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분명히 나라에서 정해놓은 법을 어겼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사람은 술집에 가지
말라는 법을 어겼음에도 내겐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고 겁을 먹었음에도
화살은 나를 비껴갔다. 분명히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유부녀인 누나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도 법과 같은 테두리를 벗
어날 수도 있는거겠지?’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부추기며 다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나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든든했다. 그녀의 손길이... 마치 보호막이 둘러쳐진 것처럼 나는 따뜻
하고 포근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하얀 목덜미로 갈빛의 맥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귀여운 옆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느꼈다. 세상의 그 어떤 시련 속에서도 나는
그녀 곁에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그녀가 어떤 여자였건 중요치 않았다. 그리
고 앞으로 그녀가 어떤 여자가 될 것이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원하고
있었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맥주와 음료를 홀짝거릴 뿐이
었다. 잡은 손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 첫 데이트이자 그녀를 더욱 간절히 마음에 품은 날이
기도 했다.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고 전혀 어린아이처럼 굴지 않았다.

‘썅! 이미 어린애 티는 다 냈는데 뭘 어린아이처럼 굴지않아!’

마음이 평안해지고 긴장됐던 몸이 풀리니 그제서야 그녀앞에서 철부지 같은 모습을 보인 나
를 깨달았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팔릴 쪽은 다 팔렸는 걸... 그리고 그렇게 그곳을 빠져나
왔다. 한바탕 소란이 있던 자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술집과 출입구는 말끔하게 정리
가 되어 있었고, 그런 일이 있어선지 그 앞을 지나는 학생들의 발길도 뜸해져 있었다. 벌써
밤 1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택시타자~”

집에는 가기 싫었지만, 나는 학생이었고 등교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유부녀였다.
싫어도 가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힘 빠진 목소리로 택시정류장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우리.... 걸어 갈까?”
“여기서?”

바보처럼 반문을 했다. 나는 항상 그렇지만 그녀 역시 나와 1분 1초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서인가? 걸어가자는 말에 ‘집까지 너무 멀어~’라고 답을 할 뻔 했다.

“왜? 싫어?”
“아... 아니! 걷자... 그래... 걷자~”

여전히 맞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열대야는 물러나고 밤이 되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
더위와는 멀어져 있었다. 그리고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밤길을 나란히 걷
기 시작했다.

이런걸까? 데이트라는 게...
그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행복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늦은 시간까지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게 꿈만 같기도 했다. 그녀와 나는 그저 한가해진 도로가를 걸을 뿐이었다.
이렇다 할 대화도, 저렇다 할 무엇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좋았다.

“아~ 좋다! 이렇게 걷고 있으니까... 우리 진짜 연인사이 같지 않아?”

제법 싱겁게 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도 나처럼 고개를 들어 하
늘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곧 나의 팔을 감싸며 팔짱을 끼어왔다.

“그렇게... 좋아?”

술이 제법 들어간 이유에서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냉정할 만큼 차분했다. 그녀의 적당한 가
슴봉우리가 팔뚝에 눌려오고 있었지만 전처럼 늑대로 변신하기엔 나의 정신이 너무 청아했
다.

“그럼... 좋지...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
“응......... 몰라.........”

그녀는 모른다면서도 더욱 몸을 내게 안겨왔다. 비록 팔짱을 낀 상태라 안아줄 수는 없었지
만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안아주고 싶었다.

“나, 너 안 놓을거야... 놓지 않을게...”
“피~ 안 돼 그럼...”

그녀의 입술이 삐죽거리며 부정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의 대답에서 진정성을 찾기 힘들었
다. 여자의 ‘노(No)'는 ’예스(Yes)'라는 공식을 철저히 믿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너 놓지 않을거니까 너도 다른데 가지 마... 평생 내 곁에서 살아...”
“어떻게 그러냐? 까불면 혼나요~”

그녀가 팔짱을 풀며 다시 손을 맞잡았고 노는 손이 나의 얼굴로 올라와 코를 가볍게 비틀어
주었다. 그녀의 손목 부위에서 풍겨지는 살내음이 어찌나 아득한지 하마터면 길바닥에 그대
로 쓰러져버릴 지경이었다.

“오늘 같이 잘까?”
“미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 역시 나의 손을 더욱 꽉 잡아주었다. 그러면서 나의 어깨에 머리
를 기대어왔다.

“오늘... 너무 재밌었어... 성현아... 내가 언제, 너 아니면 이런 황당한 일을 해보겠니... 고마
워”

그녀는 작은 것에도 감동하고 즐거워 해주었다. 틈만 나면 나를 챙겼고 틈만 나면 나를 바
라봐 주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누구보다도 강한 여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고 또 그 강함 속
에 누구보다도 여린 여자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다가서면 한걸음 달아나는 그녀였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녀 역시 나처럼 세상이
만들어 둔 테두리 안에서 갈등을 하는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나를 싫어한다는 생각
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사이가 진전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버스로 20여분 거리를 순식간에 온 것 같았다. 벌써 보여지는 모든 것이 익숙하고 눈을 감
고도 집을 찾아갈 수도 있을 만큼 눈에 익은 동네의 초입에 다다르자 벌써부터 아쉬움이 들
어왔다.

“거의 다 왔네?”
“그러게... 걸어와도 뭐... 그리 안 머네~”

동네에 들어서자 그녀가 은근슬쩍 머리를 만지는 척 하더니 곧 손을 빼냈다.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왠지 서운함이 들었다. 되도록 끝까지 잡고 갔으
면 하던 바람이 깨어진 탓인지 갑자기 그녀에 대한 욕구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 손에 들
어왔을 때는 몰랐던 조급함이 멀어져가자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채... 채영아...”

한발짝 앞선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자 자연스럽게 마주선 상태가 되었고, 그녀의 얼굴을 보
는 순간 덥썩 그녀를 안을 수 밖에 없었다.

“왜 이래... 동네에서...”

지나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그녀는 사방을 살피며 슬그머니 몸을 빼냈다. 불타는 청춘의
마음도 몰라주고 빠져나가는 그녀가 야속할 뿐이었다.

“약속 하나만 해!”
“무슨 약속?”

나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굳게 잡아 쥐고 눈에 힘을 주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애써 외면
을 하는 건지 그녀는 그저 귀여운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가지만 마! 아니 가더라도 어디 가는지 알려주고 가”
“무슨 소리야... 이 맹추야~”

“기다려 줘... 조금만, 아주 잠깐이면 돼~”
“야! 앞뒤 몽땅 다 자르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듣니?”

그녀가 언젠가는 도망을 갈 것만 같았다. 아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기 전에 미연
의 방지를 한다는 게 겨우 어디로 갈지 알려주고 떠나라는 약속 뿐이었지만 그거라도 받아
놓지 않으면 안심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언젠간 어디론가 갈 거 아냐... 내가 가지 말란다고 안갈 것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 아마... 그렇겠지...”

“그러니까, 갈 때 가더라도 어디로 가는지 알려만 주고 가라고... 응?”
“글쎄....”

“약속해!”
“그럴게...”

대답만 남겨둔 채 그녀는 다시 몸을 돌려 걸었다. 실룩대는 엉덩이를 바라보며 당장 그녀를
품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쩌면 유
부녀인 그녀와 내가 이토록 연인의 모습처럼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가.. 같이 가~”

뒤늦게 그녀의 꽁무니를 따라 뛰었다. 그러자 그녀도 덩달아 달음질을 쳤다. 뛰는 모양새가
어찌나 귀여운지, 유독 발달된 하체가 실룩대는 모습은 귀여운 오리 한 마리가 달음질 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찌 남자의 속도를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녀는 곧 내게 덜미를 잡혔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귀엽게 웃음을 번지고 있었다. 그곳은 바로 대문 앞이었다.

“하아... 하아... 휴우.... 꼴에 남자라고 드럽게 빠르네!”

숨이 차오르자 다시 격정적인 목소리가 나오는 그녀였다. 순간적으로 자지가 벌떡 일어서는
느낌이 들었고 잠시 눌러둔 욕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꼴에 남자다! 꼴에 남자가 얼마나 남자다운지 보여 줘?”
“푸흣! 또.. 또 까분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밀며 대문과 대문을 잡아주는 벽돌기둥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잔
뜩 성이 난 자지를 그녀가 분명히 느낄 수 있도록 바짝 들이댔다.

“어때? 좀 떨리나?”
“......... 떨리긴... 비켜! 들어가게!”

몸부림치는 그녀를 안으며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독하지는 않지만 쌉싸름한 맥주의 향기가
혀에 고루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입속은 너무나 달고 부드러웠다. 많지 않은 물기가
나의 입안으로 잔뜩 빨려 들어오는 느낌과 함께 나의 이성은 점점 땅바닥으로 떨어져버리고
있었다.

“쪽! 쪼옵, 쪽!”

예상대로 그녀는 나의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지만 삼류 야설이나 야동에서 보는 것처럼
그녀가 나를 리드하지도 않았다. 첫키스의 느낌, 온몸에 전기가 자잘하게 퍼지고 손끝과 발
끝 그리고 자지끝이 저려왔다. 말초신경이 살아 움직이듯 무언가가 꿈틀대는 느낌이었고 그
녀의 입속으로 들어간 나의 혀는 뜨겁지는 않지만 청량감 있는 촉촉함이 잔뜩 베어 나오고
있었다.

“쪼~옵! 쪽...”

그녀의 아랫입술이 통통하다. 그녀는 뭐든지 위엣 것보다 아랫것이 더욱 통통한 듯 했다.
나의 입술에 씹히고 있는 그녀의 아랫입술은 촉촉한 푸딩처럼 말캉하면서도 말랑했다. 그리
고 나도 모르게 침범한 그녀의 가슴 언저리는 나만큼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아... 채영아...”

비록 티셔츠 위였지만 가슴의 포동포동하고 말랑한 살점의 느낌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바깥이 아니라면, 만약 그녀의 침실이었다면 그녀는 나의 모든 욕정을
받아 줄 것처럼 수동적이었다.

입안은 달달한 그녀의 향기로 가득해져 있었다. 이대로라면 왠지 그녀의 입이 전부 닳아 없
어져버릴 것처럼 캔디를 빠는 느낌이었다. 나의 첫키스를 그녀에게 바쳤다. 그리고 나의 동
정 역시 나는 그녀에게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잊지 못 할 첫키스는 그렇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채영이 왔냐?”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그녀와 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단숨에 떨어져 입술과 옷을
매만졌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돌아선 그녀와 내 앞으로 결코 반갑지 않은 남자가 대문을 열
고 있었다.

“오... 오빠!”

대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그 남자였다. 그녀의 내연남이건, 뭐건 전혀 반갑지 않
은 사내, 아저씨들만 입는다는 목 늘어난 흰 런닝셔츠와 후줄근한 면반바지를 입은 그 남자
는 그녀와 나를 번가르며 쳐다보고 있었다. 징그럽게도 길다란 털이 숭숭 난 그의 젖꼭지가
늘어난 런닝셔츠 사이로 고스란히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넌 뭐야?”

전에도 나를 보고 ‘뭐야?’라고 물었던 남자였다. 머리가 나쁜 건지, 아니면 그녀와 볼 때 마
다 함께 있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사람을 꼭 그렇게 기분 나쁘게 물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병신, 멍청이같은 새끼!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나는 그 남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먼저 변명을 늘어놓기도 전에 집으로 향하는 정원에 발을 들여놓은 상태였다.

‘아... 나... 내가 정말 싫다...’

자책을 하고 자책을 해도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를 지키겠다는 다짐은 그저
머리로만 하는 다짐이었다. 차라리 ‘나서지 않는 게 그녀를 돕는 걸 수도 있어!’라는 생각이
라도 하고 움직였으면 자책은 덜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은커녕 그 남자를 피
해 이미 내 방으로 돌아와 버린 상태였다.

‘에잇! 오늘도 한 판 하겠군?’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남자가 여자를 기다린 이유가 뭐겠는가? 그리고 남편도 아닌 불쌍
한 남자가 그녀의 집에 들어와 있는 이유가 뭐가 있겠느냔 말이다. 신경질스럽게 교복을 벗
고 양말을 벗고 있는데 방문이 스르르 열리고 있었다.

‘아! 팬티!!’

나는 번개와 같은 속도로 침대위의 이불을 끌어 아랫도리를 가렸다. 너무도 급박한 상황이
라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의 표정을 살필 뿐이었다. 분명히 여자팬티를 입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냥 넘어갈 엄마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볼 것도 없는 놈이 가리긴 뭘 가리누?”
“왜?”

엄마의 반응을 보니 여자팬티를 입은 아들의 모습은 들키지 않은 것 같았다. 내심 한숨 돌
리고 그대로 침대에 주저앉으며 더욱 이불을 견고하게 몸에 감았다.

“왜 그렇게 놀래... 또 딸딸이 쳤어?”
“아! 엄마!”

“아니면 뭘 그렇게 가려대냐고 이누무새꺄!”
“아냐... 아무것도...”

“왜 이렇게 늦었어?”
“그... 그냥 친구들이랑 시내에서 있다오느라고...”

“친구? 친구 누구? 여자?”
“여... 여자는 무슨... 서.. 석민이랑...”

엄마의 주특기인 꼬치꼬치 캐묻기 신공이 나왔다. 엄마가 그렇게 의구심을 갖는 것도 이해
는 할 수 있었다. 언제나 학교가 파하면 그녀를 보고, 느끼기 위해 바로바로 들어오던 아들
녀석이 12시가 넘어서 들어온 걸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다고 생각 들었다.

“석민이? 아까 10시쯤 넘어서 전화 왔던데? 너 있냐고...”

아! 그랬구나... 아마도 석민은 내가 무사한 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괜히 엄마가 오해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 아까 석민이 만나고 다른 친구랑 잠깐 놀다 들어 온 거야~ 다음부턴 일찍 올게~”

갑갑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옷을 갈아입고 씻으러 들어가거나 아니면 자겠다고 엄마
의 등을 떠밀었겠지만 누나의 팬티를 입고 있는 상황에서 이불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
했다.

“석민이가 그러드만! 너 여자친구 생겼다면서?”
“아~ 또 뭔 소릴 들은 거야... 아냐 석민이가 오해 한 거라고~”

“오해는 무슨... 지 여친이랑 니 여친이랑 같이 놀았다며?”
“아~ 아니래도! 나 피곤해... 잘거야!”

“그래라! 넌 인정머리도 없는 녀석아! 엄마랑 얘기하는 것도 싫어?”
“싫은 게 아니라... 아무튼 내일 얘기해!”

“알았다... 알았어... 으이구, 아들 놈 키워봤자라더니.......”
“그런 거 아니라고 쫌!”

