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원 나잇 - 2부

꼬마들 심부름 오면 꼭 잔돈대신 초콜릿을 줘 꼬마에겐 찬사를, 부모에겐 분노를 자아내던 태평마켙. 그 엇나간 표기는 주인의 엇나간 심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푼돈 챙겨먹던 태평마켙 골목으로 들어가면 수은 가로등이 듬성듬성 서 있었다. 전봇대 사이로 전선들이 무기력하게 늘어지고, 그 가운데 붉은 벽돌의 연립주택이 있었다. 우리 집이다. 3층이었었는데 2층은 우리 집이었고, 1층은 미소네 집이었다. 이는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결국 내 자아의 발원지에서조차 우리는 함께였던 것이다.

사실 이만한 과거의 극점까지 오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얼마 없다. 다 헤진 기억 조각이 몇 장 있을 뿐. 내 동생 분유를 놓고 너 한 입, 나 한입 했던 것이나 튜브 풀에서 물장구 쳤던 것, 혹은 엄마 사라져 울고 있으니 미소가 달래주러 왔다가 저도 같이 울어버린, 그런 것들. 이 정도의 단편이 전부다.

그 후의 기억 또한 생생하진 않다. 노란 뼝아리 모자 쓰고 유치원 갔던 것. 미소와 함께 삼천 얼마짜리 그랑죠 산다며 이웃 동네 갔다가 길 잃어버린 일. 그 때문에 둘 다 엉덩이 맞고 내복 차림으로 쫓겨난 일까지. 유아기 내내 함께했음에도 특별한 추억은 거의 없다.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일상이었기 때문 같다. 결국 일상이란 인지 속 인식 못함이니까. 존재가 당연해지는 것이다. 산이 그곳에 자리하는 것은 누구도 토 달지 않는다. 하늘이 푸르다고 감동하는 사람은 없다. 존재함은 알고 있으나 특별한 의미부여는 않는다. 미소의 존재는 그러했다. 일상 그 자체였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다만 가족만큼 특별하기도 했지만.

그 시절을 두고 우리 어머니는 남매와 다름없었다 말씀하시곤 한다. 나 또한 부정하지 않는다. 나만큼 식탐 많던 꼬마가 쌍쌍바 반 뚝 잘라 주고 알껌바 껌 나눠 씹었으면 말 다했다. 누군가 가장 친한 친구 누구냐고 물으면 미소요! 하고 누구랑 결혼 할래? 하면 미소랑 할 거야, 했었으니 전형적인 소꿉친구 레퍼토리의 답습이었다.

아주 가관인 시절이다. 여자가 뭔지도 모를 어린놈이 까져가지고.


초등학생이 되어도 딱히 변화랄 것은 없었다. 노란 모자 쓰고 유치원 갔던 우리가 한 손엔 신발주머니, 다른 손으론 서로의 손을 잡았단 것 정도의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이는 풍경의 변화이지 존재의 변화는 아니다. 산이 단풍 입었다고 산 아닐 수 없고, 시내가 어제의 물을 흘려보냈어도 오늘도 여전히 시내인 것처럼. 미소가 일상이었기에 변화하는 풍경 또한 일상이었고, 우린 그렇게 더 가까워졌다.

팽이치기하면 미소가 줄 감은 88 올림픽 팽이를 건네 줬고, 인형놀이하면 내가 바비인형 머리를 빗겨줬다. 취향도 관심사도 달랐지만 생각보다 잘 놀았다. 내가 학종이 따먹기로 한 움큼을 따오면 미소는 조막만한 손으로 학을 접었다. 그 모습은 장 봐온 남편과 요리하는 아내, 혹은 선사시대에 사냥감 들고 온 남편과 무두질 하는 아내 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뭔가 엇나가는데 요점은 궁합이 잘 맞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가꺼아!”에서
“겨론하꺼야.”를 거쳐
“결혼할래.” 까지 갔다.

대체 뭐라는 건지 모르겠는 가꺼아는 뺀다 쳐도, 겨론하꺼야에서 결혼할래까지의 시간을 계산해보면 어언 몇 년이다. 즉 장기간의 약혼이었다. 그 시간 속에 결혼상도 더 거창해졌으니. 내가 공주님 드레스를 약속하면 미소는 집채만 한 쇠팽이를 약속했고, 나중에 가선 변신 로봇과 마법소녀 정도까지 발전했다.

