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4일 금요일

소꿉친구 길들이기 - 7부

왔어?
으응...

예지가 방에 들어서자 재혁은 그녀를 한번 힐끔 쳐다보고는 다시 만화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지는 조금 속상했다. 딴에는 신경 쓴다고 있는 옷 없는 옷 끌어다가 갖춰입고 여기까지 온 건데도 재혁은 그녀에게 너무 무심했다. 여기 도착하기 직전까지 혼자서 신경쓰고 긴장하고 있던 자기 자신이 너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가방을 바닥에 쿵- 소리 나도록 내려놓고 책상으로 다가갔다. 무릎 위에서 끝나는 흰색 플레어 스커트 자락을 뒤에서부터 쓸어안듯이 하며 의자에 앉는다. 자리에 앉고 보니 허벅지가 생각보다 많이 드러난다.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모았다.

나 공부한다?
으응. 그래.

만화책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는 재혁의 시큰둥한 대답. 예지는 그런 재혁의 머리통을 보며 생각했다. 한 대 쥐어박을까. 그렇지만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괘씸할 따름이니까. 교과서와 참고서를 책상 위에 배치하며 슬쩍 물어본다.

만화책 재밌어?
응. 이거 내가 좋아하는 작가거든.
누군데?
말하면 니가 알려나?

예지는 살짝 발끈했다.

알 수도 있지.
카라차라고, 내용은 좀 황당한데.. 야한 그림을 잘 그려.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예지였지만 고개를 갸웃할 수 밖에 없었다. 

첨 들어봐.
것봐. 말했잖아. 모를 거라고. 하나도 안 유명해.

모르는 사람 이름이 나오자 예지는 입을 다물었다. 재혁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고 공부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그게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삼십분만에 책을 덮고 재혁을 향해 말했다.

한 번 봐봐.
뭘?
니가 보고 있는 그 만화책.
야한 건데?
저질. 맨날 야한 거나 보고 있어?
남이사 보건 말건, 뭔 상관이야? 내 방에서 내가 돈 주고 산 만화책 보고 있겠다는데.
왜 상관없어? 지금 니 방에 너 혼자 있니?
혼자는 아니지.
알긴 아네. 게다가 여자애가 있는데 야한걸 태연하게 보고 있단 말야? 너무 매너 없는 거 아냐?

이렇게 쏘아 붙이자 재혁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앉은 그는 예지와 마주 보았다.

매너?
그래, 매너.
정말 매너 없는 짓 한번 해볼까?

예지는 깜짝 놀랐다. 침대에서 서서히 발을 내려 방바닥에 선 재혁이 이쪽을 쳐다본다.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뭐, 어쩌려고 그래?

재혁은 대답없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예지 쪽을 향한다. 예지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드디어 올 것이 오는 구나. 여태까지 재혁이 참아왔던 게 폭발하는 건가 싶었다. 지난 며칠은... 그래, 전혀 재혁이 같지 않았다. 이제서야 본성이 드러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이 떨렸다. 이제 재혁과 그녀와의 거리를 1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 예지의 발 바로 앞에 재혁의 발이 놓여진다. 재혁이 손을 뻗는다. 예지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자.
.......응?

눈을 뜨자, 그녀의 앞에 재혁이 내민 만화책이 놓여있었다. 검은 색 표지에 두 여자의 얼굴이 반반씩 그려져 있었다. 마치 야누스의 상처럼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재혁의 목소리가 들린다.

야한 만화를 여자한테 내미는 매너없는 짓을 해 보았어. 기다려. 난 가서 마실 것 좀 가져올게.
으응...

얼떨결에 만화책을 받아든 예지는 문을 열고 나가는 재혁의 뒷모습을 보았다. 순간 짜르르한 감정이 그녀의 안을 휘젓고 지나갔다.

'뭐야... 이게....'

자기도 모르게 움츠렸던 다리를 천천히 바로 한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애써 무시한다. 어차피 공부하기는 그른 것 같다. 한숨을 내쉰다. 별 생각 없이 만화책을 펴본다. 만화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였다. 시작부터 얼떨결에 소개팅으로 만난 여자랑 다짜고짜 모텔에 가는 장면이 나왔다.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던 예지는 남성과 여성의 국부는 비교적 소상히 묘사된 페이지를 보고 표지를 확 덮어버렸다. 

꺅!

그녀를 놀라게 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혼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어쩐지 쑥스러워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그녀를 보고 있지 않다. 아무도 그녀의 비명을 듣지 못 했다. 재혁이가 2층으로 올라오는 기척도 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일부러 소리내어 투덜거렸다.

이 녀석은 정말 공부 안 하고 이런 것만....

그렇게 말하며 만화책을 밀어놓으려고 했다. 그러나 은근히 피어오르는 한 생각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만화책을 잡게 만들었다. 그것은 호기심이라는, 아주 본능적인 생각이었다.

'살짝만 보고... 안 본 척 해야지.'

영미권 소설을 좋아하는 그녀인지라 가끔은 남녀간의 섹스라던가 유사행위에 대한 묘사는 글로 제법 보기도 했었다. 베스트셀러로 올라간 소설에서는 그런 게 흔했다. 누가 탓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 말고는 아무도 없는 문예부실에 홀로 앉아 두근거리며 읽곤 했다. 그렇지만 남자의 물건에 대해서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지난 번에 재혁의 샤워 직후 모습을 아주 잠깐 보긴 했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어렸을 때 같이 목욕하면서 보았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 정도만 알아볼 수 있었지, 구체적인 모양은 보질 못 했다. 게다가 아래로 처져 있는 그 모양새는 방금 그녀가 만화책에서 본 장면의 기립 자세와는 차이가 있었다.

'이...이게 발기되어 있는 상태...?'

모범생 답게 성교육은 잘 배워두었기에 남자의 성기가 일정 자극을 받으면 발기한다는 것 정도를 모르지 않는다. 페이지를 넘기자 남자 주인공이 누워있고 그의 물건에 다가가고 있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 나타났다. 남자의 물건은 꼿꼿이 서 있었고 여자는 그걸 움켜쥐더니 다음 컷에서는 입에 넣기 시작했다. 예지는 깜짝 놀랐다. 오랄 섹스라는 단어는 알고 있었지만 이걸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한 그림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자의 물건이라는 게 이런 크기일 줄은 몰랐다. 과장을 조금 보태 만화에서의 그것은 등장인물의 팔뚝과 비슷한 크기였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이마에 땀이 삐질 흘렀다.

'이...이걸 입에다 넣어? 그리고 아래...거기에도 넣는다고?'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걸 대략적이나마 상상은 해보았지만 막상 그림으로 보고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손가락이 자꾸 떨린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물건에 콘돔을 씌우고 막 넣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걸 진짜 보네?
으악!!!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예지는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들고 있던 만화책을 침대쪽으로 냅다 집어던지고 책상 위에 놓인 책을 아무거나 하나 집어든다. 이미 늦었지만, 그래야 그녀의 마음이 편했다. 재혁의 말투에 아주 살짝 짜증이 배어난다.