엄마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조금만 서운하게 하면 뒤돌아서며 신세한탄을 하듯 중얼거렸고
그럴 때 마다 나의 마음은 미안하기도 하면서 조금은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 꽃무늬 빤쓰는 여친이 사준거냐? 아주 야하던데?”
“아휴... 엄마! 쫌!!”

“너 이런 날씨에 그런 빤쓰 입으면 불알에 습진 생긴다~”
“엄마!”

어쩌면 엄마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은 항상 마지막에 툭하니 던져놓고 가는 말들일지
도 모를 일이었다. 지난 번 담배 얘기도 그랬고, 예전 오징어 사건도 그러했던 것 같다. 괜
스레 아들녀석이 상처나 받을까, 엇나가는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한 반항심이나 키우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엄마는 다른 친구들의 부모님보다는 훨씬 자
유롭고 밝게 선도를 하는 편이었던 것 같다.

너무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피곤하기도 했기 때문에 나는 반바지만 주워 입고 침대로 몸을
뉘였다. 다가가면 멀어지는 그녀의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 강한 쾌감을 알려준
첫키스를 되새기며 눈을 감았다.

“하악! 악! 아~~악!”

그러나 그런 서정적인 기분을 만끽하기엔 너무나 괴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평소보다는 조금
작게 들렸지만 분명히 그 목소리는 언제나 나의 귓가에 들려오는 파괴력 있는 색녀의 목소
리였다. 자동적으로 자지가 불끈 서버렸고 무시 못 할 질투심과 괜한 짜증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 저 남자가 오지만 않았어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입술을 탐하고 그녀의 봉긋한 가슴을 주무르는 동안 나는 첫경험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런 반항 없이 나의 애무와 키를 받아주던 그
녀였기에 나의 기대감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를 한 순간에 무너뜨
려버린 남자가 벌써 그녀의 다리 사이를 농락하며 그녀를 쾌락의 사지로 몰아넣고 있다는
사실이 짜증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나는 조용히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서 퍼져 나오는 불빛의 근원을 찾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작게 들리더라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 몽돌의 소리를 잔뜩 죽여 창가로 다가섰지만 그녀의 창은 굳게 닫혀 있
었다. 그리고 불빛과 함께 강하게 흘러나오는 그녀의 색소리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윽! 하윽! 오... 옵빠.... 으윽....”
“오늘따라 왜 이래?”

“커윽... 하윽! 하악! 악! 악!”
“너 뭐야... 오늘 무슨 물을 이렇게 많이 흘려?”

“주... 죽을 것 같아... 흐응... 허윽... 옵빠... 나... 나 좀 어떻게 해죠... 흠!”
“너, 솔직히 말해... 개갈보 같은 년! 윗집 학생하고 잤어?”

담배를 빨아댈 정신조차 없었다. 우연히 들은 그들의 대화소리에 나란 놈이 회자되고 있었
기 때문이다.

‘정말? 누나가... 누나도 나랑?’

정신없이 신음을 토하는 그녀에게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아냐... 아냐 오빠... 난 오빠만 있으면 돼”
“웃기시네... 그럼 질질 싼 이건 어떻게 설명할건데? 앙?”

“아~~~악! 저.. 정말이야... 난 정말...”
“솔직히 말 안 해? 보지 확 찢어버린다?”

“악~~~~~~! 아파! 옵빠... 악!!!!”
“그러니까 좋게 말 할 때 솔직히 말해”

도대체 뭘 어쩌고 있길래 그녀가 그토록 심한 고통의 신음을 토해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그녀의 솔직한 대답이 더욱 궁금한 나였다.

“새... 생각은 해 봤어...”
“뭘? 뭘 생각해 봐?”

“그 아이랑 하는 거...”
“뭘 하는데?”

“아~~~ 아프다니까?”
“그러니까 자세히 말해!”

“성현이의 자지를 내 보지에 꽂는 상상...”
“그래서 보지가 이렇게 질질 싸고 있는거야?”

“그.. 그런가 봐....”
“그 새끼한테 대주기만 해! 그럼 정말 니 보지 불로 확 지져버릴테니까”

“걱정 마! 요즘은 오빠가 말한 것처럼 그이 랑도 안하고 있으니까!”
“그래? 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정말이야... 그러니까 그런 험악한 말은 그만해”
“근데 밖에 있는 가방은 뭐야? 윗집 꼬맹이꺼야?”

“으... 으응.. 아까 친구랑 놀러간다고 맡겨 달란거야... 엄마한테 걸리면 혼난다고”
“정말이야? 너 거짓말 하면 진짜 보지 확 찢어 버릴거야!”

“아... 알았어... 그러니까 좀 살살해주면 안 돼?”
“웃기지마! 너 같은 개보지는 아주 좆같이 다뤄줘야 말을 잘 들어!”

잔인하면서도 가혹하리만치 들리는 그들의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의 가방이 그녀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가여웠다. 그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거의 고문과도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녀는 즐기는
것이 아닌 그 남자의 성향을 따라주기 위해 고음의 신음을 질러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
고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져왔다. 어쩌면 나의 접근이 그녀를 더욱 그런 고통 속으로 몰아세
우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 누웠다. 여전히 아래층에서는 고음의 신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
고 점점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 같더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져버리고 말았다. 차라
리 그녀의 남편이었다면 그런 말이 당연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의문의 그 남자
입에서 남편도, 그리고 나도 섹스의 대상이 되면 안 된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더욱 불쌍히 여길 수 밖에 없었다.

‘도대체 뭘까... 저 남자의 정체가 뭐냔 말이야!’

머리가 복잡해지더니 곧 두통이 시작됐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그녀가 도대체 왜 원치도 않는 섹스를 하고, 그녀와는 전혀 어울
리지 않는 남자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해야만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최소한 내
가 아는 그녀는 유리만큼 약하고, 청초한 들풀처럼 청순하며, 폴짝폴짝 뛰노는 개구리처럼
활달한 성격이었다. 순수하고, 부드러우면서 여고생 같은 풋풋함까지 갖춘 여자가 왜 저런
고통 안에서 울분을 삼켜내야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변태 같은 성향인 건가?’

그녀는 내가 그녀의 속옷을 훔치고, 강간을 하겠다고 달려들었을 때도 욕을 하거나 엄청난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타일렀고 이해를 해 주었다. 그 때 나는 그녀가 흥분 상태인 나
를 자극하지 않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인 그녀의
성격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부탁을 거부할 줄 모르는 순하고 순종적인
여자라는 생각에서였다.

정말이지 그녀도 알 수 없는 사람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들었다.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비
록 그녀에 대해 많은 걸 알지는 못했지만 내가 아는 그녀와는 너무 괴리감이 크게 느껴졌
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그녀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그녀는 그녀대로, 또 나는 나대
로 고통에 신음만 할 뿐이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머리를 감싸고 고민해봤자 이렇다 할 정답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는 그
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나의 사랑을 받아줄 수 있는 그녀도 아니었다. 이런 지리한
미온적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만 하는 게 지루할 법 했지만 나에겐 그런 미온적인 것이라도
그녀를 볼 수 있고, 그녀를 간간히 느낄 수만 있다면 만족이었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 엄마가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 씻고 아침까지 먹었다. 엄마는 나
를 계속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깨워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던
놈이 스스로 일어나 제 때 등교준비를 하는 게 이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가방은?”
“하... 학교에 두고 왔어~”

“왜?”
“그... 그냥...”

“그럼 도시락은?”
“냅둬... 그냥 사먹을게~”

나는 엄마가 건네주는 도시락을 마다하고 집을 나섰다. 들고 가려니 불편하기도 했지만 온
통 그녀에 대한 생각과 걱정 때문에 도시락은 그렇게 중요치 않은 물건이었다. 학생이 가방
도 없이 학교를 간다는 것, 참으로 우스운 얘기지만 어쩔 수 없이 자전거의 자물통을 풀고
다시 그것을 돌돌 말아 자전거의 몸통에 다시 자물쇠를 잠갔다.

“성현아!”

처음으로 그녀가 반갑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그녀가 미웠다. 내 가방을 가슴에 안은 채 서
서히 다가서는 그녀를 바라보다 애써 눈을 피하자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서는 가방을 내밀며
말했다.

“왜 그래? 성현이 뭐 화나는 일 있어?”
“없어! 가방 이리 줘!”

뭐 특별할 것도 없는 가방이었다. 그저 평범한 모양에 평범하게 볼펜 몇자루와 실내화, 그
리고 분명히 고약한 냄새를 풍길 빈 도시락만이 들어 있을 것이다.

“성현이 화났구나?”

변함없이 밝은 얼굴의 그녀였지만 그런 얼굴표정이 싫었다. 차라리 강하고 단호하게 나를
밀어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니면 차라리 내게도 그 남자에게 주는 것처럼 그녀의
모든 것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 뿐이었다. 자꾸만 그녀의 맑은 얼굴에 빠져 들어가는 내가
싫을 지경이었다.

“.............”

나는 대꾸 없이 자전거를 돌렸다. 그리고 낚아채듯 가방을 잡고 등으로 울러맸다. 미운 그
녀의 얼굴을 보면 또 다시 햇살 같은 맑은 미소에 내 마음이 녹아버릴까 애써 시선을 피했
다. 그러자 그녀가 자전거를 붙잡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성현이 삐치니까 더 귀여운데?”
“도대체 왜 그래? 왜 당하고만 살아?”

바보 같은 나였지만, 나만큼 바보 같은 그녀가 미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 슨 소리야?”
“어제! 다 들었어! 너 바보야? 싫으면 강하게 거부를 하면 되지 왜 애원을 하냐고 그 새끼
한테!”

“너............... 됐어! 빨리 학교 가~”
“싫어!”

잠시 그녀가 변명처럼 무언가를 말하려 하다가는 급선회를 했다. 그녀 얼굴에는 그 맑던 미
소도 사라져 있었지만 불안하게 마구 떨리는 눈동자가 나의 떨리고 복잡한 마음만큼이나 힘
겨워 보였다.

“아니, 할 말은 해야겠어!”

나는 다시 자전거의 받침대를 내려 세워두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
남자가 집에 있건 없건 그건 중요치 않았다. 다행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그 남자는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나는 그 남자에게 그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고 애원을 했든, 아니면 협
박을 했을 것이다.

“학교 늦어, 일단 학교부터 가! 이따 얘기 해”
“아니, 이대로 가 봤자 하루 종일 짜증만 날거야”

“왜 그래... 내 일이야... 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알아! 아는데 니가 너무 바보 같아서 참을 수가 없어! 남편이라면 이해하겠어... 도대체 왜
그렇게 당하고만 사는 거야? 솔직히 그 남자가 샘이 나기도 했었어... 그런데 이젠 아니야,
밉고 증오스러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아프게 하잖아!”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네가 그렇게 함부로 말 할 일이 아니야... 빨리 학교나 가!”
“너도 나 좋아한다며? 좋아하는 사람이 아프고 힘들어 하는데... 너 같으면 그냥 보고만 있
겠어? 오죽 답답하면 내가 이래?”

“그 마음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래서 그러는 거라고!”
“.................”

“속상하게 왜 그러니? 솔직히 내가 널 엄청나게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치자! 너와 내가 행복
하게 맺어질 수 있는 사이니? 그런 나이차니? 그런 조건이니? 그러니까 너도 이제 그만 해”
“뭘 그만해? 싫어! 너 좋아하는 건 내 자유야...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그럼 너도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왜! 도대체 왜 내 마음을 그렇게 몰라? 너에 대한 마음이 네 말대로 호기심이나 단순히 여
자의 몸에 대한 것이라면 내가 왜 이렇게까지 말하겠어!”

그녀가 주변을 돌아보더니 곧 거실의 창문가로 향했다. 그리고 소파 아래서 담배를 꺼내 불
을 붙였고 재떨이를 꺼내며 소파에 앉아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꼬아 내린 두 다리가
어찌나 가늘고 길다랗게 뻗어 있던지 눈을 두기가 미안할 정도로 예뻤다.

“내가 언제 좋아해달라고 했어? 사랑해달라고 했냐고!”

그녀는 나지막히 말을 꺼냈다. 소파 앞에 던져진 담배와 라이터를 붙잡아 불을 붙이고 그녀
와 같이 옆자리에 몸을 날려 앉았다. 나는 그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었는데 그녀에겐 간섭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저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왜 내 인생에 들어와서....”
“너야말로... 왜 내 인생에 들어와서 짜증나게....”

넋두리를 하듯 우리 둘은 그저 담배만 연신 피워대고 있었다. 담배가 가진 장점 중에 하나
가 흥분된 마음을 녹여 내리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와 나는 짧아진 꽁초를 재떨이에 비
벼끄며 나란히 현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현아...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너의 마음이 그저 호기심이라고만 생각했어... 진심으로
내게 다가오는 너를 더 이상은 볼 면목도, 용기도 생기지 않아....”
“무슨 뜻이야? 앞으로는 날 보지 않겠다는 뜻 같은데?”

그녀가 생각을 정리한 듯 조용히 말을 건네왔다. 그러나 그녀가 내뱉는 이별선고는 마음이
납득할 수 없었다.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여전히 뜨겁고 강하게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와 시작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별이라는 게 더 우습기도 했지만 나는 그녀 없
이는 정말 못 살 것만 같았다.

“맞아.. 이제 그만 하자, 뭐... 시작한 것도 없지만 서로 좋은 추억이라고 생각하고.....”
“아... 안 돼! 싫어! 나... 난 그렇게 못해....”

“성현아!”
“아.. 안 돼... 알았어... 나 누나한테 이제 간섭 안 할게.... 응? 제발...”

나는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로서도 ‘안보면 되지!’ 하고 털어놓은 말들이었지만
막상 그녀가 이별을 선고하자 나의 마음은 그녀를 붙잡으라 마구 외쳐대고 있었다.

“아니,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이제 나도 널 볼 자신이 없어...”
“왜? 아니야... 날 왜 못 봐? 우리 그냥 이렇게 잘 지내면 돼... 응?”

“......................”
“귀찮게 안할게... 더 이상 그 남자에 대해 이렇다 간섭 안할게...”

나는 그녀의 맨다리를 붙잡고 사정을 했다. 목석처럼 굳어 내내 다른 곳만 쳐다보던 그녀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슬펐다. 지금 보고 있는 여자를 앞으로 보지 못할 걸 생각하니 못
견딜 것만 같았다.