야.
.....왜.
너 지금 책 거꾸로 들고 있다?

예지의 얼굴은 아주 잘익은 홍시가 되고 만다. 황급히 책을 바로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쥐구멍에 숨고 싶은 생각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재혁은 들고 온 쟁반을 책상 한쪽에 두고 침대에 던져진 만화책을 집어들었다. 

남의 책을 왜 집어던지고 그래? 찢어지거나 그러면 어쩌려구. 이거 개인지로 나온거라서 따로 또 살 수도 없단 말야.
미...미안....

재혁은 혀를 차며 만화책을 똑바로 놓았다. 쟁반에 놓인 컵을 집어 들고 예지에게 내밀었다. 투명한 유리컵에 붉은 색 토마토 쥬스가 담겨 있었다.

토마토 쥬스 좋아하지? 자.
어? 어...

예지는 쿵쾅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잔을 받아들었다. 재혁이 말한대로,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쥬스는 토마토 쥬스였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준 동전을 가지고 둘이서 슈퍼에 가서 군것질을 사먹곤 했다. 그녀가 토마토 쥬스를 사는 걸 보고 재혁이는 피 마시는 뱀파이어라고 막 놀리기도 했었다.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그렇게 놀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 당시의 재혁이라면 보고 있지도 않을 야한 만화책을 태연한 얼굴로 보고 있다. 지금의 재혁을 예지는 힐끔거린다. 너무 자주 힐끔거린 걸까, 재혁은 예지의 시선을 느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너 먼저 볼래?
뭐? 내가... 그걸?
아까 보니까 뚫어져라 보고 있더만. 이 페이지를.

재혁이 펼쳐서 내보인 페이지는 아까의 그 장면이다. 콘돔을 씌운 물건으로 여자의 거길 향해 들어가기 직전. 예지는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이 변태!! 어디다 그걸 들이대!!
.....하아.
하아?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대단히 축축하고 기분 나쁜 감촉이 그녀의 하반신에 가득....

손에 뭔가를 들고 있으면 말야. 그렇게 확 움직이면 안 되지. 안 그래?

재혁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재혁이 티슈박스를 찾으러 가는 동안 예지는 자신의 치마를 망연자실하며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 그녀가 들고 있던 컵에는 아직 토마토 쥬스가 많이 남아있었고 그 상태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반 이상 기울어진 컵은 그녀의 치마 위로 붉은 색 얼룩을, 아니, 얼룩 수준이 아니라 거의 반쯤은 염색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물들이고 말았다. 

어..어떻게 해....난 몰라....

울상이 된 예지 앞에 재혁이 와서 무릎을 꿇었다. 그는 티슈 박스에서 뽑아든 티슈를 가지고 그녀가 앉은 의자 주변과 바닥을 꼼꼼하게 닦아냈다. 그러나 한사코 그녀의 몸에는 손을 대지 않으려고 했다. 예지는 그게 불만이었다.

내 옷은 안 닦아줘?

그러자 재혁이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숙이더니 다른 부분을 마저 닦아낸다.

니가 닦아.
기왕 닦는 김에 같이 닦을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러면 내가 널 만져야 되는데, 그래도 괜찮아?
.........그게, 무슨 소리야?

예지가 의아함을 담아 묻자, 재혁은 뱉어내듯이 대답했다.

전에 내가 만졌더니 소리 지르며 싫어했잖아. 이러지 말라며.
그거야 니 혀가 내 거기에....

그제서야 예지는 지난 며칠 간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것 같았다. 그녀가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 지르다시피 한 외침이, 재혁에게는 꽤 크게 상처가 된 모양이었다. 재혁은 그 이후 의식적으로라도 그녀를 만지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다. 

니가 닦아.

어느새 주변을 다 닦고 자리에서 일어난 재혁이 예지에게 티슈 박스를 내밀었다. 예지는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대답했다.

아니.. 니가 닦아줘.

재혁과 예지의 눈이 마주친다. 재혁이 재차 묻는다.

내가 닦아도 돼?
으응.
만져도 돼?
어.
소리지르거나 억지로 떼내지 않을거지? 마치 치한이나 변태 만난 것처럼 말야.

여상스럽게 말하는 재혁의 말투에서, 예지는 자신의 반응이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예지는 대답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예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재혁이 다시 무릎 꿇는다. 티슈를 뽑아들고 그녀의 옷을 닦아내기 시작한다. 자신의 맨살에 닿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옷 위에 재혁의 손길이 닿았을 뿐인데도 예지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그러나 재혁을 밀쳐내거나 소리지르지 않았다. 쥬스는 제법 많이 흘러 치마 끝자락에서 드러난 허벅지에도 제법 묻어 있었다. 

다리 살짝 벌려봐.

예지는 재혁이 시키는대로 다리를 벌렸다. 짧은 치마를 입고 의자에 앉아있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으니 다리를 벌리면 으레 팬티가 드러나게 된다. 그러나 예지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재혁이가 보고 있으니까. 또, 보이게 될까봐 지난 번에 속옷 매장에 일부러 가서 사온 새 팬티니까.

안쪽에도 많이 묻었네.

묻지도 않은 말에 대답하듯 중얼거리며 재혁은 그녀의 다리에 묻은 쥬스를 꼼꼼히 닦아냈다. 그리고 그 손길은 점점 안쪽으로 향했다. 치마의 안쪽, 전혀 묻었을 리가 없는 위치까지도.

여기가 말야. 쥬스는 아니고... 뭔가 다른 걸로 젖어있어.
하윽....

재혁의 손길이 결국 다시 닿고 만다. 그렇지만 예지는 이번에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난 번에 혀가 닿았던 곳이니 손이면 어떠하리. 그렇게 생각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은 다리 사이에서 묘한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악.... 거...거긴.....
여기, 여기... 아무래도 많이 젖은 것 같아.
흐음.... 그...그건...

피부에 달라붙은 팬티에, 작은 골이 생겨난다. 마치 도끼자국처럼 움푹 패여들어간 그 부분을 따라 재혁의 손가락이 춤을 춘다. 그 춤에 어울리는 노래를, 예지는 부르기 시작한다. 배운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노래이건만 그녀는 부를 줄 알았다.

하윽....재...재혁아..하아...나....
어라? 점점 더 젖는데?
그게...하윽....하아.....

자신의 엉덩이가 왜 들썩거리는지, 왜 안타까운 목소리로 재혁의 이름을 부르는지, 어느새 두 손으로 재혁의 머리를 붙들고 자기 쪽으로 당기고 있는지 예지는 알지 못 했다. 어느새 그녀는 엉덩이를 들어 재혁이 그녀의 치마를 벗기는 것에 협력하고 있었다. 쥬스에 젖어서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변명을 하지만 팬티까지 벗겨지는 것에 순순히 협조한 사실은, 아무래도 변명이 불가능했다. 완전히 벌려진 두 다리 사이에 재혁의 얼굴이 자리한다. 아무것도 숨길 것 없이 환히 드러난 비밀의 문을 향해 그의 부드러운 혀가 노크한다. 

소꿉친구 길들이기 - 6부

다음 날, 재혁은 틀림없이 등교를 했다. 담임에게 미리 찾아가 어제는 아파서 못 나왔노라고 이야기도 전했다. 담임은 그런 재혁을 보며 실실 웃더니 알았다며 그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오늘도 대학교 도서관 가서 공부하†rㅋㅋ?]
[응.]

쉬는 시간이면 예지는 재혁과 문자를 주고 받았다. 주로 재혁이 먼저 보내는 쪽이었다. 답변을 하지 않으면 답을 할 때까지 문자를 보내오며 귀찮게 하기에 예지는 별 수 없이 꼬박꼬박 답을 해주었다.

[거길 왜Jㅋㅋㅋ?]
[원래는 학교에서 야자하는데 축제때까지는 안하잖아]
[문예부실은어쩌고?]
[거긴주변이시끄러워서안돼]

맨 앞자리의 예지와 맨 뒷자리의 재혁이 떨어져 있는 거리는 불과 십 미터도 채 되지 않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는 쉬지 않고 주고 받았다.

[그럴거면 그냥 우리집 가서 해. 책상줄게.]
[싫어.]
[왜?ㅋㅋㅋ밥도준ˆい빱빱?

예지는 한숨을 쉬고 키패드를 두드렸다.

[너...또 그럴려고 그러잖아.]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대?ㅋㅋㅋ]
[암튼 싫어.]

문자가 전송이 되었다. 그러나 거의 1초만에 답장을 하던 재혁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예지는 왜 그런가 싶어서 궁금해하고 있는데, 교실 뒤쪽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오늘 클럽 갈래?

예지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물론 재혁이가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아니었다. 그의 패거리에게 한 소리였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친구에게 하는 소리치고는 목소리의 데시벨이 조금 높았다. 조금 떨어져 있는 예지에게까지 아주 잘 들리는, 그런 크기의 목소리였다.

클럽? 좋지. 안 그래도 장흥동에 새로 오픈한데 있다던데? 갈래?
그러지, 뭐.

예지는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서둘러 교실을 나왔다. 곧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왜?
야! 나 오늘 니네 집에 갈래.
안되겠는데... 나 바빠.

예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클럽 간다면서? 가면 또 술 먹고 그럴 거 아냐?
그러겠지. 여자애들 좀 꼬셔서 따먹고 시비 거는 새끼 있으면 때려 눕히고... 뭐, 그런 맛에 가는 거니까 말야.

예지는 기가 찼다. 그러다가 또 밖에서 문제가 생기면 안에서 애써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가지마.
내가 왜?
내가 가지 말라고 하니까.
니가 뭔데?

재혁의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예지는 빠르게 말했다.

나보고 너네 집에 오라면서? 내가 갈테니까, 그러니까 괜히 나가지 말고 집에서 나랑 같이...
너랑 같이? 뭐?

순간 예지는 아차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리를 한거지?'

....같이 공부하자고.
푸하하하! 내가 공부?

재혁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예지는 내심 불안했다. 그러나 웃기를 마친 재혁은 시원스레 말했다.

니가 온다고 한 거야, 알았지?
....그래, 알았어.

간신히 수업종이 울리기 전에 그녀는 재혁에 대한 설득을 마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수업이 모두 끝나고, 재혁의 집으로 가기 전에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행여 팬티에 분비물 등이 묻어있지는 않나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깨끗했다. 제혁의 집으로 가자 일하는 아줌마가 문을 열어주었다. 방으로 올라가자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먼저 돌아간 재혁이 침대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녀가 방에 들어서는 걸 힐끔 본 그는, 왔어?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예지는 가방을 책상 옆에 내려놓고 자기 공부할 걸 꺼냈다. 

처음에는 재혁이 쪽을 의식하느라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 또 보자고 할지 모른다. 그랬다가는 자신도 거부하지 못 하리라....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든다.... 안 그래도 그런 식으로 신경 쓰이는데 재혁에게는 수시로 전화나 문자가 오곤 했다. 결국 예지는 참지 못하고 재혁을 째려보았다.

나보고 여기서 공부하게 해주겠다며? 그러면 좀 면학분위기를 조성해줘야지!
면학...? 어. 그래라. 그럼.

재혁은 핸드폰을 껐다. 그에게 나오라고 닥달하는 무리와의 연락은 그렇게 끊어졌다. 재혁은 벽장에서 만화책을 가져오더니 그걸 읽기 시작했다. 방은 다시 조용해졌고 예지는 가까스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되어, 아줌마가 올라오더니 저녁을 차려놓았다고 알렸다. 재혁과 예지가 내려가니 아줌마가 퇴근을 하고 있었다. 바람처럼 휑하니 가버린 아줌마가 떠난 부엌의 식탁에는 2인분의 저녁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예지는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저 분은 매일 오는게 아냐?
매일 오면, 내가 외박을 못 하잖아.
외박....

외박을 하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예지는 참았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니 재혁이 커피까지 끓여주었다. 커피를 마시며 재혁이 예지에게 물었다.

또 공부할거지?
어? 어...

재혁이 앞장 서서 방으로 올라갔고, 예지도 그 뒤를 따랐다. 평소 하던대로 11시까지 공부를 하고 난 예지가 책상에서 일어났을 때, 재혁은 침대에서 이미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예지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혁의 잠든 모습을 찬찬히 살핀다. 어렸을 때의 귀여움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예지는 그 얼굴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내었다. 잠시 후, 예지는 재혁이 깨지 않도록 가방을 챙겨 방을 살짝 나섰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2층 복도를 지나 내려가려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
......깨..깼어?

오늘은 그 확인인가 뭐시기인가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가 싶었던 예지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시간이 늦어서 가보려고. 너도 자고 있길래.
기다려.

재혁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예지는 안절부절했다. 자신도 방으로 따라 들어가야 하나. 괜히 여기 있다가 복도에서 바로 보자고 하면 그것도 난감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예지는 옷을 입고 나온 재혁에게 말을 건네면서 퍽 쭈볏거렸다.

저...저기...
응? 왜 그래?
아니, 그게 아무래도...

그러나 이쪽으로 걸어오던 재혁은 예지를 지나쳐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 다 내려간 재혁은 예지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간다면서?
어?
가자.

예지는 얼떨결에 재혁을 따라나섰다. 재혁이 앞장 서서 걷고 예지는 그 뒤를 따랐다. 예지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냥 방에서 확인작업을 하게 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복도에서라도. 그래도 거긴 실내가 아닌가. 지금 길을 걷고 있는데, 대체 어디서 확인 작업을 하겠다고 덤빌지 몰라 그녀의 불안은 자꾸 증폭되었다. 설마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그러자고는 하지 않을테고... 그녀는 재혁의 집에서 자신의 집까지의 동선을 그려보았다. 그 안에 사람들이 그나마 적게 오가는 곳이 어디일까 머리 속에 떠올려본다. 공원? 늦은 시각이니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다. 나무나 시설물로 드리워진 그늘도 꽤 있을 거다. 거기가 나을려나. 아니면 놀이터 같은 곳에 가면 동굴 같이 생긴 놀이물도 있고....