“늦었어! 빨리 학교부터 가~”
“까짓 학교! 필요 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자꾸 왜 그러니? 성현이 니가 힘든 만큼 나도 힘들어! 그러니까 그만 하자고!”
“힘들게 안할게... 제발~”

나는 두 손을 모아 빌기까지 했다. 몰랐다. 나조차도... 내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다랐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지금은 몰라도 또 아픔은 다가 올거야... 그러니까 그만 하자~ 착하지?”
“아직 내 마음은 너를 놓지 않고 있다고! 마음이 이런데 어떻게 그만하자 그래?”

“마음.........이 안 놔줘?”
“그래!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잖아! 그 남자가 너를 그렇게 아프게 하고 너를 탐하는데도
내 마음은 계속 너를 잡고 있잖아!”

눈에서 눈물이 뚝 흘러내리고 말았다. 쪽팔리게 울지는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뜨겁게
타고 내리는 눈물을 보이고 만 것이다. 그러자 그녀가 보드라운 두 손으로 나의 눈물을 닦
아주더니 나를 가득 안아주었다. 나 역시 꿇었던 무릎을 세우며 그녀를 품안 가득 안았다.
달콤한 향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살내음이 물씬 풍겨왔다. 아기같거나, 또는 청포도
의 진한 향기와도 같은 풋풋한 향기였다.

“녀석...”

그녀가 나의 뒷통수를 부드럽게 만져주고 있었다. 어찌나 부드럽고 황홀한 손길인지 그대로
그녀 곁에 잠들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어서 학교 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야지?”

귓가에 울리는 그녀의 낮은 음성에 손끝부터 발끝까지 퍼지는 묘한 감정에 심장이 울컥거리
고 있었다.

“나중에... 나 행복하게 해주려면... 좋은 대학가야할거 아냐~”

그녀가 나를 떼어 놓았다. 그리고 나를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까치발을 들어 내 입에 입을
맞춰왔다. 짧은 입맞춤이었지만 첫키스보다 강렬한 쾌감이 온몸을 스쳐가고 있었다.

“후회 안하지?”
“안 해... 그런 거~”

“나중에 나 원망하기 없기다?”
“내가 왜 누나, 아니 널 원망해~”

“약속 할 거지?”
“응”

“그럼... 내일 저녁 때 내려와... 밤에~”
“바... 밤에?”

그녀의 입술이 다시 한 번 나의 입술을 스쳤다. 그리고는 새댁이 남편 출근길을 재촉하는
듯 팔짱을 잡아끌며 등교를 재촉했다.

‘채영아~ 그래... 난 너만 있으면 돼... 사랑한다...’

자전거에 몸을 싣고 페달을 밟으며 등 뒤로 멀어지는 그녀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밝은 햇살
보다 더욱 밝게 빛나는 그녀를 잃을 뻔 했던 나의 집착에 꾸지람을 하며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첫사랑 - 9부

그렇게 쫒기듯 현관을 나선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범죄자처럼 험상궂게 생기지
는 않았지만 표정 자체가 어둡고 성격이 거칠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긴, 범죄자가 얼굴에
범죄자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듯 그 남자 역시 얼굴로만은 나쁜 사람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그는 분명 나쁜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내 여자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누나가 저런 놈에게....’

찝찝한 그녀의 표정을 뒤로하고 건물을 돌아 다시 우리 집으로 향하려는데 그녀의 안방 창
문이 활짝 열려진 게 보였다. 그 사이로는 여전히 서 있는 그녀와 밥을 먹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여전히 그녀는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도대체 왜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육중한 엉덩이를
내밀며 환락으로 빠져들던 그 행복한 표정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벽면에 바짝 붙어 몸을 숨겼다. 아무래도 두고 나온 나의 그녀의 마지막 눈빛이 마음
에 계속해서 거슬렸기 때문이다. 대문과는 거리가 있고 외지다면 외진 곳이었지만 훤한 대
낮이었기 때문에 혹시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두고 방으로 올라가
버리기에는 찝찝한 면이 없지 않았다.

말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 상 그 남자가 밥을 거의 다 먹은 것 같은 느낌이
었다. 나도 그러했지만 그 남자 역시 거의 밥을 마시듯이 급하고 서둘러 식사를 마쳐갔다.
그리고 그 둘은 안방으로 들어왔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 사이에 낀 음식물을 우물거리는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그녀는 여전히 어둡고 무거운 표정이었다.

“바쁘다면서?”
“아이, 얘가 오늘 왜 이래? 정말?”

“바쁘다는 사람이 이러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아~ 진짜! 빨리 끝낼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안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더욱 벽면에 달라붙어
야 했기에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대화내용만으로도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싫어! 나 오늘은 싫어!”
“아! 진짜 짜증나게 왜 이래?”

대화를 들어보니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그녀의 고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녀의 색스러운 신음을 듣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착잡해지며 내
가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 분노와 질투심에 눈알이 돌아버릴 것 같기도 했다.

“오빠!”
“아! 진짜! 빨리 이렇게 해 봐!”

“싫다고...”
“아잇! 씨발 진짜 확!”

그 남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정확히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담배꽁초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처럼 나의 머리꼭대기에서
도 그렇게 연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았다.

‘누나! 하지 마... 응? 오늘 만큼은 그냥 좀 넘어가 주면 안 될까?’

어쩌면 그녀가 아닌 그 남자에게 애원을 해야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그 남자는 상상이상으로 높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
다. 그게 싫었다. 내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패배감을 물씬 던져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오늘은... 아니 이제 그만...”
“아니, 너 오늘 왜 이래? 진짜 확 씨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들고 있던 재떨이를 던졌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던졌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멀리 떨어진 나조차도 움찔하게 만들 만큼 강한 파괴음이 귀에 꽂혀왔
다.

“아...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꼭 이렇게 화를 내야... 이렇게 해 봐!”

창문으로 고개를 넣어보고 싶은 마음을 굴뚝 같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솔직히 겁도
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옥문을 허락하고 말았
다. 확실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귀에 들리는 살결에 스쳐 지나는 옷깃의 소리가 들려왔
고 쾌락의 폭풍을 준비하는 침대 매트리스의 스프링소리 마저 생생히 들려왔다.

“아! 아파... 살살해...”

역시 그녀의 입에서는 달뜬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직 달뜬 목소리까지는 아니
었지만 그녀가 침대에서만 내는 그 콧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는 정말 바빴나 보다. 지난
밤처럼 느긋하고도 여유 있게 즐길만한 상황이 아니었던지 그녀의 입에서는 벌서부터 고통
에 흐느끼는 고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면서 뭐가 아프다 그래... 참아!”
“아! 아흑... 오...옵빠....”

양손에 조막만한 두 개의 돌멩이를 움켜잡은 채 나는 나의 그녀가 아파하는 신음을 들어야
했다. 이제 내것이 되었다는 작은 생각이 산산히 부셔지고 있었다. 그녀가 거친 호흡을 뱉
어낼 때 마다, 아픔에 호소하며 그 남자를 불러댈 때 마다 알 수 없는 전의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아직 난 어리다. 어리기 때문에 그녀를 구할 수 없다...’

그저 내 머릿속에 어쩔 수 없음을 알리는 신호를 감지해냈다. 그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그가 조금은 거칠게 나오기는 했지만 그녀 스스로
옥문을 개방한 것이 아닌가?

‘나도 성현이 좋아해...’

그 거짓말에 속아 난 기분이 들었다. 날 좋아한다면, 진정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내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그렇게 허무하게 옥문을 열어주면 안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그 남자에게 몸을 내맡긴 채 신음해대고 있었다.

피부와 피부가 마찰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오고 있었다. 거친 호흡과 함께 그녀의 색스러
운 고성이 터져 나왔고 지반이 일렁일 만큼 강한 에너지가 창밖으로 흘러나오는 느낌이었
다.

“후우.... 허윽.... 흐윽! 꺄윽....”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신음이었던지 이를 악문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듯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내 몸은 흥분이 되질 않았다. 언제나 들어오던 그녀의 달뜬 신음소리였지만 왠일
인지 자지는 요지부동 움직이질 않았다.

“어윽! 오... 옵빠... 어흑.... 아흐... 아읏! 끄읏! 꺄흣!”

그녀의 죽을 듯한 신음소리가 애처로웠다. 그녀를 두고 올 때 본 느낌처럼 그녀의 신음도
슬픈 느낌이었다. 물론 나만이 느끼는 착각일 수도 있었다.

“아악! 하악! 악! 악! 까윽!!”

점점 고조되는 그녀의 신음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억울했다. 내가 그토록 아끼
고 사랑하는 여자가 그 불쌍한 남자에게 몸을 내맡긴 채 신음하고 있는 것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그랬다. 또 나를 좋아한다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어오기도
했다. 양손에 쥐어진 돌멩이로 그 남자의 대갈통을 후려 찍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또
한 하지 못했다.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그녀의 은밀
한 부위를 탐내고 있는 한 마리의 수컷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손바닥의 두툼한 살점이 있는 부분을 입에 물었다. 가슴이 쓰리고 발끝부터 손끝까지
전해져오는 찌릿한 느낌에 슬프다는 느낌을 다시 한 번 깨우칠 수 있었다.

‘씨발새끼...’

후끈한 열기가 창을 통해 흘러나왔다. 분명히 그는 또 다시 땀에 범벅이 되어 사정없이 빠
른 속도로 그녀의 보지를 왕복하고 있을 것이었다. 부러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를 그
상황에서 구출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생각에서만 이뤄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학! 하악! 오... 옵빠... 끄흐.... 아악!”

그녀의 끔찍한 고함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눈엔 그 돼지 같은 남자의 뒷모습만이 보였다. 상의를 그대로
입고 한쪽 발목엔 바지와 팬티가 걸려진 발정난 돼지 한 마리가 거칠고 빠르게 허리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억울하지만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보고 다시 고개를 빼내야만 했
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찾았다. 그녀의 치욕스런 모습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애처롭게 잔뜩 찌그러져 엉덩이만 치켜 올린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
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입에서는 한없이 구슬프고 애처로운 신음
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서도 그녀처럼 눈물이 흘렀다.

‘누... 누나.......’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동공이 흔들리는 듯 하더니 그렇게 한참동안 나와 눈을 마주쳤
다. 한참을 나와 눈을 맞춘 그녀가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윗니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그 남자에게 잘록한 허리를 붙잡혀 피하지도 못하는 몸을 고스란히 대준 채 그의 폭풍
같은 움직임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내가 어리다는 것을... 만약 내가 성인이었다면, 아
니 그녀가 진정 나의 여자였다면 그 끔찍한 장면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었을까 하는 의문
마저 들었다.
그렇게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는 동안 그녀는 분명히 나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그 피하는 눈길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예 침대에 뭉개진 채
그의 좆질을 받아주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창녀와도 같았다. 그것도 닳고 닳은 창녀의 모습
이 비쳐졌다. 물론 창녀라고 불리우는 여자를 한 번도 본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모습일 것만
같았다.

‘흑... 누... 누나......’

다시 그녀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곧 깨물었던 입술을 놓아
주며 두 눈이 쏟아질만큼 커다라졌다. 발광을 하듯 허리를 비틀었고, 어금니를 꽉 깨무는
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아윽... 오빠... 나... 나 죽어... 죽을 꺼 같아.... 아악!”

미친년처럼 머리를 흔들고 잘록한 허리를 마구 비틀어대던 그녀는 다시 눈을 감으며 침대로
널부러졌다. 온몸에는 힘이 전부 빠져버린 듯 늘어져버렸고 조금씩 조금씩 떨림이 시작되었
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힘겹게 눈을 떴다. 눈가엔 맑은 이슬자욱이 맺혀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웃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웃음을
보내주었다. 잠시 잠깐 미간이 찌푸려지는 듯 했지만 햇살과도 같은 미소가 나를 웃게 했
다.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이려는 듯 그녀는 그렇게 내게 행복한 웃음을 던져주었다. 그
러나 그녀의 밝은 웃음이 그저 슬피 우는 표정보다 더욱 마음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어쩌면
그런 그녀의 웃음은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또는 자신을 좋아하는 한 남자에게 정을 떼
기 위한 수단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더욱 파고
들어오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씨발... 차라리 울어!’

손바닥을 깨문 악다구니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 손이 아픈 것보다 내 마음이 더욱 아
팠다. 그녀의 고운 하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남자와 그녀는 아랫도리만 벌거벗은
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차라리 그녀가 울었다면 나는 그녀에게 오만가지 정이 떨어졌을지
도 모른다. 사람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달아나면 잡고 싶고 다가오면 멀어지고 싶은 청개
구리 심보가......

“꺄윽... 하읏... 꺄악~~~~”

그녀가 다시 한 번 눈알의 흰자위를 보이며 침대에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곧 그 남자는 황
급하게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며 그녀의 입 안으로 세워진 자지를 꽂아 넣었다.

“끄흣! 끄흐~~~~~~~~~~~~”

그의 목이 뒤로 제켜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녀는 그의 자지
를 입에 물고 무언가를 꾸역꾸역 삼켜내고 있었다.

‘씨발새끼!’

그 남자는 그 자세로 얼마 지나지 않아 쪼그라든 자지를 빼어 냈고 몸을 돌리는 순간 나도
다시 벽으로 몸을 숨겼다. 마지막 그녀의 얼굴은 입 주변에 걸쭉하고도 미끈한 액체로 더럽
혀진 상태였다.

나의 사랑하는 여자가 또 다시 처참한 꼴로 무너져버렸다. 섹스를 싫어한다던 그녀였다. 그
러나 그녀는 눈알을 뒤집으며 그 불한당 같은 자식에게 무척이나 색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야 말았다. 억울했다. 그 남자가 내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내 여자가 그러고 있는 모습 자체
가 싫었다. 누가 뭐래도 그 여자는 내 여자였다. 이미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내 마음안
으로 들어와 있었으며, 내 마음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떨리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더러운 기분
을 느끼기 위해 훔쳐본 건 아니었다. 곧 대문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
음에도 나는 그저 그렇게 앉아 있었다. 울타리 너머로 그녀를 그토록 처참히 뭉그러뜨린 그
남자가 유유히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지 못했다. 그녀가 수습
을 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창문에서 고개만 내밀어도 엄마에게 걸릴 수 있는 곳
에서 용감하게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뻑! 뻑! 후이유~~~~~”

미치도록 쓰리던 가슴이 담배연기로 코팅이 되는 듯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뻑! 후우~~~~”

한 모금 더 빨자 막혔던 숨이 단번에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담배를 피워내며, 막힌 호흡을 뚫었다. 그렇게 호흡을 뚫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
에게 다가갈 땐 그녀가 내게 보여주었던 맑은 웃음처럼 나 역시 맑은 웃음으로 다가가고 싶
었다. 비록 정상적이지 않은 사랑이었지만 그 비정상적임이 더 아프지 않게, 더 상처받지
않도록 말이다.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다시 그녀의 집 현관 앞에 섰다. 그 어느 때보다 두근거림이 강
했다. 두근거림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일렁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똑! 똑!”
“들어 와~”

어느 때보다 낭랑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그런 목소리에 나는
그나마 안심을 했다. 그녀의 인생에 나란 놈이 끼어들면서 어쩌면 나보다 더욱 힘든 하루하
루를 겪고 있을지도 모를 그녀였다. 최소한 나란 놈 만큼은 그녀의 속을 좀 편히 해주자고
마음 먹어보지만 그게 잘 될지는 의문이었다.