들어가.
엑! 어딜?!

그녀는 재혁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싶어 둘러보던 그녀는 두번째로 놀랐다.

우리 집?

그러자 재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너 집에 안 가고 어딜 가려고 그랬어?

예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물론 우리 집에 지금 아무도 없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왠지....

예지는 눈 앞이 캄캄했다. 자신의 집에 재혁을 들이고 싶지 않은 건 둘째치고 어쩐지 그를 자기 방에 들였다가는 걷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확인이 확인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재혁의 혀가 닿았던 지난 번 일을 떠올려 본다면....

그럼, 난 간다.
.........가?

재혁의 말에 예지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재혁은 그녀에게 손을 들어 보이곤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예지는 의아했다. 눈을 깜빡이고 있느라 재혁에게 인사 할 타이밍도 놓친 후다.

'서..설마, 데려다 준 거야?'

예지는 재혁이 자신에게 확인 작업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이런 식으로 데려다 준 것에 대해 의아해졌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보니 재혁은 여태까지 항상 예지를 데려다 주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이상한 녀석.'

그녀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재혁은 계속 이상했다. 학교에서는 지극히 얌전했고 줄여입었던 교복 바지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담임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우호적인 의견이 돌고 있다고 예지에게 귀띔해 주었다. 예지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머리 속으로는 생각이 복잡했다. 오늘 확인 작업을 하지 않았으니 내일은 또 이상하게 나올 거야. 그러나 내일의 재혁은 괜찮았다. 심지어 다음 날의 모레와 글피까지도. 그럴수록 예지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래서 재혁이 또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주면서 이런 말을 꺼냈을 때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은 뭐해?
뭐...뭐하다니!
왜 그렇게 놀래? 너 요새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깜짝깜짝 놀라더라?
어...어...그게.. 암튼 내일은 왜?

내일은 토요일이었고 거기다 놀토였다. 재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영화라도 하나 보러 갈래? 이번에 재미있는 거 하나 개봉하던데.

예지는 머리 속에서 이런 연상을 했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본다. 영화관은 어둡다. 어두운 곳에 재혁과 그녀가 간다! 꺄악! 안돼! 게다가 재혁이 말하는 '재미있는 거'라니. 대체 어떻고 어떤 내용이길래 '재미있다'고 하는 걸까. 생각 만으로 예지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버렸다. 꺄악! 절대 안돼! 라고 생각했다.

아, 안돼! 나 공부해야 돼. 영화는 너 혼자 보러 가.

재혁이 혀를 찼다.

영화를 혼자 보러 가는 사람이 어디있냐? 알았어. 그럼 그냥 우리 집에 와.

예지는 펄쩍 뛰었다. 방금 전까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녀였기에 재혁의 말은 도심지에 투하된 폭탄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머리 속에서 비상등이 번쩍이며 민방위 훈련을 소집한다. 예지는 소리를 빽 질렀다.

내가 너희 집에 왜 가!!

그러자 재혁은 한층 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차피 도서관 가서 공부할 거면 우리집에 오라고. 너 요새 맨날 우리집 와서 공부하잖아. 안 그래?
어? 그.. 그랬지.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재혁은 그녀를 손 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말 그대로 공부장소를 제공했고 예지는 거기서 계속 공부했다. 딱딱한 의자와 잘 나오지도 않는 에어콘, 그리고 수시로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번잡스럽고 불편한 도서관보다야 재혁의 방이 백 배 편한 것도 사실이다. 의자도 편안하고 책상도 딱 좋다. 참고서도 다 있고 재혁의 문제집도 그녀 차지가 된지 오래다. 게다가 맛 좋은 밥도 공짜였다. 이제 곧 축제가 지나고 나면 다시 또 야자를 하게 될텐데 지금 같아서는 학교에서 야자를 하는 것보다는 재혁의 집에서 공부를 하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곧잘 하게 될 정도였다. 

그... 그래? 알았어. 내일 봐.

재혁은 그녀에게 손을 들어보이고 몸을 돌렸다. 집으로 뛰어들어간 예지는 새로운 고민에 휩싸였다.

'뭘...입고 가지?'

여태까지는 항상 방과 후에 재혁의 집에 갔었기 때문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내일은 교복을 입지 않는다. 즉, 사복을 입어야 한다는 건데...

'진짜 옷 없네...'

옷장을 뒤지던 예지는 울상이 되었다. 여태까지 옷에 대해 관심이 없던 그녀였다. 내일 당장 입고 갈 옷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의 서랍을 열었다. 매달 받는 용돈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보고 싶은 책을 사 모으는 거 외에 딱히 쓸 곳이 없어 그냥 모아만 두던 걸 꺼낸다.

'이 시간에 옷가게가 연 곳이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대체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옷을 사입는단 말인가. 예지는 그 누구가 다름 아닌 재혁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돈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일부러 서랍을 세게 닫고 침대로 확 들어갔다.

'이게 다 재혁이가 이상해서 그래. 나까지 이상해지고 있어.'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변명한다. 해놓고도 본인도 믿지 않을 변명이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계속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새로운 고민에 휩싸였다.

'치...마로 입어야 할까? 아님 그냥 바지를....?'

그걸 결정하느라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소꿉친구 길들이기 - 5부

찌르릉- 찌르릉-

거듭 벨을 눌렀지만 답이 오지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예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에 없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문을 살짝 밀어본다. 그러자 잠겨있지 않은 대문이 슬쩍 열린다. 예지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남의 집이라 살짝 저어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긴 그녀에게 있어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다. 저쪽 한편에 덩그러니 놓인 쥬니어 농구대만 하더라도 거기에 공을 넣겠다고 기를 쓰던 재혁이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비록 그 농구대의 아래쪽은 잡초가 무성했지만...

실례합니다....

현관도 열려 있었다. 살짝 밀며 안에 대고 말을 하지만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선다. 커다란 집안은 사람의 온기가 부족해보였다. 퀭한 그곳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층으로 올라가 재혁의 방 앞까지 간다. 잠깐 호흡을 가다듬는다. 노크한다.

....누구....

역시, 그렇군. 방 안에서 들려오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에 예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 재혁이 그녀를 알아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니가 여긴 왜...
역시.. 너, 감기 걸렸구나? 그렇지?
......크게 말하지 마라. 머리 울린다.

예지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제 저녁 헤어지면서 혹시나 했다. 그녀가 알기로 재혁은 어렸을 때부터 환절기가 되면 찬바람을 조금만 쐬도 감기에 걸려 몸져눕곤 했다. 어제도 그렇게 바깥에서 자신을 내내 기다렸으니 몸 상태가 성할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실을 담임에게 말할까도 싶었지만 이미 문제아로 낙인 찍혀 있는 재혁이기에 아파서 나오지 않는 거라고 말한들 먹히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지레 포기했다.

약은 먹었어? 식사는?
몰라...
어제 보니까 그 일하시는 분도 계시던데...
...일주일에 두 번만 와.

예지는 가방을 벗어두고 방을 나갔다. 부엌으로 내려가 뒤져보니 찬장에는 햇반과 통조림 등, 인스턴트 음식이 가득했다. 예전과는 다른 이 집 정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돌보는 사람이 없기에 잡풀로 무성한 그곳이나 여기나 매한가지였다. 다행히도 재료는 많이 있었다. 예지는 햇반을 덮히고 냄비에 물을 끓여 죽을 한 사발 만들었다. 냉장고에 있는 사과와 칼도 한 쟁반에 담는다. 그걸 가지고 재혁의 방으로 돌아갔다. 녀석을 일으켜 책상에 앉히곤 그 앞에 죽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거 먹어.
....뭐야, 이게.
보면 몰라? 죽이잖아.
....약 같은 거 탄 거 아니지?
안 먹을 거면 도로 내놔!
싫은데.

재혁은 큭큭거리면서 숟가락을 들어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예지는 한숨을 내쉬고 그의 곁에 앉아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

아파서 결석하는 거면 담임한테 미리 전화를 해야지. 아니면 집에 전화가 오면 좀 받든가. 그냥 그러고 줄창 누워있으면 누가 알아주기나 해? 넌 어째 옛날이랑 지금이랑 똑같이 고집불통이야?
잔소리 하러 왔냐?
몰라! 그냥 니 죽었나 안 죽었나 확인하러 왔다, 왜!
크크큭. 안 죽어서 서운하겠네.
그래, 딥따 서운해.

예지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재혁은 죽을 다 먹었다. 한 입 크기로 잘라놓은 사과조각을 손가락으로 집어올리더니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여기 포크 있잖아. 왜 더럽게 손으로 먹어?
내 손 안 더러워.
씻지도 않았을 거면서. 온 몸에서 땀냄새가 아주 그냥....
...큭. 왜? 나 목욕 할테니 니가 씻겨줄래?
미쳤어?

군소리가 오가는데도 재혁은 꿋꿋하게 사과를 다 먹었다.

아.. 이제 살겠네... 하루 종일 굶었더니...
왜 굶어? 집에 먹을 게 잔뜩이더만.
내려가기 귀찮아.
기가 막혀. 그럼 굶어죽을 때까지 여기 그냥 드러누워 있을 작정이었어?
뭐... 내일이면 아줌마가 오니까.
....하아.

예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빈 그릇을 치웠다. 그런 그녀를 빤히 보고 있던 재혁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손길에 놀란 예지가 살짝 비명을 질렀다.

야! 이거 안놔?
왜? 잡으면 안 돼?
지...지금 그릇 치우잖아.

그제서야 예지는 자신이 호랑이 소굴에 제발로 들어왔다는 걸 실감했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이...이상한 짓 하려고 하지마. 너 지금... 나한테 칼이 있다는 거 잊으면...
고마워.

생각지도 못한 말에 예지는 몸이 굳어버렸다. 재혁은 그대로 손을 놓았다. 더 이상 팔이 잡혀있는 것도 아닌데 예지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재혁이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왜 그래?
아...아무것도 아냐!

예지는 황급히 방을 나왔다. 쟁반을 들고 부엌까지 한달음에 달려간다. 하마터면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 했다. 쟁반을 싱크대에 쿵 내려놓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뭐....뭐야, 저 자식 왜 그런 표정으로.....'

거울을 보지 않는 한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 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여 있다는 것을. 한참만에 진정이 된 그녀는 방으로 다시 돌아갔다. 재혁은 침대에 도로 누워있었다. 그녀는 그 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체온계 어디 있어?
없는데.. 그런 건...
비상약은?
글쎄다.

예지는 혀를 차며 자기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재혁이 말했다.

갈려고?
가기 전에... 약은 사다놓고 갈게. 종합감기약이면 되지?
난 약 싫어.
애도 아니고.. 먹고 빨리 나아야지.
그냥 니가 여기 있어주면, 그게 약보다 더 좋겠어. 어디 가지마.
.....

또 무슨 수작이냐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재혁의 핼쓱한 표정에 예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어차피 나도 도서관 가서 공부할 거였으니까... 여기 책상 좀 빌릴게.
얼마든지.
대신 너 나한테 이상한 소리...
팬티의 F도 안 꺼낼테니 염려 놓으셔.
바보야! 팬티는 P야!
내가 안 하니까 니가 말하네...?
닥치고 잠이나 자!!!

재혁은 예,예 거리며 똑바로 누워 이불을 턱 밑까지 끌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젓던 예지는 책상에 앉았다. 가방을 열어 문제집과 연습장을 꺼내들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사방은 고요했다. 들려오는 건 규칙적인 재혁의 숨소리뿐. 처음에는 잘 될까 싶었는데 워낙 집중력을 타고난 예지였던 터라 금방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사실 요 몇년간 오지 않아서 그렇지 그 전까지 이 방은 그녀에게 아늑한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처음에 자신이 목표한 챕터까지의 문제풀이를 마친 예지는 기지개를 켰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재혁의 방에 욕실 겸 화장실이 딸려있기는 하지만 어쩐지 이 녀석 근처에서 화장실을 가는 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서 살짝 일어나 방을 나왔다. 자고 있는 재혁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서 2층 끝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방으로 돌아오니 재혁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재혁의 숨소리를 들으며, 예지는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처음에 이 집에 들어올 때도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이지만 여전히 답을 모르겠다. 시계를 보니 집에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그녀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인기척에 재혁이 깬 모양이었다. 침대에 누운 채로 몸을 돌리더니 이쪽을 본다. 예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내일은 나올 수 있겠지?
글쎄....

예지는 재혁의 곁에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열은 심하지 않았다.

열 다 내렸어. 이제 한숨 자면 내일이면 멀쩡할거야. 꼭 학교 나와.

그러자 재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못 나갈 것 같아.
아, 또 왜에!!
니가 확인을 안 시켜줬잖아.
무슨....확인?

예지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나고 난다. 재혁의 눈이 장난스러운 빛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오늘 날 간호해준 사람이... 아니, 사람인지 곰돌이인지....
야! 넌 아파서 누워있으면서도 계속 그 생각이야?
당연한 거 아냐? 이 나이의 남자애가 여자애랑 방에 있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 같아?
무...무슨 생각.....?
아주아주 야하고, 음흉하고, 샅샅이... 그러면서도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고.

이렇게 말하는 재혁의 눈이 예지를 훑어보았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마치 스캐너로 훑는 듯한 그 눈빛에 예지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대체 얼마나 음란한 생각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는 예지는 그저 놀랄 준비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마침내 재혁의 입이 열렸다.