“어? 설거지 해?”
“응~ 빨리 들어 와... 소파에 잠깐만 앉아 있어~”

그녀의 말대로 나는 장난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 남자가
스치고 지나갔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탱글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도 여
전했고, 얇고도 가는 유연한 허리도 여전했다. 그녀의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도 여전히 빛
났고 쭉 뻗은 길다란 다리도 시원시원했다.

‘아~ 근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이유모를 눈물이 다시금 샘솟고 있었다. 차라리 그녀가 울고 불며 힘들어 했으면 나의 마음
은 더욱 견고해졌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녀가 욕을 하고 난리를 피웠으면 나의 억울함이
덜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바보 같은 여자는 여전히 고운 얼굴을 한 채 아무렇지도 안
게 나를 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하긴... 뒤늦은 생각이지만 그녀가 17살 짜리 어린 남자에게 안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자의적으로 몸을 준 남자를 원망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비록 원하는 섹스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시쳇말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에게 서른 둘의 유부녀가 그럴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성현아! 어디가?”

어쩌면 그녀는 나의 위로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위로해 줄 만큼 마음
의 여유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그를 쫒아가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 외엔 내 마음엔 그 어
떤 것도 담고 받아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의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그녀가 흘렸던 맑은 웃음처럼 내키지 않았던 섹스이지
만 황홀한 쾌락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직 나만의 착각에서 그녀가 위로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이 행복함을 잔뜩 느낀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집
으로 뛰어 올라가면서도 정리가 되지 않은 머리를 마구 쥐어짜고 있었다.

“아들! 왜... 왜 그래?”
“엄마~아~”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아직 어린이였나보다. 집으로 올라와 엄마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자 나
도 모르게 엄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듯 눈물을 터뜨려버렸다. 억울했다. 엄마에게 모
든 걸 말하고 떼를 써서라도 그녀를 갖고 싶었다. 나만의 전유물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왜 그래? 우리 아들! 응? 왜 그래?”

세상에서 아무리 넓고 따뜻한 곳이 있다해도 엄마의 가슴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푸근하고
도 넉넉한 엄마의 가슴에 한동안 울던 나는 격한 감정이 안정된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그냥... 울고 싶었어...”

이 세상 모든 엄마가 그러하듯 자식의 울음 앞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
가? 하지만 우리 엄마는 달랐다. 캐묻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녀석, 다 큰 녀석이 엄마 찾아와서 울기나 하고....”

나를 안은 채 엄마의 손바닥이 나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그녀가 토닥여 주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은 비슷했지만 엄마의 손길은 큰 울타리와도
같았고, 그녀의 손길은 지켜 달라 애원하는 느낌과도 같았다.

“근데, 너 아랫집 새댁네에서 온 거 아니야?”
“왜? 그건 왜 물어?”

“인석아! 요즘 그 집을 밥 먹듯 기웃거리잖아!”
“헤헷! 그냥... 그 누나 그림 되게 잘 그려... 그림 좀 배우느라고...”

“그림?”
“응... 미술 실기도 잘해야 내신 관리 하지...”

“으구~~ 기특한 것! 엄만 그것도 모르고 의심했잖니?”
“무슨 의심? 쳇! 내가 그런 아줌마한테 관심 있을 줄 알고?”

“네가 걱정이니? 그 새댁이 너 잡아 먹을까봐 그랬지~”
“엄마!”

역시나 눈치 빠른 엄마는 나의 행동반경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엄마를 안심시
켜 놓지 않으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울어대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후련한 가슴으로 돌아온 나였다.

“그리고 아들?”
“응?”

엄마의 말투엔 갑자기 가시가 잔뜩 돋혀 있었다.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을 때 끊으렴?”
“뭐... 뭘?”

“니가 더 잘 알텐데... 이 세상에 끊을 것이 참 많다만... 꼭 끊어야 한다.. 알았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겁에 잔뜩 질려있으면서도 애써 부인하고 있었다. 아니 아예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
다.

“담배! 이누무새꺄! 어린 놈이 벌써부터 담배 냄새 폴폴 풍기고 말이야!”
“아! 아냐... 내가 무슨 담배를 피운다고...”

“정말이야?”
“그럼~ 엄마는 엄마 아들을 뭘로 알고...”

“하아~ 해 봐!”
“됐어!”

나는 찔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혹시나 떨어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잠깐!”

아놔! 엄마의 추리력에 걸려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뜨끔하는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위풍당당한 엄마의 기에
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아! 왜! 또!”

무조건 큰소리다!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질질 쳐 울 땐 언제고... 또 찔리는 게 있으니까 소리 지르는 것 좀 봐! 저 화상!”
“찔리긴 뭐가 찔려!”

“너! 요즘 왜 팬티 안 갈아입어! 날도 더운데... 그러다 꼬추에 습진 생긴다!”
“안 갈아입긴 뭘 안 갈아입어~”

“니 팬티가 하나도 없던데?”
“그... 그래? 요즘 더워서 안 입어~”

“아휴~ 더러워 죽겠네 이누무새끼! 너 팬티 안 입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뭘 또 어떻게 돼?”

“바지 입다 자크에 꼬추끼면 어떡할려그래! 이 엄마가 니 꼬추를 어떻게 만들어 줬는지 몰
라? 내가 너 나중에 사랑받으라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함부로 하고 다녀!!”
“알았어... 알았어... 입어! 입는다구!”

“꼭 챙겨 입어라~”
“알았어... 그리고! 엄마도 좀 이제 그런 말 좀 하지 마... 격 떨어지게...”

“허이구... 격? 나중에 고맙다고 절이나 하지 마... 인석아...”
“아~ 네!”

이 세상 모든 치유약 중에 엄마만한 약이 또 있을까? 어느새 나의 마음은 치유가 다 된 듯
홀가분해져 있었다. 내가 홀가분해진 만큼 그녀도 홀가분해지길 바라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당장 달려 내려가지 못했다.



누군가를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일...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일...
어쩌면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나였음에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사랑? 그깟 사랑이라는 단어를 알지도 못했던 나였다. 그저 한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 여자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것 외엔 이토록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만 생각하면 아련해졌고 그녀만 떠올리면 못 견디게 보고파졌다.
한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은 죄 치고는 겪고, 보고, 들어야 하는 모든 것이 너무도 가
혹했다.

그렇게 방학은 끝이 났다. 누구나 다 그렇듯 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가면 몰라보게 달라져
있는 친구들을 보게 된다. 살이 엄청나게 빠진 놈, 키가 엄청나게 큰 놈, 여드름이 엄청나게
많이 생긴 놈... 나는 그들 중에 키가 엄청나게 큰 놈 축에 속해버렸다. 정확히 재보지는 않
았지만 178cm정도는 된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조차도 키가 왜 이렇게 컸냐며 놀라는 눈치
였다.

키도 컸지만 내 스스로 가장 많이 큰 것은 단연 마음이었다. 15살의 연상을 사랑하고 사귀
면서부터 나는 좀처럼 친구들 틈바구니에 낄 수 없었다. 아니, 끼지 않았다. 그제서야 포르
노를 접해가지고는 테이프를 빌리러 다니는 놈, 야설집과 야한책 등 그들은 내가 몸소 보고
겪은 것들에 환장하는 어린 영혼들이었다.

‘쯧쯔... 어린것들....’

물론 비디오나, 책과 같은 서적들은 이미 중학교 시절 석민 덕에 떼었지만 나 역시 총각딱
지는 여전히 떼지 못한 동정의 몸이었다. 실제로 그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당시 17살에 첫경험을 한 친구들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하지만 난 그들이 너무
어리게만 느껴졌다.

개학식을 마치고 적응 안 되는 학교생활에 조금씩 버릇을 들여가던 나는 여전히 무겁고 재
미없는 생활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여전히 더운 날씨는 이어졌고 여전히 그녀라는 이
름 아래서 가혹한 성인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형식상, 법률상 행해지는 성인의 의식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성인식 말이다. 길기도 길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부터 시작된 성인식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연장의 연장을 겪는 끝없는 랠리와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게 신기한 것은 지치지도 않는 다는 것이었다. 조금 지친다 생각이 들 때면 그녀의 고운
미소가 달래주었고, 그 마저도 지친다 싶으면 그녀가 고운 손으로 힘을 보태주었다. 야속하
고 잔인하리만치 그녀는 적당선에 서서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사람의 속을 새카
맣게 불태워가고 있을 뿐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자전거에 자물통을 채우고 있는데 슬픈 눈빛을 보여준 이후
보지 못한 그녀가 흰색의 어여쁜 원피스를 입고 내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풀대는 흰색천
에 둘러싸인 그녀는 진정 천사와의 모습과도 같았다.

내겐 엄마라는 치유약이 있다지만 그녀는 혼자서도 꿋꿋이 마음을 잘 달래는 여자였다. 그
렇게 보였다. 아마도 나 같았으면 그 험한 꼴에 험한 일을 당하면서 몇 번이고 쓰러지거나
넘어져 울었을 것이다.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섹스를 즐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보고 있을 거라는 예상으로 그녀가 그 남자를 거부 했을리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나란 놈에게 보이기 싫었다면 그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것으로
대신하면 됐을 테니까 말이다.

“성현아!”
“오~ 우리 마누라?”

일부러라도 나는 그녀를 더욱 반기며 얼른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고 난 그녀에게 달려갔
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며칠간의 회포를 풀 듯 볼에 쪽소리가 날 듯 키스해주었다.
정말이지 그녀가 나의 아내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성들여 입을 맞추자 그녀는 놀라며 나를
살짝 밀쳐냈다.

“엄마 보시면 어쩌려고~ 들어가자!”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안겨왔다.
이상했다. 왠만해서는 그녀가 그렇게 애교 있게 다가서는 법이 별로 없었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왜 그래? 남편 직장 다녀온 선물인가?”
“직장? 푸핫! 학교가 직장이야? 대학교도 아니고 고등학교가?”

“그럼! 엄연히 직장이지! 크흣”
“그런가?”

“그래...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차려입으셨어?”
“우리 데이트 하자!”

“데이트?”
“응!”

그녀는 돌망돌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평소와 다르게 마누라 운운하며 걸어오
는 장난에도 그녀는 거부는커녕 오히려 맞장구를 쳐주며 나와 기분을 맞추었다.

“뭐야~ 언제는 미운 모습만 보여준다더니...?”
“싫어? 나랑 데이트하기?”

갑자기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무나 힘주어 말을 하던 그때의 그녀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과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당장 오늘부터 사귀자! 내가 얼마나 밉고 저급한 여자인지 보여줄게!’

어쩌면 나는 그녀의 가장 밉고 저급한 모습을 모조리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그녀가 밉지 않았다. 저급해보이지가 않았다. 눈에 콩깍지가 씌여도 제대로 씌였는지 너무
어리석게도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닌 그 남자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런 모습은 좀 그런데?”
“이런 모습이라니?”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채영이는 어려보이니까... 교복 없어? 교복?”
“교복? 너... 진짜 변태지?”

“그래... 나 변태다~~~~흐흐흐흐”
“잠깐만... 고등학교 교복이 어딘가 있긴 있을건데....”

그녀를 지켜보며, 그리고 훔쳐보며 생겨버린 환상 중에 하나가 그녀와 교복을 입고 시내를
거니는 것이었다. 나중에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에서 재연이 되기는 했지만 그 때의 환상
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믿지 못할 만큼 어려보이는 동안의 그녀와 연인이 된다는 가정
하에 생각하고 환상에 젖은 것이 바로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데이트를 하는 것이었다. 우
선 그녀의 교복을 입은 모습이 궁금했다. 서른 두 살의 아줌마라는 호칭을 얻은 그녀가 교
복을 입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고, 두 번째는 15살 차이가 나는 우리 둘을 어느 시선으
로 바라볼지 궁금했다. 그들처럼 교복을 입고 나이트클럽을 들어가지는 못할지언정 그저 그
녀도 나와 같은 학생으로 되돌아가 나와 같은 어린 심정으로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하는 바
람도 섞여 있었다.

“찾았다!”

그녀가 서랍 속 깊은 곳에 숨겨둔 건 자주빛 자켓에 빨간 체크무늬가 수 놓여진 교복이었
다. 강원도에서 학교를 나온 그녀의 교복주머니엔 한자로 학교이름과 정 가운데엔 ‘高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근데 동복이야....”
“뭐 어때?”

“으이그... 이 한여름에 누가 동복을 입냐?”
“그럼 마이만 벗으면 되지?”

“그럼 상의는... 블라우스는?”
“블라우스?”

그 학교의 전통인지, 아니면 친구들의 장난인지, 블라우스에는 빨갛고 검은 글씨들이 잔뜩
수 놓여져 있었다. 뭐... 나 잊지마 채영아... 우리 죽을때까지 친구하자... 같은 유치하기 짝
이 없는 그런 글귀들이 가득해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입냐구... 그리고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이런 교복을... 쪽팔리게...”
“아냐... 이 아줌마가 뭘 모르는 아줌마인가본데... 요즘은 교복치마에 그냥 티만 입는 게 트
랜드라구, 그러니까 일단 입어!”

“나, 가방도 없고, 신발도 없어...”
“일단 입어! 가방은 없이 나가면 되고 신발은 그냥....”

나는 그녀의 신발장으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신이 난 나는 이것저것 둘러보다 검은 색 단
화를 구석에서 찾아냈다. 그 사이 교복치마를 입고 나온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수줍게 서
있었다.

“이거 봐... 이상하잖아...”
“아니! 하나도 안 이상해! 너 화장했어?”

“응... 조금...”
“그럼 빨리 화장 지워! 화장 지우구 뭐지? 파우더 뭐냐... 아무튼 최대한 안 한 것 같이...
아니 하지 마!”