곰돌이 팬티를 입었을까, 안 입었을까.
..........안 입었어!!!
또 말로만.
말로만 하는 게 아냐.
그럼... 이리 와서 보여줘...
내가 왜 그리로 가야 하는 건데?
열이 올라서 눈이 침침해졌나봐. 먼 게 잘 안 보여.
거짓말 하지 마.
못 믿겠으면 그냥 가. 나는 내일까지 푹 쉬면서 시력까지 돌아오면 학교에 가도록 할테니까.

예지는 분통이 터졌지만 그렇다고 재혁을 말로 이길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침대 곁으로 바짝 다가가 치마를 걷어올리려고 했다. 그러나 재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아.. 거기도 멀어.
멀다니....
내 눈 앞에 바짝 대 줘.
바짝....? 어떻게....

재혁의 팔이 뻗어오더니 예지의 팔을 잡는다. 그가 당기는 대로 몸이 휙 움직인다. 예지는 재혁의 위에 올라타고 말았다.

이...이게 뭐야.
팬티를 내 얼굴에 바짝 대고..... 그러고 보여줘.
너 정말....
제대로 확인하고 나면 내일은 꼭 학교에 나갈테니깐.

예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처음 보여주는 것도 아니잖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기왕 보여주기로 했으니, 몸에 힘이 없어 누워있는 재혁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팬티도 평소에 잘 입지 않던 거의 새 것을 입고 왔으니 가까이서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자신의 생각이 어딘가부터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있었지만 예지는 그런 생각마저 애써 지우려고 노력했다.

이... 정도면 돼?
응.

예지는 재혁의 가슴에 걸터앉듯이 자리했다. 무릎을 침대에 대고 엉덩이를 세웠다. 치마를 조심스럽게 걷어올리자 그녀의 하얀 팬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늘색 스프라이트 무늬가 들어가 있는, 나름 메이커가 있는 제품이다. 아래부터 서서히 드러나는 그것을 바라보던 재혁은 이내 입을 갖다대었다. 예지는 다소 움찔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어제 낮처럼 비명을 지르진 않았다.

하악....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다. 전보다 더 바싹 들이대고 깔짝거리는 재혁의 혀는, 마치 팬티를 뚫고 들어와 그녀의 음부를 핥는 것 같은 기분을 전해주었다. 예지는 치마를 걷어올리고 있던 손이 살짝살짝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응....흠......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이상한 신음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재혁의 혀가 적시는 것보다도 안에서 비어져 나오는 무언가로 인하여 팬티가 더 빨리 축축해진다.

츄룹- 츄룹--

하앙.....하악...하....악....

예지는 치마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재혁의 머리가 그녀의 치마로 인해 푹 덮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E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더 안으로, 더 깊이 핥고 빨았다.

하앙...하악..항....

다시 치마를 걷어올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예지는 그러질 못 했다. 그저 재혁의 머리를 붙들고 자신의 몸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을 뿐이었다. 머리 속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가고 몸 전체에서 떨리는 울림은 그녀를 혼돈 속으로 밀어넣고 있었다. 몸을 지탱하고 서 있던 무릎에서도 힘이 빠진다.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가 침대에 눕고 만다. 그러나 재혁의 머리는 그대로 그녀의 하반신에 붙어 원래의 미션을 계속 수행하고 있다.

하앙....하....제발...재혁아...하아....

제발, 무엇일까. 그녀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저 은밀한 부위에서 느껴지고 있는 이 이상한 감촉이 더 크게 번지기를 바라는 열망과 이래서는 안된다는 이성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을 따름이다. 생각의 차이가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육체는 이미 다른 육체와의 접점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츄룹- 츄룹- 츄루루룹-

이미 질척해져버린 팬티는, 재혁의 손가락에 의해 옆으로 비껴져 있었다. 소담스럽게 자라난 음모가 재혁의 혀에 의해서 한쪽으로 눕고 있었다. 꿈틀거리며 맑은 애액을 토해내고 있는 질구의 겉은 이미 재혁의 손가락 아래 점령 당했다.

이...이러지마!!

가까스로 그녀의 이성이 돌아왔다. 예지가 재혁의 머리를 붙들고 바깥쪽으로 밀어낸다. 떨어지기 직전, 재혁의 혀가 그녀의 대음순을 싸악- 훑어냈다. 마지막 그 혀놀림에 예지는 찌르르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헐떡거리는 숨을 가다듬으며 재혁을 노려본다. 지금 그녀는 흐트러진 치마를 추스리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있었고 그녀의 등 뒤에는 재혁의 다리가 느껴지고 있다.

........나, 갈래.

예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방금 전 느꼈던 느낌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녀는 애써 재혁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 하며 가방을 챙겼다. 그런 다음 가방을 둘러메고 있는데, 어느새 침대에서 나온 재혁이가 옷을 걸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뭐하는 거야?
음료수 좀 마시고 싶어서.
방금 전까지는 일어나지도 못하겠다면서!
맛있는 걸 맛 보았더니.... 기운이 좀 나는데?

붉은 혀를 내어 자신의 입술을 살짝 핥는 재혁을 보면서 예지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맛보았다는 맛있는 부위는 지금도 껄쩍거리며 이상한 애액을 계속해서 토내해고 있었다는 걸, 비밀로 해야 한다.

근데 왜 밖으로 나와?

예지가 집을 나서자 재혁도 따라나섰다. 운동화 코끝을 바닥에 대고 툭툭 두드린 재혁은 별 일 아니란 듯이 말했다.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없더라. 가서 사와야지.

예지는 재혁을 등지고 자기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애써 모른 척 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 기묘한 동행은 계속 되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뒤를 돌아본 예지는 재혁을 째려보았다. 재혁은 그제서야 등을 돌리더니,

어, 저기 슈퍼 있네.

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사실, 슈퍼나 편의점 따위나 그의 집에서 여기 예지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몇 개나 지나쳐왔지만 말이다. 예지는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집으로 들어갔다. 

소꿉친구 길들이기 - 4부

...이 때 x를 미분하면 기울기가 드러나는데, 이걸 가지고 일단 그래프를 그려본다고, 그러면 말야...

예지는 수업내용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안 사정상 과외는 고사하고 학원도 다니지 못하는 그녀는 항상 수업에 열심히 임하고, 필기는 물론 그때 그때 드는 의문점까지 기록하며 수업시간에 대단히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 사이의 느낌 때문에 좀처럼 평소처럼 할 수가 없었다.

'내일부터는.... 갈아입을 팬티를 가지고 와야 할까.'

원래 생리가 가까워지면 하나 정도는 예비로 가져오기도 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예지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미쳤어. 내가 왜 그 자식을 위해 갈아입을 것까지 가져올 생각을 하는 거야. 그냥... 그런 짓을.... 못 하게 하면 되는데....'

아까 문예부실에서의 일이 떠오른다. 상기하지 않으려고 해도 불현듯 떠오르는 걸 막을 수 없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있는 자신과 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재혁.... 다가오던 얼굴. 그리고 그녀의 은밀한 부위에 와 닿은 촉촉한 혀 끝.....