어른이 되면 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화장을 한다. 그게 남들에 대한 예의니 어쩌니 하면
서도 자신의 나이를 지우기 위해 화장을 한다. 즉 예뻐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다.
또 학생들도 화장을 한다.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에 화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을 하고 어른처럼 행동을 하지만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하지만 그녀는
화장을 지우니 더욱 화사하고 맑은 피부가 드러나고 있었다. 정말 그녀와 어울리지 않고 나
이가 들어 보인다면 그녀를 좋아 했을리도 없었겠거니와 그런 그녀에게 교복을 입혀 나가자
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돼... 됐어?”
“응? 으...응 돼... 됐어~”

그녀가 마지막으로 딸기가 그려진 하얀 티셔츠를 입고 안방문을 나섰다. 발가락과 발가락을
교차하고 두 손을 모아 수줍게 선 그녀는 영락없는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고1로는 좀 그렇
다면 고3정도 되어 보이는 조금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특히 하얗게 윤기 도는 피부
와 전혀 아줌마스럽지 않은 핫 한 바디를 소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저.. 정말 괜찮아?”
“진짜 예쁘다니까? 정말이야~”

그녀는 묻고 또 물었다. 실제 고등학생인 나의 눈이 가장 확실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로 그녀는 전혀 서른 둘로 보이지 않았다.

“이거?”

그녀는 신발을 내려다보며 난생을 표했다. 굽이 전혀 없는 앞 코가 동그란 모양의 단화였
다.

“그럼? 이 복장에 뾰족 구두 신을래? 말 들어 쫌!”
“그래도... 이건 유행도 너무 지났고... 굽이 하나도 없어서...”

“채영이 너는... 헤헷!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반말도 쉽게 나오잖아... 아무튼 너는 다리도
길고 예뻐서 괜찮아... 유행은 무슨... 학생이 무슨 유행타령이야!”
“그.. 그래도...”

거의 반 강제적으로, 반 협박으로, 반 부탁으로, 반 애원으로 단화를 신기고 엄마의 눈을 피
해 집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긴 해가 저녁 7시가 다되었음에도 한 낮처럼 비쳐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어색한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도 보고, 쇼윈도에 자신을
비쳐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지.. 진짜 괜찮아?”

“그래~ 빨리 와~”
“근데 어디가게?”

“어디긴... 시내가야지...”
“시내?”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팔짱을 끼며 붙어 섰다. 조금은 타이트한 티셔츠 때문인지 팔
에는 그녀의 아담한 가슴이 눌려왔다.

‘크으~ 짜릿한 거...’

그녀가 학생답지 않은 건 단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속옷이었다. 흰색티에 어울리지 않게
빨간색이 드러나는 속옷 외엔 그녀는 누가 봐도 여고생이었다.

“야! 정채영! 요즘 고딩들은 팔짱 안 껴... 손잡고 다니지...”
“그.. 그래?”

나는 그녀의 작은 손을 끌어내려 깍지를 끼워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몸이 바짝 긴장하듯
얼어붙는 것처럼 뻣뻣해지고 있었다.

‘귀여워... 순진해...’

누가 그녀를 결혼 한 유부녀로 볼 것이며, 자신의 남편이 아닌 그 불쌍한 남자에게 몸을 희
생한다고 생각할 것인가? 갑자기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마음속 한 구석이 쇠잔해지는 느
낌이었다.

“오늘 뭐할까?”
“뭐할거야?”

“뭐야~ 니가 데이트 하자며~”
“이렇게 입혀서 데리고 나가는 사람이 책임져야지!”

“그래? 그럼 우리 오늘은 진짜 학생처럼 놀까?”
“콜!”

“콜?”
“콜콜콜!!!”

그녀와 나는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뭐야.. 그 장지갑은? 아줌마 티내는 거야?”
“신분증은 있어야지... 그리고 손에 아무것도 안 드니까 불안하잖아~”

“야! 교복이 신분증이고 손엔 내 손을 잡으면 되지... 으이그...”
“쳇! 나 안 나갈래... 계속 그렇게 구박만하고... 나 안 나가!”

“알았어.. 알았어! 미얀... 미야~~~안!”
“그러니까 잘 해....”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입고 있는 옷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양이다. 영락 없는
여고생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보니 더 할 나위 없이 기쁜 마음이 샘솟고 있었다. 생각 같아
서는 그녀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려주고 싶었지만 동네인지라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아쉬
웠다.

“채영아! 버스왔다!”
“버스? 알았어...”

그녀를 먼저 올려 태우고 뒤를 따라 내가 올라탔다. 그녀는 잔돈이 없었는지 천 원짜리 지
폐를 냈고 나는 회수권을 낸 뒤 학생들만의 자리인 맨 뒷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이 봐 학생!”

나는 자동적으로 학생을 부르는 기사아저씨를 쳐다봤다.

“네?”
“자네 말고, 그 여학생!”

자리에 앉으려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이 동그래진 그녀는 말없이 버스기사를 쳐다봤다.

“잔돈 받아 가야지!”
“아! 네...”

그 당시 어른은 700원, 학생 요금은 450원이었다. 그런 그녀가 천 원짜리 지폐를 낸 후에
경황이 없었는지 그대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녀는 창피한지 쪼르르 달려가 잔돈이 나오
는 입구로 가자 버스기사는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풉!”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며 자그마한 손바닥을 벌려 잔돈을 보여주
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550원이 들려 있었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웃음을 참지 못했
다.

“아! 그만 웃어!”
“큭! 아.. 아니.. 그게.. 쿠큭!”

“왜! 학생이 학생요금 낸 건데 왜 그렇게 웃냐고!”
“아~ 웃기잖아....”

버스안의 승객들은 우리를 미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것보다도 그들의 그런 눈빛에
창피해져 왔다.

“채영아... 너 그거 알어?”
“큭! 뭘...”

“너, 그냥 있을 땐 진짜 모르겠는데... 그렇게 웃으니까 나이 들어 보여!”
“쳇!”

잠시 동안 정색한 그녀였지만 결국 그녀는 다시 웃음이 터졌고 그 웃음은 어느 할머니의 주
의로 인해 멈출 수 있었다.

“이제 알겠지? 채영이 니가 얼마나 완벽한지?”
“응! 이제야 좀 용기가 나는데?”

하루에도 수 백 명의 학생들을 보는 사람이 버스기사일 것이다. 그런 그의 눈을 속일 정도
면 그녀가 얼마나 학생의 모습과 가까운지 알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을 얻은 그녀였다.
시내로 나오자마자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
로 쳐다보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뭐할까? 뭐 먹을까?”
“응... 배고프다... 뭐 먹자!”

나는 그녀를 데리고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쫄면집으로 데려갔다. 2,000원짜리 쫄면이었지만
맛 하나만큼은 2,000원 그 이상을 하는 학생들이 가장 운집한 공간이기도 했다. 쫄면과 고
기만두를 시키고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다 봤다. 그녀는 더웠던지 길다란 생머리를 한데
모아 묶어내고 있었다.

“예쁘다... 내 여친 예뻐!”
“푸흣! 조용히 해....”

꿈만 같았다. 그녀와 처음 하는 데이트가 가슴 설렜고, 서른 두 살의 아줌마가 교복을 입고
나와 같이 고교생의 모습을 한 채 거니는 것 또한 스릴 있었다. 설사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
도 만나게 된다면 그녀는 순식간에 정신 나간 여자로 보여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왜? 내 여친 예쁘다는데?”
“어흐... 넌 지금 내가 제 정신으로 보이니?”

“그럼? 뭐가 어때서? 내 여친 정말 예쁘다!”
“후우~~~~”

아직은 어색한지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두고 있었다. 손가락에 칠해진 빨간색 매니큐어
역시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때? 오랜만에 학생 신분으로 돌아온 기분이?”
“몰라~”

만두 하나를 입에 넣으며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예뻤다.
수줍어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보였다. 물론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것을 서서히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학생답게, 정말 건전하게 노는거야...”
“콜!”

배도 채웠겠다 우리가 향한 곳은 바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스티커 사진기 앞이었
다. 이미 스티커 사진기계 앞에는 여러 학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우리도 그들 틈에
껴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녀 역시 스티커 사진은 처음인지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고생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각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들과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비교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처럼 콩 깍지가 씌어진 내
눈에만 학생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걱정에서였다.

주관적인 잣대 안에서도 그녀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고생이었고, 실제 여고생들과의 비
교에서도 그녀는 당당히 수위를 차지하는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
다. 순한 얼굴에서 풍겨오는 이미지는 그저 학급에 착한 친구로, 손톱과 브래지어 끈에서
풍기는 붉은 계열의 색채는 날라리 여고생 같은 이미지가 마구 섞여 묘한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다.

더구나 한창 예민한 여고생들 밭에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주책스런 모습이었다면 분명 그녀
를 두고 여기저기서 수근 거릴 것은 분명했지만 다행히 우리를 두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
다거나 수근 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 성현아!”

그녀와 나란히 손을 잡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치며 나
를 불렀다. 석민이었다. 민영과 손을 나란히 잡은 석민이 베시시 웃고 있었다.

“이야... 공부벌레 강성현이를 시내에서 볼 줄이야...”
“미친놈! 아.. 안녕하세요 누나?”
“어머~ 성현아~ 오랜만이다~~~~”

호들갑스레 인사를 하는 민영의 얼굴 대신 나는 가슴을 바라봤다. 굽이 있는 신발을 신어서
인지 대충 키가 나와 비슷한 그녀는 다시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커다란 가슴을 지니고 있
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만약 그녀가 곁에 없었다면 나는 그 커다란 양감을 자랑하는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을 테지만 나의 그녀도 민영 못지않게 예쁜 가슴을 가지고 있다
는 걸 눈으로 확인 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누구야? 응? 야!! 누구야~”

나의 옆구리를 찔러가며 그녀의 정체를 묻는 석민은 배신감이 든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더니
곧 낯짝 두껍게 나의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전 성현이랑 제일 친한 친구 김석민입니다.”
“아...네... 안녕하세요~”

“우와~ 미인! 예뻐! 오~~~ 강성현....”
“후훗!”

사실 시내로 나오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 마주쳐도 단 한 사람, 석민과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워낙 극성 맞고 활달한 친구라 조용히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계획이 전부 망
가져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기 좋게 그들에게 들켜버린 나는 괜스레 마음이
좋질 않았다. 시끌시끌한 녀석이 싫지는 않았지만 조용하고 자유롭게 그녀와 단 둘이 하고
팠던 데이트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됐다! 같이 놀자!”
“아~ 됐어~”

‘아~ 석민아... 제발... 제발 좀 꺼져 줄래?’

은근히 눈빛으로 거부의 시선을 마구 보내는 나였지만 석민의 시선은 이미 그녀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분명 ‘이 여자 꽤나 괜찮은데?’라는 표정과도 같았다.

“아~ 왜! 저...기... 같이 놀아도 되죠?”
“절루 꺼지라고!”

원래 오지랖이 넓기도 하지만 석민은 나를 그냥 보낼 인간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묻는 그를 보며 나의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만 바라보고 있
었다.

결국 석민의 끈질긴 대시에 나와 그녀는 그들을 따라 시내에서 가장 왁자지껄 한 음식점으
로 향했다. 물론 그녀와는 스티커 사진도 찍지 못한 채 따라나선 게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
았다. 석민을 뒤따르는 동안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부드러우면서도 매끈한 촉감
에 심장에서는 스파크가 튀는 느낌이었다.

‘에잇! 김석민... 너 내가 언제간 복수한다!’

민영과 장난을 치며 앞장서 걷는 석민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은근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언
젠가는 석민에게 복수로 되갚아줄 것을 다짐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100% 고등학생들만 들락거린다는 술집이었다. ‘인터뷰’라는 술집으로
이미 학급에는 공공연히 소문이 퍼지던 곳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석민에게 가장 먼저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 고1이라는 타이틀로 술집이란 곳을 기웃거린다는 게 내겐 거부감으
로 다가왔던 기억이다. 석민 역시 어느 정도 까졌다고 보면 까진 민영을 통해 알게 된 곳이
라는 술집에 들어서자 담배연기는 자욱하고 나와 그녀처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바글바글
했다.

“야! 술은 좀 그렇지 않냐?”
“야! 잔말 말고 따라와!”

정말 학생답게, 건전하게 놀자는 제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두 개 층을 쓰
는 그 술집에서 2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쌍쌍이 온 우리들이 눈
꼴 사나운지 옆 테이블의 험상궃은 사내 녀석들이 한 동안 우리를 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싸움을 잘하지도, 학교에서 조금 놀지도 않는 나에겐 무척이나 부담되는 눈길들이었
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는 모델에 가까울 정도로 예쁘고 몸매도 끝내주는 여자와 비록 나
이를 많이 먹긴 했지만 여고생과도 같은 얼굴을 한 천사같은 나의 그녀가 함께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묵묵히 내 옆을 지키고 선 그녀는 나와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피처 하나랑요... 마른 안주 하나랑 골뱅이 주세요”

나의 그녀에겐 묻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주문을 해버린 그들이 야속했지만 조용히 가게안
을 살피며 젊은이들의 환락가에 들어선 아주머니 한 분은 처음과는 달리 시끄러운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는지 연신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볼 것도 없는 그저 그런 호프집이었는데도 말
이다.

“저기 나이가...”

석민은 뻥튀기를 알바생이 올려 놓고 가자마자 한 웅큼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그녀에게 말
을 걸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에게 무척이나 큰 관심을 쏟는 그였다.

“아~ 이름은 채영이고 나이는 고3!”

대신 해서 대답을 하자 석민은 ‘너한테 안 물었거든?’라고 타박하며 얼음물을 한 모금 들이
켰다.

“어? 그럼 우리 민영이랑 동갑이네?”

석민이 말하자 민영은 금세 동갑인 그녀에게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나의 여자
친구인 그녀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어느 학교야? 교복은 제일여고인거 같은데, 몇 반이야?”
“아~ 채영인 서.. 서울로 다녀...”

“아~ 그래?”
“응...”

그녀가 가장 난감할만한 질문은 내가 먼저 선수를 쳐 대답해주었다. 괜스레 그녀에게 미안
했다. 팔자에도 없는 고딩 노릇하기가 그녀로서는 너무나 힘이 들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
지만 나름 재미가 있기도 했다.

“야! 근데 왜 자꾸 니가 대답을 해?”
“왜? 뭐? 내가 하면 어때?”

어린 두 남자의 유치한 장난질이 우스웠던지 나이 많은 두 여인들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야! 너 그거 봤냐? 이번에 서태지와 아이들 캬... 장난 아니지 않냐?”
“끼아~ 서태지! 서태지 완전 좋아...”
“하여가 이번에 가요 톱 텐에서 라이브로 하던데?”
“라이브 아니야...”
“라이브 맞거든?”
“됐어! 서태지 짜지라 그래... 듀스 오빠들이 훨 멋있거든?”
“채영아 넌 서태지가 좋아, 듀스 오빠들이 좋아?”
“나? 난 그.. 그냥 둘 다...”

지금생각하면 시시콜콜했던 것들에 대해 무한한 에너지를 쏟은 기억뿐이었다. 이런 유치한
대화에 그녀는 아마도 속으로 우리를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대중문화에서 완전히 멀어
진 나이는 아니겠지만 우리와 같은 10대만큼이나 관심이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말이다.

“자! 한 잔씩들 쭉 하자고!”

잔을 부딪치고 각자 받아 낸 술을 전부 비워내기 시작했다. 사실 집에서는 그녀를 생각하며
소주를 홀짝거리기는 했지만 막상 술집에 와서 이렇게 술을 마시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녀
도 석민이 주는 술잔을 곧잘 받으며 마셔내고 있었다. 나는 더욱 어른이 되고 싶었다. 만약
내가 어른이었다면 그녀는 나의 추파를 뿌리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미성
년자인 나를 아낀다면 아낀다고 생각 할 뿐이었다. 어른이 되지 못한다면 어른의 흉내라도
내야 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뭐냐? 너?”

석민이 담배갑과 나를 번가르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긴 새꺄... 형이 담배를 배웠다. 늬 형수 때문에...”
“지랄을 하세요... 찌질아...”

“아 왜~”
“노인네냐? 한라산이 뭐냐 한라산이! 쪽팔리게......”

불을 붙이려다 말고 나는 석민이 꺼내 놓는 담배갑에 눈길이 갔다. 확실히 한라산의 디자인
보다 훨씬 강렬하고 매혹적인 담배갑엔 필터의 색도 달랐다. 주위의 테이블을 둘러보며 올
려진 담배갑을 보자 하나같이 말보로에 마일드세븐, 살렘과 같은 외산담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 씨... 쪽팔려...’

나는 한라산이라는 담배가 가장 좋은 담배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담배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 트랜드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전에도 말을 했지만 나는 고집이 있다. 사실 석민이 태워내고 있는 말보로란
담배가 궁금했지만 나는 꿋꿋이 한라산을 고집했다.

“어허! 이 어린 녀석들이... 누나들한테 묻지도 않고!”

지켜보던 민영은 장난스레 나이 운운하며 나무라는 척 했지만 역시 석민의 담배를 꺼내 물
더니 멋들어지게 담배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석민도, 민영도 둘 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언제 배웠는지 너무나 능숙
하게 담배를 피워내고 있었다. 확실히 고등학생과 중학생은 한 살 차이지만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이 다른 것이라 생각됐다.

‘피~ 우리 채영이한테 다들 혼날라고... 어디서 어린것들이래? 어디서...’

나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버렸다. 나도 이렇게 웃긴데 그녀는 얼마나 웃길까 생각을 하자 웃
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이렇다 할 대꾸도 없
었다. 무척이나 조용한 요조숙녀처럼 그저 맑은 웃음과 차분한 음성만을 내어 놓고 있었다.

‘어린 놈들...’

주제 없는 대화와 쓸데없는 화제안으로 그녀는 섣불리 들어오지 못했다. 나이도 나이었겠지
만 피곤함이 밀려오는 듯 작은 하품을 하며 맥주만을 홀짝이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러자 그녀 역시 손에 힘을 주어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표시를 했다. 이미 세 번째 피처를
비우고 네 번째 피처가 들어올 때였다.

“아... 씨발... 단속! 단속 떴어! 단속!”

갑자기 술집 분위기가 전쟁통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잽싸게 비상구로 뛰쳐나가는 사람들이
뒤엉켜 욕과 비명이 마구 오가며 순식간에 많은 인파가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첫사랑 - 8부

담배 한 개피... 소주 한 잔...
그리고 진한 블랙커피 한 잔...
그녀로 인해 내가 학창시절 배운 것들이다. 물론 첫사랑과 애타게 힘든 짝사랑도 함께 배웠
지만 지금은 그 감정이 많이 퇴색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17살의 내겐 오로지 그녀만이 나
의 관심사였고, 그녀만이 나의 삶의 원동력이었다. 그녀만이 진심으로 날 웃게 했고 그녀만
이 나만의 사랑이었다. 그녀로 인해 잃은 것은 없었지만 그녀로 인해 얻은 것은 너무도 많
았다.

“아저씨, 한라산 한 갑만 주세요”
“아빠 심부름 왔구나? 녀석... 아버진 안녕하시지?”

1994년 그 땐 학생이 교복을 입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술과 담배를 살 수 있었다. 단, 부모
님 또는 집안 어른의 심부름이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어찌보면 참 좋았던 시절이었다. 지
금처럼 팍팍하지도 않았고 지금처럼 황량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까진 놈들이라 해도 하나같
이 하던 말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니까....’

우습다. 우리 동네니까 나쁜 짓을 하면 안 되었고, 우리 동네니까 부모님의 귀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을 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지금이야 단골집 아니면 이웃에 누가 사는지 모르지
만 그 땐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예의 없다고 혼나던 젊은이들이 꽤 널려 있었다. 지금처럼
세상이 겁날 정도로 병들지도 않았었고, 지금처럼 어른들이 아이들을 방관하던 시절이 아니
었다. 최소한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어른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 했고, 어른들 역시 어
른답게 행동하고 타일렀다. 최소한의 한국적인 삶의 정취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름방학의 마지막 자락을 그렇게 보내고 있었다. 맛도 모르는 술과, 멋도 모르는 담
배와 머릿속은 온통 채영이라는 여자로 가득 메운 채 힘겹고도 고독한 날들을 지내고 있었
다. 꼴에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사랑을 한답시고 각종 모든 꼴값은 다 떨었던 것 같다. 그러
나 그 어릴 때의 나의 가장 큰 고민은 그녀였고, 가장 큰 고통도 그녀였다. 그녀 때문에 나
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도 빨리 배우고 흉내를 냈나 보다.

그 날 이후 나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잘못을 빌기 위해 찾아가도 그녀는 문을 열어주지 않
았고 남편이건, 그 남자 건 하룻밤을 불사르는 고약한 신음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루가 멀
다하고 내려다본 그녀의 창은 굳건히 잠겨 있었고 야속한 커튼도 빛 한 점 허락하지 않을
듯 완벽하게 가려져 있었다.

그녀가 멀어졌다는 생각에 마음 가눌 길이 없어졌다. 엄마 몰래 술을 마시고 아빠 몰래 담
배를 피웠다. 생전 먹지 않던 블랙커피를 진하게 마시고 보이지도 않는 그녀의 창을 매일같
이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석민이 친구 성현인데요... 석민이 집에 있나요?”

아마 이런 멘트를 요즘 아이들은 날려보지 못했을 것이다. 요즘처럼 휴대폰도 없었고 오로
지 연락할 통로라고는 집 전화 뿐이었지만 그 때의 불편함은 나름의 추억을 만들어주었다.

“석민이 여자 친구 만나러 나갔나본데?”
“아.... 예...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석민에게 내 모든 것을 쏟아부으려 했지만 그것 또한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그 녀석, 분명히 민영과 어느 여인숙에 가서 그 커다란 유방을 빨며 익숙치 못한
어른흉내를 잔뜩 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부럽다... 새끼....’

부러웠다. 석민이 죽도록 부러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쭉쭉빵빵 미녀를 매일같이 벗겨 놓
고 취할 수 있는 그가 너무나 부러웠다. 내가 채영에게 빠져 그를 멀리 한 것도 있었지만
그 역시 민영에게 빠져 꿈속 꽃밭에서 뒹굴던 때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소원해지
고 있었다.

“성현아... 밥 먹어~”

늦은 점심시간 엄마의 말소리에 애잔했던 마음이 조금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마치 좀비
처럼 헬쓱한 몰골을 해가지고는 식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고 국을 떠 입안으로 넣었다.

“팍팍 좀 먹어~”
“아~ 몰라... 입맛 없어~”

대충 식사를 때우는 동안 엄마도, 나도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엄마는 시무룩하고 더욱
말수가 줄어든 나의 눈치만 보는 듯 했다. 괜히 사춘기로 예민한 아들을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아는 듯 했다.

“잘 먹었습니다.”

대충 밥을 먹은 것과 같이 대충 잘 먹었다는 인사를 하고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버
릇처럼 침대 위로 몸을 날려 누워버렸다. 자려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었
다. 그저 몸에 힘이 빠져 힘이 들었을 뿐이었다.

‘누나는 뭐 할까?’

병이었다. 이쯤되면 병이라고 일컬어도 될 듯 했다. 앉으나 서나 그녀생각, 밥을 먹으나 똥
을 싸나 그녀생각 외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 나였다.

그녀가 너무나 보고싶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 날처럼 그녀에게 느닷없이 몸을
던지는 실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후였다. 실수의 사과도 그녀를
봐야만 할 수 있는 것이고, 무릎을 꿇더라도 그녀가 만나줘야 가능한 것인데 그녀는 나를
피하고 또 피했다. 그럴수록 나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입맛도 없고 그 어
떤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나는 장롱 위에 올려 둔 잠망경을 꺼내들었다. 검은색 도화지로 만들어진 그것은 언제부터
인지 꺼내보지 않은 것이었을 뿐더러 제대로 사용 한 번 해보지 못 한 역작으로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하얗게 먼지 묻은 그것을 들고 창가로 다가가 가만히 내려보았
다. 역시 아이보리색 커튼이 굳게 쳐진 창만을 확인하고 다시 그것을 끌어올렸다.

“씨발!”

작게 욕을 읖조렸다. 미칠것만 같은 정신에 돌아버릴 것 같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그 때 그
녀를 겁탈 했더라면... 차라리 그랬다면 이토록 힘든 마음을 지니고 살진 않았을 것이란 생
각에 더욱 답답해져왔다.

나는 잠망경을 단번에 일그러뜨렸다. 이까짓 것 더 이상은 내게 불필요한 물건이 되어버렸
다는 생각에서였다. 닫혀진 그녀의 창은 열리지 않고, 그녀의 마음 또한 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답답해... 미치겠다...”

나는 다섯 장이나 되는 그녀의 팬티를 꺼냈다. 그리고 엉덩이 부분은 잠자리의 날개처럼 훤
히 비치는 민트색의 팬티를 집어 들었다. 왠지 그것을 입으면 마음이 한결 나아질 것 같은
느낌에서였다.

원래 입고 있던 검은색 팬티를 벗어두고 산뜻한 민트색의 팬티로 갈아입었다. 역시 다리를
스치는 그 여린 느낌이 단숨에 자지는 고개를 들었고 그녀의 팬티들 사이에서도 유독 짧은
민트색 팬티를 끌어올렸다. 역시 커진 자지를 절반도 덮지 못하는 팬티였다. 그 위로 다시
반바지를 입고 주머니엔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넣었다.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팬티를 갈아 입기는 했지만 다른때와는 달리 별 소용이 없었다. 오
히려 답답함만이 가중되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것이라는 물건에 호기심을 잃은 것일
수도 있었고 나의 변태성이 아주 자리를 잡은 것일 수도 있었다. 벌써 몇 개월째 그녀의 팬
티만을 고집하며 입고 다니는 내 모습이 어처구니 없지만 변태로 봐도 무관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엄마~ 나 나갔다 올게~”

대답도 듣지 않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햇볕이 가장 따가운 오후 집을 나서자마자 푹푹 찌는
더위에 금세라도 탈진해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대문을 열고 나가려다 그녀의 창문
을 바라봤다. 미세하게나마 불빛이 퍼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고 다시 대문을 닫은 채 멍하니
그녀의 안방을 바라보았다.

‘있다... 누나가 있어...’

나를 피해 어디론가 떠났나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3주가 다 되는 시간동안 우연이라도 한
번을 마주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집에 있었다. 오기로라도 나는
그녀를 만나야만 했다.

그녀의 현관 앞에 다다른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목적 없이 나선 발걸음을 붙잡은 건 그녀
의 느낌이었지만 나는 그 붙잡는 발걸음 앞에 무턱대고 망설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떨렸다.
문을 두드리면 또 다시 그녀가 외면을 할 것 같았다. 외면까지는 괜찮았다. 그녀가 나를 멀
리한다는 것 자체가 망설이게 할 뿐이었다.

‘제발... 제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마음을 다 잡고 용기를 내어 그녀의 현관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똑! 똑!! 누... 누나....”
“..................”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작고 소심하게 그녀
의 문을 두드린 것 같아 다시 한 번 종점보다는 크게 그녀를 불렀다.

“똑! 똑! 똑! 누나~~~~”

현관의 불투명한 유리로 사람의 형상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서 나처럼
망설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나... 성현이예요... 잠깐만 얘기 좀 해요....”

떨리는 음성이라는 걸 느꼈다. 그녀에게 지은 죄가 많아 너무도 간절하게 그녀를 부르고 말
을 했기에 당연한 결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나의 진심은 통했는지 잠시 후 문고리가
열리는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그리고 조심스레 문이 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그녀의 눈가가 촉촉했다. 그리고 그녀의 음성 역시 떨렸다. 지난 일이 떠오른걸까? 그녀가
울상을 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나는 그 어떤 추측도 하기 힘들었다.

“누나한테 사과하려고요~”
“....... 알았어... 그것 때문이라면 그만 가줄래?”

그녀가 다시 문을 닫으려 하는 걸 나는 팔부터 문틈사이로 집어넣어 막았다.

“자.. 잠깐만요 누나...”
“왜?”

그녀의 말투는 몹시 정적이었다. 목소리의 크기도 일정했고 톤도 현저하게 낮았다. 게다가
하얀 얼굴이기는 했지만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초췌해보이기도 했다.

“누나, 나 그때처럼 나쁜 짓 안할게요... 잠깐만 들어가게 해줘요”
“왜?”

“몰랐어요... 누나 못 보니까 미쳐버릴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냥 누나 볼 수만 있게.. 해주
세요”
“다... 다음에... 오늘은 나 혼자 있고 싶어...”

다시 문이 닫히려 할 때 나는 머리부터, 그리고 몸뚱이까지 그녀의 집으로 비집고 들어갔
다. 그러나 그녀는 못 들어오게 막지도 않았고 싫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
굴과 힘없는 몸짓으로 뒤돌아 소파로 걸어 들어갔다.

나는 현관문을 닫고 그녀의 거실로 들어섰다. 모든 창엔 커튼이 쳐져있고 안방외엔 실내등
이 전부 꺼져있었다. 비록 두껍거나 어두운 커튼은 아니었지만 갑갑하게 가려진 그녀의 집
은 좋게 말하면 아담해보였고, 조금 나쁘게 말하면 답답하고도 음침했다.

“음료는 꺼내 마셔~ 내가 힘이 없어서 그래...”