뭐하는 짓이야!

다리를 확 오무리는 바람에, 재혁의 머리는 예지의 허벅지에 의해 단번에 조여지게 되었다. 재혁은 얼굴을 뒤로 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말했다.

전에 들어보니까, 그런 재질의 천이 있다고 하던데.
무슨 재질!!
수영복 같은 데 쓰이는 건데, 수분이 닿으면 숨겨진 무늬가 떠오르는 재질 말야. 혹시 알아? 니가 평범한 흰색 팬티가 아니라 물이 닿으면 곰돌이 무늬가 떠오르는 재질로 된 팬티를 입고 있을지?

예지는 어이가 없었다.

마...말도 안 돼! 누가 그런 팬티를 입어!
모르지. 맨날 곰돌이 팬티만 입고 다녔던 너라면 충분히....
아니거든!
그러니까, 지금 확인해 본다잖아.
확인을 왜 그런 터무니 없는 방법으로....

물을 닿으면 무늬가 떠오른다고 혀로 핥는다? 예지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고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재혁이 시큰둥하게 말한다. 

싫으면 그냥 가. 나도 집에 갈테니까.
뭐어? 수업 아직 안 끝났어.
이런 병신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학교에 오래 있으려니까 쪽팔려 죽을 것 같애. 니가 확인도 안 시켜주는데 나라고 뭐, 계약을 지킬 의무는 없는 거잖아? 그럼 그냥 가야지. 뭐.

삐진 것 같은 재혁의 말투에 예지는 조금 다급해졌다.

야! 너, 이제 겨우 선생님들이 너한테 칭찬을 하는데 그런 식으로 가버리면...
그러면 확인시켜 주던가.

예지는 이 놈을 악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은 악마와 계약을 맺어버렸다. 허벅지에 저절로 힘이 빠졌다. 재혁의 머리를 조이고 있던 허벅지가 스르륵 좌우로 벌려진다.

그럼, 확인한다?
니... 마음대로 해. 대신, 확인이 되면... 너 학교 끝날 때까지 얌전하게 있는 거야. 알았어?
그야 물론이지.

예지는 거듭 재혁의 확답을 요구했다. 재혁은 틀림없이 약속을 지키겠노라고 선언하고는 다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제는 녀석의 숨결이 와닿던 그녀의 팬티 표면으로, 이제는 녀석의 혀가 와 닿는다.

흡....이....이상해.
움찔거리지 좀 마. 그대로 가만 있어.

재혁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에 얹어진다. 바깥쪽을 향해 살짝 밀어낸다. 허벅지 속살에 와닿는 타인의 감촉이 생경하기는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생경하기 짝이 없는, 기이하다고도 할 수 있는 감촉이 은밀한 부위에 전해지고 있다. 다리 사이에서부터 스멀스멀하게 피어오르는 어떤 낯선 감촉이 예지의 몸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츄릅- 츄릅- 츄릅-

처음에는 혀끝으로 조금씩 대어보던 재혁의 동작도, 이제는 점점 더 과감성을 더해가고 있었다. 팬티 전체를 핥아먹을 것처럼, 그렇게 혀 전체가 그녀의 둔덕 위를 농락한다. 재혁의 혀에서 묻어나는 침이 문제가 아니었다. 다른 무언가가... 그녀의 팬티를 더 적시고 있었다. 스멀스멀.... 자신의 느낌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고 있다. 이대로 안쪽에서부터 녹아내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자꾸만 든다. 안 돼... 안 돼... 이러다가는 이상해질 것 같아. 그런 생각이 예지의 내면을 휘어잡으려고 한다. 예지는 눈을 크게 떴다.

그...그만해! 이제 충분하잖아!!!

간신히 재혁의 어깨를 잡고 밀어낸다. 예지는 숨을 헐떡이며 재혁을 쳐다보았다. 재혁은 입가를 훔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두 시선이 그렇게 한참을 마주하고 있었다. 예비종이 울렸다. 두 사람은 황급히 교실로 돌아왔다. 교실로 돌아오는 동안,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예지는 수업이 시작되고도 한참동안이나 쿵쾅거리는 가슴을 억눌러야 했다. 축축해진 팬티의 느낌이 어쩐지 묘했다. 아직도 재혁의 혀가 그녀의 다리 사이를 핥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자, 이럴 때는 말이지.... 어디, 반장이 대답해볼래?
네?!

수학 선생이 예지를 보고 있었다. 딴 생각을 하던 예지는 반응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반 전체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나중에야 알아차린 예지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수학 선생이 다시 묻는다.

방금 선생님이 써놓은 식을 미분하면 어떤 그래프가 나오지?
저....그게.... 그러니까.....

질문에 답을 못 하다니. 예지가 학교에 들어온 이후 처음 직면한 사태가 틀림없다. 수학 선생은 반농담조로 말했다.

이게 바로 너희가 물리시간에 배우는 에너지 보존 법칙이라고 하는 거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의 총합은 일정하지. 지금 너희 반의 에너지도 아주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구나. 최고 문제아가 멀쩡해지니까 최고 우등생이 수업시간에 딴 생각을 하는군. 음, 역시. 우주의 법칙이야. 딴 짓의 정도가 아주 일정해.

아이들의 폭소가 터져나왔다. 웃음거리의 대상이 된 예지는 어쩔 줄 몰라 고개를 푹 숙였지만 또 다른 대상자인 재혁은 그냥 웃고 넘기고 말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그날 저녁, 예지는 같은 재단의 대학교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축제 전까지는 야간자율학습을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녀는 공부할 곳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교복을 입고 도서관에 들어올 때 수위가 한 마디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막지는 않는다. 자리에 앉아 책과 문제집을 펼쳤지만 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후 수업에 당한 창피가 아직도 머리 속에서 마구마구 떠오른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 연습장에 대고 거칠게 선을 죽죽 긋다가 결론을 내렸다.

'다시는 재혁이랑 얽히지 않을거야!'

사실 아까부터 주머니에서 진동이 계속 울리고 있었다. 문자가 계속 왔기 때문이다.

[어디갔어? 나랑 어디 좀 가자.ㅋㅋ]
[애들한테 물어봤더니너 대학교에서 공부한다며? 거길 왜 Jㅋㅋㅋㅋ]
[나와라. 나 앞에 있ˆい빱빱?
[빨žㅋㅋㅋㅋ]

누가 보냈는지 안봐도 훤했다. 예지는 애써 무시했다. 전화도 왔지만 받지 않았다. 계속 진동이 울리는 것도 신경이 쓰여서 아예 배터리를 빼버리고 공부에만 집중했다. 처음에는 좀 어려웠지만 그래도 하던 가락이 있는 녀석이라 얼마 지니지 않아 평소의 리듬을 되찾았다. 주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벌써 이렇게 됐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시계를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평상시에는 열한시 정도까지만 공부를 하곤 했는데 벌써 열두시가 넘어갔다. 예지는 가방을 챙겨 귀가를 서둘렀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정리했다. 옷을 갈아 입을 때, 팬티에 손을 대다가 재혁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팬티를 벗다가 생각이 나다니, 최악이야.'