화가 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내가 느
낀 그녀는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누나~ 어디 아파요?”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를 바라보다 괜히 뻘쭘해진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콜
라를 집어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그리고 커피포트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을 살짝 씽
크대로 흘려보았다. 역시 끓어있는 물이었다. 그리고는 마치 우리집인 것 마냥 찬장을 뒤져
항상 마시던 파카글라스 잔을 내리고 그 옆의 인스턴트 커피를 두 스푼 덜었다. 그리고 물
을 부어 커피를 녹인 뒤 냉동고의 얼음을 넣어 차게 만들었다.

“누나도 커피 한 잔 줄까요?”
“그래~”

무성의 하면서도 무심한 말투, 그녀... 뭔가 이상했다. 항상 활기차고 따뜻하며 부드러운 느
낌만 주던 그녀였는데 왠일인지 그녀에게 냉한 기운이 가득 뿜어지고 있었다. 물론 내가 그
런 따뜻한 기운을 기대하는 것이 욕심이란 걸 알지만 그녀가 달라져도 너무 달려져 있음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두 번째 잔을 만드는 동안 그녀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무얼 하는지 물소리만이 은
은하게 울려 퍼졌다. 나름 갈등이 됐다. 다시 나의 정액이 듬뿍 담긴 커피를 마시게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을 보고 또 다시 발정난 개새끼마냥 그녀에게 달려 들것 같은 욕정이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미 뒷전이었다. 눈치를 보며 이미
자지를 꺼내 세차게 흔들고 있는 나였다.

‘누나... 조금만... 조금만.....’

무언가에 쫒기는 심정으로 물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액이 뿜어져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
고 다행히 물소리가 끊기기도 전에 자지에서는 희멀건 액체가 힘껏 뿜어지고 있었다. 한동
안 자위를 하지 않은 탓인지 그 날보다 훨씬 많은 양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우... 후우....’

빠른 시간에 정액을 싸지른 나는 대충 씽크대에 있는 행주로 남은 정액을 닦아내고 바짓단
을 고쳤다. 그리고 몽글몽글한 정액 위에 역시 두 스푼의 커피를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휘
저었다. 역시 물과 기름처럼 좀처럼 섞이지 않는 정액이었다. 정액을 빼낼 때처럼 빠른 손
놀림으로 스푼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곧 물소리가 그치고 그녀가 말끔히 세수를 한 모습으로 화장실을 나서고 있었다. 움찔한 나
였지만 그녀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시 소파로 가서 힘없이 쓰러지듯 몸을 내맡겼다.

‘이상한데?... 이상해...’

스스로 갸웃거리게 만드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표정을 해서는, 무게감 있는 행동에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할 정도였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애써 정액을 녹여내고 있는 중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전화벨소리가 들렸다. 벨소리가 들리자
마자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 역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으로 표정이 바뀌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조금은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망설이는 듯 한 표정이었다.

“누나~ 전화... 안 받아요?”

시끄럽도록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묻자 그녀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안방
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그녀의 눈빛이 이상했다. 내가 그녀의 집에 갔을 때 그녀는 단 한번도 문을 닫고 전화를 받
은 적이 없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안방으로 다가가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바쁘다며...”

“어쩔 수 없다면 다야?”

“한 두 번이 아니니까 더 그런거지~”

“아~ 몰라”

“모른다고!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대답만을 늘어놓는 그녀였다. 추측 불가능한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
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다시 훌쩍이는 듯 목소리가 떨리며 코를 들이마시는 소리도 들렸다.

‘그 남자가 바람을 피웠나?’

“몰라! 오빠 미워... 계속 이럴 때 마다 오빠한테 정나미가 떨어진다구!”

“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됐어! 마음대로 해!”

수화기를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번개같은 속도로 다시 씽크대 앞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목
소리엔 원망과 절망이 가득 담긴 것 같았다. 곧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고 커피안의 정액도
어느 정도 녹아내린 느낌이었다.

“누나~ 이거...”
“고마워....”

그녀가 눈가를 추스르며 내민 커피잔을 잡았다. 잠시 잠깐이지만 그녀의 보드라운 손이 스
쳐갔고 나는 다시 욕정의 고개가 치솟는 것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그녀와는 조금 멀찌감치
자리에 앉았다. 욕정을 다스리기 위한 작은 방편 중에 하나였다.

커피를 한 모금, 또 한 모금 넘기는 그녀를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그것 또한 지난 후회스
러웠던 일을 방지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나도 속이 갈증을 느낄 때 마다 소리 없이
쌉싸름한 커피를 목구멍으로 넘겼고 그 시원함이 불난 속마음을 조금은 진정시켜주는 것 같
았다.

“커피맛 어때요?”
“맛.. 있어.....”

“그... 그래요? 다행이다...”
“근데, 뭐 넣었어?”

“아... 아뇨? 커피 밖에 안 넣었는데...”
“그래?”

“왜... 왜요? 뭐... 이상해요?”
“아니, 그냥 뒷맛이 좀 이상해서 아무튼...”

그녀는 잠시 커피를 들여다보는 듯 하더니 다시 한 모금을 넘겼다. 괜히 찔리는 마음에 말
까지 더듬던 나는 그제서야 떨리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근데... 누나, 무슨 일 있어요?”
“어? 아... 아냐... 아무것도...”

그녀는 무언가를 숨기는 척 놀라기도 했고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
다. 하지만 쉽게 그것을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이런 말...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

그녀가 내게 눈을 맞췄다. 사랑스런 그 눈빛을 다시 보자 그동안 불안했던 심정이 어느 정
도 안정을 찾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 남자, 바람폈죠? 맞죠?”
“그... 남자... 너.... 봤니?”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죄송해요... 보려고 한 건 아닌데....”
“진짜 다 봤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도 그녀도 아무 말 없이 애꿎은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실수로 그녀를 아픈 게 한 날의 말이 믿기지 않았던 그녀였었나 보다. 다 봤냐는 말
을 연거푸 묻고는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뒤 다시 대화는 이어졌다.

“비밀로 할게요... 걱정 마세요”
“그래, 고맙구나~”

“그리고 그걸 빌미삼아서 누나한테 나쁜짓 하는 짓은 또 없을 거예요...”
“그것도 고마워...”

그녀의 안색이 완연하게 창백해져갔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의 의구심은 점점 더
커져가고만 있었다.

“누나 첫사랑이예요?”
“.................”

“그... 그냥... 누나가 너무 좋아하길래... 나도 누나를 좋아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그 아저씨
가 부럽기도 하고.... 뭐....”
“................”

괜한 걸 물었나라는 마음에 이렇게 저렇게 엮어 무슨 말이든 토해내는 나였다. 하지만 그럴
수록 의구심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다.

“제가 또 괜한 걸 물었네요...”
“아니야... 성현아~ 혹시 네 첫사랑이 나니?”

“..........네..............”
“어때? 첫사랑의 주인공인 내가 이렇게 나쁜 여자인데... 그래도 좋니?”

그녀가 두 다리를 모아 끌어안으며 나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부
끄럽고 염치가 없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나를 피했다.

“솔직히 말해도 되요?”
“응... 나는 솔직한 대답을 원해~”

그녀의 질문이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나의 아름다운 첫사랑을 아주 보기 좋게 죽사발로 만
든 장본인이기도 한 그녀이지만 그런 그녀를 여전히, 아니 더 많이 좋아하고 사랑하게 된
나의 가슴은 그렇게 미어지고 있었다.

“솔직히... 솔직히... 누나 안 좋아하려고 했어요. 내 눈에 비친 천사가 악마처럼 행동하고
있었어요... 정말 그런 누나가 싫었는데, 내가 싫어하는 것에 수백, 수천배로 누나가 좋아졌
어요...”
“미안하구나~ 성현아... 네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그녀가 눈물을 떨구었다. 그 남자에게 농락당하면 흘리던 눈물과는 현저하게 다른 느낌의
눈물이었다. 그녀의 눈물에 나 마저도 눈물이 흘러 나올 것만 같았다. 최소한 그녀의 눈물
과 사과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는 최대한 능숙하게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그녀는 분명히 담배를 무는 나를 보았다. 하지만 놀라는 기색도, 말리려는 움
직임도 없었다.

“누나 때문에 배운 거예요...”
“나도.... 하나만 줄래?”

담뱃갑과 라이터를 밀어주자 정말 능숙한 손놀림으로 담배를 뽑아 무는 그녀였다. 멋있었
다. 둘의 담배연기가 집안을 메우는 건 금세였다. 길게 내뿜어대는 그녀의 담배연기가 길게
내뿜어지고 반쯤 감긴 그녀의 옆모습은 퇴폐적이면서도 음란한 기운이 솟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멋있었다. 반면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애써 누그러뜨리는 내 모습과는 너무
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갈수록, 알수록 누나가 좋아져...”
“후훗! 나 좋아할수록 마음만 다쳐... 그만 해...”

“싫어! 나 다쳐도 상관없어... 누나만 있으면 돼! 너 채영이 너만 있으면....”
“....................”

담배를 피워내는 속도마저 그녀는 나를 능가했다. 테이블 아래서 꺼낸 재떨이에 담배를 비
벼끄고 난 그녀는 나에게 재떨이를 밀어주었다.

“난, 그저 이렇게 누나랑 얘기하고 누나 얼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

“그러니까 나보고 그만 좋아해라 마라 그런 말 하지 마...”
“후흣... 아직 애기 맞잖아~”

나는 의식적으로 그녀에게 반말을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반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나를 아이 취급하고 있었고 난 그런 그녀에게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내세우고 싶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알기 쉽게 말해줘 누나!”
“성현아... 사랑이라는 게 뭐라고 생각하니?”

나는 선뜻 사랑의 정의에 대해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그녀를 홀려 낼 수 있을 정도로
심오하고 멋지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막상 떠오르는 말들은 전부 1차원적인 것들 뿐이었다.

“..................”
“사랑이라는 게... 겪어보니까... 네 나이 때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호락호락한게 아니야”

“그게 무슨 대수야? 그냥 좋으면 좋은거지!”
“그러니까 네가 아직 어리다는 거야~”

그녀의 말에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자꾸만 어린 아이 취급하는 그녀에게 무언가 증명을
해보여야만 했다.

“이거 봐! 이거 보라고! 자지에 털도 났고 그 남자 자지보다 훨씬 더 커!”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바지와 팬티를 단숨에 무릎까지 끌어 내렸다. 미쳤다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이로 극복하지 못 할 것이라면 신체로라도 우기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계획대로 무릎까지 내려진 벌거벗은 하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길
이 와 닿자 늘어져 있던 자지는 단숨에 배꼽까지 올라서 버렸다.

“바보, 그거라면 벌써 봤어... 어서 바지 입어...”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너무도 덤덤했다. 무식해 보일정도로 울퉁불퉁하고 커다란
자지를 보고도 그녀는 놀란 기색하나 없이 의연하기만 했다. 나의 예상과는 정 반대로 그녀
의 반응은 거의 없었다.

‘아~ 쪽팔려......’

바지를 주워 입으면서 나는 또 다시 끝없는 후회를 해야만 했다. 왜 야설처럼, 야동처럼, 그
리고 삼류영화처럼 놀라며 자지를 흠모하지 않는가에 대한 원망만을 가득하며 다시 소파에
앉아버렸다.

“도대체 왜 나를 안 좋아하는 거야?”
“나도 너 좋아해...”

“근데, 왜.........”
“....................”

할 말이 없었다.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
“왜 좋아하면? 섹스라도 해야 하는 거야?”

“..............”
“그러니까 넌 아직 어린거야... 좋아한다고 섹스하면... 아니다, 그리고 난 섹스 같은 거 좋
아하지 않아!”

단호하게 말을 하는 그녀였다. 특히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 그 말을 나는 선뜻 받아
들일 수가 없었다. 남편과의 섹스를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 남자의 품안에서 자지러지던
그녀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 남자는 뭐야? 어? 도대체 그 남자는 뭔데 누나를...........”
“그 남자? .............. 불쌍해서야...”

“불쌍해서 섹스를 해준다고? 그게 말이 돼?”
“나한테는 돼!”

“그럼, 그 남자는 누구야? 누군데 누나한테 그렇게 불쌍한 사람이야?”
“그.............”

그녀는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도대체 누구냐고! 누군데......”
“그 남자? 나 없으면 죽을 사람...”

“나도, 나도 누나 없으면 죽어... 죽는다고....”
“까불지 마!”

“정말이야 누나... 누나 못 보는 동안 죽어버릴 것 만 같았다고....”
“그건, 첫사랑이기 때문이야...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 질거야... 아니, 후회할걸? 아니, 날 손
가락질 하면서 미친년 취급할 걸?”

속 시원히 말을 풀어내지 않는 그녀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뭐가 얼마나 불
쌍하길래 자신의 몸 마저 바쳐가며 그 남자를 위로한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
둘이 아니었다.

“아니, 안 그럴거야... 내가 왜 누나를 욕하고 그래? 난 절대 안 그럴거야”
“................”

그녀가 그다지도 독한 표정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마치 다른 사람과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
상처 많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누나, 왜 그래... 내가 알고 있는 누나의 모습이 아니잖아~”
“네가 알고 있는 내 모습은 어떤건데?”

“따뜻하고, 생기있고, 부드러운 모습”
“너, 정말 나 좋아해? 사랑해?”

날 좋아하고 사랑하느냐고 묻는 여자의 모습이 그토록 애처로운지 처음 알았다. 언제나 핑
크빛 감정 아래서만 묻는 줄로만 알았던 그 물음이 어찌나 서리 내린 초겨울의 새벽녘처럼
싸늘하던지 차마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마음마저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으... 으응!”
“그래? 너 후회 안할 자신 있어?”

“안해! 남자가 후회는 무슨! 난 말 했듯이 누나만 있으면 돼!”
“네가 말한대로 난 따뜻하고, 생기있고, 부드러운 여자가 아니라도?”

“됐어! 그런 건... 난 그냥 채영이라는 여자로 족해! 남편이 있고 또 다른 애인이 있어도 누
나라는 여자로 만족한다고!”
“그럼 당장 오늘부터 사귀자! 내가 얼마나 밉고 저급한 여자인지 보여줄게! 그래도 후회 안
할거지?”

“후... 후회안해....”
“알았어... 이리 와~”

대답은 했지만 뒷맛이 개운치는 않았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왠지 후회할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들고 있었다.

‘무... 무서워...’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 곁으로 다가가자 그녀가 너무도 부드럽게 날 안아주었다. 아니, 내게
안겨왔다. 여린 여체가 파르르 떨며 그 연약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누.. 누나...”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이렇게 안아 줘....”

차마 그녀의 가슴을 만진다던가, 그녀의 몸을 느낄 마음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작고 동
근 어깨를 감싸 쥐고 토닥거림을 해 주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일 같았다. 그리고 곧 그녀
는 작은 떨림부터 시작된 커다란 떨림까지 이어지며 한 것 마음속 울분을 토해내듯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채.. 채영아... 사랑해... 너의 가슴 아픈 상처... 내가 모두 감싸줄게...’

그렇게 한 시간이나 넘게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위로했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녀의 눈은 퉁
퉁 부어 버렸고 끝없는 설움을 내뱉은 그녀는 혼절한 듯 나의 무릎을 베고 잠에 빠져들었
다.

‘넌 이제 내 여자야 채영아...’

그녀의 이마부터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맨 무릎에 닿는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나를
흥분시켰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뜨겁기까지 한 열기가 입술에 고스란히 와 닿았
다. 도톰하게 올라온 이마와 내리 깔은 속눈썹, 화장기 하나 없는 투명한 피부... 도대체 이
여자를 어딜 봐서 서른 둘로 보겠는가?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는 한없이 그녀를 내려
다보았다.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그리고 사귀기로 한 이상 이젠 그녀에 대한 욕정의 씨앗이 사라
진 듯 했다. 그렇게 뜨겁게 불타오르던 성욕은 사라지고 고요하고 투명하고도 순수한 사랑
이 싹트는 느낌이었다.

‘예쁘다....’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그녀였다. 그토록 모질게 말하더니 자는 모습은 정말 어린아
이 같았다. 쌔근쌔근 잠든 그녀의 착한 모습에 도대체 무슨 아픔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아무런 의구심 따윈 가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냥 이대로 좋았다.

“깼어?”

그녀가 부스스 눈을 뜨고 있었다. 작은 손목으로 눈을 비비며 작은 하품까지 해내더니 곧
부끄러운지 미묘하게 수줍은 웃음을 번지며 내 얼굴을 돌려냈다.

“나 얼마나 잤어?”
“한 시간정도?”

“그렇게나 오래 잤어? 이 상태로?”
“응”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서려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
의 어깨를 지긋이 누르며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그녀는 눈을 살짝 흘기는 듯 하더니 이내 맑은 웃음을 보내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나는
참을 수 없어 다시 그녀의 이마에 간결하게 키스를 해주었고 그녀는 두 눈을 살포시 감았다
가 다시 떴다.

“뭐야... 너... 누가 마음대로 뽀뽀하래?”
“우리 사귀는 거잖아... 누나가 그랬잖아~”

“누나? 사귀는 사람한테 누나라고 하냐?”
“채... 채영아...”

“어흐~ 닭살! 싸가지 없는 녀석아! 15살이나 많은 누나한테 채영아가 뭐니?”
“그럼 뭐라고 불러~”

“채영씨?”
“그게 더 웃기잖아~ 됐어! 나 그냥 이름 부를래!”

한바탕 웃고 나니 이제 그녀가 정말 내 여자가 된 것 같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이러고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은 꿈에도 하지 못했던 나였다. 그리고 한숨 자고 일어
난 그녀의 기분도 졸음과 함께 한숨 달아난 느낌이었다. 그녀의 말투가 가벼워졌고 생기있
는 얼굴도 다시 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몇시야?”
“한 5시?”

먼저 추측한대로 말해놓고 시계를 바라보니 이미 5시가 넘어 있었다.

“이제 새로운 내 애인 마음 아프게 좀 해 볼까?”
“어? 어떻게?”

“이제 그만 올라가시죠? 애인님? 우리 남편 올 시간이예요... 우리 남편 밥해줘야 해요”
“쪼... 쫌만 이따 하면 안 돼?”

“안돼~ 원래 2시쯤 오는데 오늘만 늦은 거야~”
“뭐.. 뭐야... 칫!”

“그리고 우리 남편, 내일은 하루 종일 집에 있지요~ 헤헷!”
“그럼 내일은 못 봐?”

“보더라도 잠깐 봐야겠지?”
“아~ 뭐야....”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았다. 이토록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가
또 있을까 생각해면서 말이다. 그녀는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며 남편이야기를 했지만 나
는 전혀 속이 상하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게 내가 사랑한 그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
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침대에 누워 미친 듯이 발악을 했다. 너무 기뻐 발을 구르다가
뒷꿈치가 침대 모서리에 찧이기까지 했지만 그마저도 즐거움이었다.

‘하아... 채영이랑 이제... 흐흐흐흐’

그녀와의 관계가 진전된 것에 무한한 기쁨을 즐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들어오
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남편도 있고, 그녀가 그토록 불쌍히 여기는 남자도 있었다. 엄연
히 따지면 나는 세 번째 남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남편과 사이가 좋았을 뿐더러 그
남자와의 관계는 아직 잘 모르지만 불쌍한 동정의 마음이라면 언제든지 용서를 해 줄만한
여지가 남아 있었다. 어찌 보면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한 여자를 사이좋게
나눠 가질 수도 없을뿐더러 그녀의 마음 역시 공평하게 3등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왜 갑자기 나한테 사귀자고 한거지?’

그것 또한 이상했다. 그녀에게 너무 슬픈 일이 있어서 돌파구가 필요했던 건지, 아니면 나
만큼 그녀도 나를 좋아하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황홀함에서 깬 내겐 또 다른 골칫거
리가 생겨나 버린 것이었다.

‘에이... 뭐... 어때? 나랑 사귀다 내가 더 좋으면 확 가로채버리면 되지~’

어린 내겐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주위가 어떻건, 다른 사람의 이목이 어떻건 간에
나이, 유부녀, 삼각관계 같은 단어들은 그저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들이라 확신했다.

‘좋은 기분은 마음대로 즐기라고 있는거야.... 흐흐흐흐’

연신 떠나지 않는 웃음을 뒤로 하고 나는 간만에 책상 앞에 앉았다. 연습장 가득 그녀가 수
놓여져 있고 말도 안 돼는 잠망경의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또 말도 안 되는 글귀며, 사
랑이라는 자작시도 우습게만 보였다.

‘공부도 잘 돼...’

간만에 펼친 책의 글귀가 어찌나 머릿속에 콕콕 박히는지 이대로라면 서울대는 따 놓은 당
상처럼 생각됐다.


하루하루가 즐겁다 못해 기쁨의 나날이었다. 그녀와 할 수 있는 고1의 여름방학이 너무도
짧게만 느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남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그저 아쉬움으로 남고 있었
다. 하루가 멀다하고 그녀의 집에 내려가 그녀와 속삭였고 또 하루가 멀다하고 그녀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다시 그녀의 커튼과 창문은 그녀의 마음처럼 활짝 열렸지만 그녀의 고
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내겐 다행이었다.

“야! 강성현! 너 그 팬티 좀 이제 안 입을 수 없어?”

그녀의 남편이 출근하기만을 기다렸다 쪼르르 달려 내려간 나였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나를 붙잡아 다짜고짜 반바지를 당겨 팬티를 확인한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싫어... 싫어...”
“너 변태니? 왜 여자 팬티를 그렇게 입고 다녀~”

“좋으니까!”
“너만 좋으면 다가 아니잖아~ 내 생각도 좀 해 줘야 하지 않아?”

“아~ 왜~~~ 부드럽고 쫙 조이는 맛이 얼마나 좋은데...”
“너, 변태지? 그치?”

“그래... 변태다... 그러지 말고 팬티 몇 장 더 줘”
“아휴... 못 말려~”

나는 이미 개켜놓은 빨래더미에서 그녀의 팬티 두 장을 이미 주머니 속에 우겨넣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며 달려들어 자신의 속옷을 사수하는 그녀였지만 나는 온 몸으로 그녀를 막아
서며 흰색의 보드라운 팬티와 무지개 무늬의 알록달록한 면 팬티를 지켜냈다.

“난 채영이 팬티가 너~무 좋아~”
“변태!”

“괜찮아~”
“뭐가 괜찮아!”

장난이라지만 그녀가 나의 자지를 툭 건드려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부풀리며
입고 있는 팬티 바깥으로 우뚝 솟아버리는 자지였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반바지를 내리
며 우스꽝스레 삐져나온 자지의 절반을 그녀에게 내보이며 다가섰다.

“이거 책임져! 방금 니가 이렇게 만든거야!”
“빨리 올려~ 징그러워~”

“책임져... 책임도 못질거면서 왜 흥분을 시켜?”
“어흐~ 망측해라~ 넌 창피한 것도 몰라? 빨리 안올려?”

달려오듯 다가선 그녀는 어린아이 바지 입히듯 나의 반바지를 추켜 주었다. 그리고 그 고운
손으로 삐져나온 자지를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느낌과 함께 잠자고 있던 욕정이 폭발하기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채영아... 우리 한 번만 하자~”
“쬐끄만 게 어디서... 더 크면!”

“무슨 사귀는 사이가 이러냐? 아니면 입으로라도... 어때?”
“으이그!”

결국 그녀에게 꿀밤 한 대를 얹어 맞고 난 후에 나는 포기를 해야만 했다. 작은 그녀의 주
먹은 보기보다 너무나 매웠다.

“얼마나 더 커~”
“야! 생각해봐라 요즘 애들이 빠르다지만 넌 너무 빠른 거 아니니?”

“이 아줌마가 뭘 모르는 아줌마네? 내 친구들은 벌써 딱지 떼고 지금은 휘두르고 다녀”
“뭐? 아줌마? 쳇! 그래... 이 아줌마는 어린이 정신 건강이 걱정스러워 못하니까 딴 데 가서
알아봐~”

“뭐? 어린이?”
“그래... 어린이!”

비록 제대로 된 연인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나는 만족했다. 그녀와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있다
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럼없이 그녀 앞에서 자지를 내어 놓는 일도, 가끔이지만
그녀의 유방을 만지고 엉덩이를 슬쩍 만지는 일도 어린 내겐 커다란 자극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누라~ 밥 좀 주지?”
“뭐? 마누라?”

“아~ 밥 좀 줘... 배고파~”
“기다려!”

엄마가 밥을 차려놓은 밥상을 뒤로하고 부리나케 뛰어 내려온 이유는 그녀와 같은 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기 위해서였다. 밥을 준비하는 그녀의 뒤에 다가가 굳게 서 있는 자지를 엉덩
이에 비비고, 은근슬쩍 그녀의 가슴을 주물렀다.

“저리가!”

온몸으로 밀어내는 그녀를 온몸으로 버텨내며 그녀를 괴롭혔다. 아니 그녀를 사랑해주었다.
비록 깊은 삽입과 뜨거운 육체를 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의 욕정으로 어느
정도 해소를 해주었다. 그리고 머지 않은 시간내에 그녀의 풍부한 속살을 마음껏 느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녀 역시 나의 행위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토실토실탱탱한 그녀의 엉덩이는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옷으로 둘러쳐진 장막이 있었지만
그것을 무색케 할 만큼 육감적이고 풍부한 살점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느끼기 시작한지 5분여 만에 그녀는 식탁에 김치찌개와 따끈한 밥 한 공기를 올렸다.

“어? 누나는 왜 안 먹어?”

다른 때는 몰라도 밥상머리에서만큼은 누나라는 호칭이 먼저 나왔다. 그 이유는 나도 알 수
가 없었다. 부모님께 반말을 하는 사람도 ‘밥 먹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하듯 같은 이유에서
인 것만 같았다.

“응... 난 속이 별로... 혼자 먹어....”

나는 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와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앉았다. 정말 신혼부부
의 식사시간이 이런건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맛있어?”
“응... 진짜 맛있어...”

“근데 성현이 너 면도해야겠다... 코 밑이 거무튀튀하다 얘”
“봤지? 수염이 날 정도로 어른이다 이거지!”

“아직 솜털이거든!”
“아니야... 봐! 봐! 완전 수염이지! 이거 깎으면 새파래질걸?”

“푸흡! 웃기시네! 그것두 털이라고....”
“아~ 진짜, 나의 이런 터프함을 어떻게 설명할 방법도 없고...”

“됐어~ 빨리 밥이나 먹어!”
“응!”

나는 다시 한 수저를 크게 떠서 입안으로 우겨넣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수저 위에 오징어
젓갈을 동그랗게 돌려 올려주었다. 그런 그녀가 몹시 사랑스러웠다. 그 불쌍하다던 그 남자
가 왜 그녀에게 목을 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
리더니 곧 그녀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어? 오... 오빠?”

다급하게 웃음을 감추며 일어선 그녀였다. 그러자 그 남자는 나와 그녀를 번가르며 쳐다보
더니 곧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뭐야?”
“으... 으응.. 윗 집 학생... 얘 엄마가 어디 가신다고 밥 좀 챙겨주라고 하셔서...”

아무리 어른이라지만 사람에게 ‘뭐야?’라는 질문을 하는 건 도대체 어디서 배워먹은 싸가지
인지... 왠지 모르게 그녀는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 나도 밥 좀 줘”
“아.. 알았어... 거기로 앉아~”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지는 나였다. 배불뚝이, 그녀의 옥문을 쉼 없이 들락이던 그 남자, 영
웅처럼 보이기만 했던 그 남자,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불쌍히 여기는 그 남자가 한 식탁에
앉았다. 그녀의 말을 가로채 사귀는 남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그녀가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애써 꾹 참은 나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허리는 36인치정도 될 만하고 얼굴은 거무잡잡한 게 막노동이나 할 것처럼 무식하게 생긴
외모에 키는 그녀보다도 작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밥그릇을 잡은 그의 왼쪽 손목에 선
명하게 드러나 있는 길다란 흉터가 보였다.

‘저건가? 누나가 그토록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자신 없으면 죽을 거라는 말의 증거가 저거
란 말이야?’

최대한 티나지 않게 그의 손목을 살폈다. 역시 그의 손목에 그어진 흉터 자욱은 자해를 한
흔적이 다분해보였다.

“바쁘다더니, 어떻게 시간이 됐나보네?”
“바빠, 밥 먹으려고 잠깐 들른 거야”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지고 있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불쌍함의 동
정 따윈 있어도 이 남자에게 사랑이란 감정 따윈 없다는 것을...

“이봐! 학생!”
“예.. 예?”

“나, 여기 아줌마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빨리 먹고 올라가 줄 수 있겠니?”
“아... 예...”

바보, 바보 같은 놈... 그녀를 지키고 사랑하겠다던 나의 마음은 온전히 거짓이었는지 그의
말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남아일언중천금을 실천
하기라도 할 듯 밥을 거의 마시다시피 비워내고는 이미 그녀에게 인사마저 하고 있었다.

“누... 아니, 아줌마 잘 먹었습니다...”
“어? 그... 그래... 올라가~”

그녀의 눈빛은 울고 있었다. 그렇지만 난 그 울음을 그쳐주지 못했다. 실제로 눈물을 흘리
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맑은 눈망울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