예지는 투덜거리면서 가방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배터리를 연결하고 켠다. 로딩이 끝나고 화면이 뜨자 거기에는 그녀가 받지 않은 통화와 확인하지 않은 문자 수가 표시되었다.

'부재 중 전화 3개,
읽지 않은 문자 24개.'

'세상에나.'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한다. 문자 몇 개를 읽어보던 예지는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전화를 건 사람과 문자를 보낸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운동화를 꿰어신고 도서관으로 향하면서 문자를 하나하나 읽어본다.

[야, 여기 좋다. 여대생들 몸매 죽이†땄빱빱?
[너 열람실 어디야. 못 찾겠ˆい빱?
[추워디지겠네. 초여름인데왜케추엌ㅋㅋㅋ]
[정문에서기다리니까일루나와. 딴데로 가지말고]
[씨발 니진짜안나오면나내일학교짼다? 구라아님]
[야, 나배터리오링이야.ㅋㅋㅋ 빨랑와.]

그런 식의 문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문자의 흐름을 보아 재혁은 도서관 앞에서 그녀를 죽 기다린 모양이었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꺼져있다는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예지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도서관 정문으로 갔다. 급히 뛰어오느라 몹시 숨이 찼다.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억누르며 주변을 살핀다. 야심한 시각이라 사람의 왕래가 뜸했다. 술에 취한 대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며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서관 근처에서 한 얼굴을 찾아 헤맨다.

야! 이재혁!

정문에서 조금 비껴난 곳에 있는 계단, 거기 맨 아래에 누군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푸른 빛의 가로등 아래에 드러난 그 모습을, 예지는 단번에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벽에 기대어 있던 머리가 스르륵 바로 선다.

어... 왔냐?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그러질 않는다. 예지는 미안한 마음에 오히려 더 세게 말한다.

왔냐가 뭐야, 왔냐는. 여기서 뭐해.
뭐하긴. 너 기다리잖아.
누가 기다리래?
내 마음이지.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 했어.
어쩌긴. 니 핑계 대고 내일 하루 학교 째는 거지. 크큭.

여름에 접어들고 있다고는 하나 한밤중의 바람은 꽤 싸늘했다. 반팔차림의 재혁은 몹시 추워보였다. 예지는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너 정말!!
알았어, 알았다구. 앞으로는 니 연락 없으면 나도 따로 연락 안하마. 그럼 됐지?
되긴 뭐가 돼.

재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엉덩이를 털었다. 그리고 예지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근데 이 시간에 기집애가 막 돌아다니고.. 그래도 되는 거야?
뭐? 기집애?
집에서 뭐라 안 하셔? 늦게 다닌다고?

예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답하기 조금 곤란했다. 재혁도 뭔가 눈치챘는지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가자.
어딜?
어디긴. 넌 집에 안 가?
가야지... 근데 니가 왜 따라와?
기집애 혼자 가게 둘 순 없잖아.

예지는 데려다주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히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또 재혁이가 놀리기 시작할까봐 말을 아꼈다. 별다른 이야기없이 계속 걷던 두 사람은 예지의 집 앞까지 도착했다. 예지가 도착했다고 이야기하자 재혁은 낡은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기야?
응.
....전에는 여기가 아니었잖아.
몇 년 전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런가....

재혁이 기억하는 예지의 집은 임대아파트가 아니었다. 예지의 집을 자기 집과 같이 마당이 딸린 양옥으로 기억하고 있던 그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그는 자신이 놀란 기색을 감추기 위해 예지에게 일부러 짖‚œ게 말을 건넸다.

내일도 곰돌이 안 입을 거지?
아, 진짜. 그런 팬... 암튼, 그런 무늬, 이제는 안 입는다고 몇 번을 말해.
그야 네 팬티를 다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지.
뭐라고?

확인이라는 말에 예지는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버렸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다행히도 밤의 어둠이 그런 그녀의 표정을 감추어주었다. 

또...또 하겠다고, 그런 일을?
그야, 뭐. 당연한 거 아니었어?

기가 막힌 예지가 무어라 외치기도 전에 재혁은 몸을 돌렸다. 손을 한번 들어보이고는 그대로 자기 집으로 향했다. 예지는 자기 할 말을 못 한게 좀 분하기는 했지만 재혁의 뒷모습을 지켜보면서 어쩐지 화가 누그라들었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결석?
네....

3교시가 끝나고, 예지는 교무실에서 담일을 만났다. 재혁이 결석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담임이 예지를 불렀기 때문이다.

하루... 얌전하게 지내는 게 고작이었나. 거참, 녀석.
죄송...해요.
반장, 니가 왜 죄송해? 니가 나오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야....

예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도서관에서 나오라는 재혁의 메시지를 계속 무시한 건 그녀였다. 물론 일방적인 메시지이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게 마음에 몹시 걸렸다.

전화기는 꺼있고, 집에서는 아무도 안 받고....
혹시 부모님한테 안 해보셨어요?
부모님?

담임은 예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예지는 왜 그렇게 쳐다보나 궁금했다. 담임은 조금 주저하다가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는데 말야. 걔네 어머니가 계시다는 미국은 지금 한밤중일테고, 아버지한테는 뭐, 연락해봤자 별수 있겠어? 서울에서 여기로 내려오지도 않을텐데 말야.
미국이요? 그리고 서울이라니....?
어? 너 몰랐어? 재혁이 어머니 미국에 가 계신 거? 그리고 아버지도 같이 안 살고...

예지는 고개를 저었다. 담임은 손가락으로 자기 책상을 몇 번 두드리다가 예지에게 말했다.

음.. 너도 잘 몰랐구나. 뭐, 그 녀석이 결석하는 거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정도이지만... 그래도 어제는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를 보여줘서 말야. 너의 역할에 한 50% 정도는 기대를 했었거든. 그래서 혹시 아는 게 있나 싶어서 불러보았어. 됐다. 교실로 돌아가봐. 별 일이야 있겠니.

예지는 고개를 꾸벅하고 교무실을 나섰다. 미국과 서울이라. 하나같이 가깝지 않은 동네다. 그나마 서울이야 여기서 기차를 타고 서너시간이면 도착할 곳이라고는 하나 미국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부모님들이 다들 거기에 있다고? 그렇다면 왜 재혁은 일찌감치 전학을 가지 않은 거지? 게다가 재혁의 아버지는 이 지역의 국회의원 아니었던가? 하나같이 그녀로서는 이해 안 가는 것 투성이다. 어제와는 또 다른 이유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여전히 수업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행여 또 보여지게 될까봐 신경써서 차려입고 온 팬티까지 그녀의 머리 속을 복잡하게 했다.

'다시는 재혁이랑 얽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예지의 발걸음은 머리 속 생각과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다. 학교가 끝나고, 예지는 재혁의 집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제정신이야? 제발로 여길 오게?'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지만, 스스로는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인터폰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