결혼 예물이 뭐 그리 많은지. 차 한 대도 굴리기 힘든 세상에 변신 로봇 삼종 세트-슈퍼카, 기차, 전투기 정도-는 무엇이며 개인정보 유출되는 사이버 시대에 누구도 정체를 모르는 마법 소녀 신분 제공은 또 뭔지. 그러나 그 나이에는 그 모두가 허황된 꿈이 아니었다. 끽해야 초등학생. 생각하는 것은 모두 이룰 수 있다 믿는 나이였으니. 돈 많이 벌어 결혼하자 찍은 손가락 도장에 거짓은 없었다. 엄마들은 귀엽다고 웃으셨지만 우리는 진실 되게 약속했다. 참 순수하고 가식 없던 시절이었다.

그 후에 파혼이 없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하긴 어린 시절 약속을 놓고 ‘우리 약혼 없던 걸로 하자, 좋은 추억으로만 남겼으면 좋겠어. 좋은 사람 만나. 안녕, 행복해야 돼.’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나름 머리 컸다 자부하는 초등학생 끝물이 되어선 그 땐 그랬지. 하며 희미하게 기억만 할 뿐이었다. 약혼은 추억이 되고, 우린 약혼자에서 다시 소꿉친구로 돌아갔다.

변한 것은 또 있었다.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Y2K니 밀레니엄이니 했던 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리라 본다. 삐삐와 걸면 걸리는 걸리버의 자리를 64화음 벨소리 폰이 채우고, 천리안 하이텔의 자리를 메가패스가 이순신 장군을 앞세워 빼앗았다. 아이들은 더 이상 샤니의 포켓몬스터 빵을 먹지 않고 디지몬을 보았으며 옆집 누나는 HOT 해체 소식에 피켓과 눈물을 떨어뜨렸다.

나 또한 변화의 급류의 휩쓸렸다. 게임과 게임, 그리고 온갖 게임과 게임까지. 학교만 끝나면 바람 부는 나라의 디아블로에게 빨콩 더블을 쏘려고 광도 들고 PC방으로 향했다. 그런 판국이니 미소와의 시간은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반도 달랐으니 가끔씩 마주치는 것이 만남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딱히 위화감은 없었다. 일상의 변화는 그 자체로 일상인 법.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이만큼이나 변해 있었다, 하는 변화였다. 그러나 그 때는 그 어느 순간이 찾아오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게임에 빠져있었던 탓이다. 게다가 딱히 미소와 싸우지도 않았던 데다 그녀는 여전히 친구라 생각했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어선 조금 달랐다. 내가 미소의 변화를 감지한 것은 그 즈음 부터였다. 그 때는 그녀의 변화를 놓고 ‘요즘 따라 뭔가 달라졌어.’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훗날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미소는 성장이란 변화를 늘 계속해 왔다. 그러나 그 변화가 일상이었고, 난 변하는 모습을 눈으로만 인지했을 뿐 머리로 실지 인식하진 못했던 것이다. 인식을 위해서는 변화를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는 ‘어느 순간’이 도래했어야 했다.

중학생 때가 바로 그 ‘어느 순간’ 이었다. 사춘기란 이름으로 찾아온 나의 변화는 미소를 다시 보게끔 만들었다.

결국 일상의 비 일상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원하는 술 있으면 골라봐.”

잠깐 동안의 침묵을 깬 것은 미소였다. 말실수한 것은 분명 나인데 먼저 나서는 것이 미안했다. 남자답지 못했겠지. 이젠 좀 제대로 하잔 마음으로 메뉴판을 쫙 훑어다. 그런데 있는 것이라곤 필기체로 흘러가는 꼬부랑글씨뿐이다. 읽어낼 수 있는 것은 럼이니 위스키 정도 뿐이었고, 그 외의 것은 읽는 다기 보다 해독에 가까웠다.

“소주는 없어?”

혹시나 해서 묻자 미소는 곧바로 대답했다.

“데킬라는 있어.”

미소의 손가락이 메뉴판 한 구석을 쿡 누른다.

TEQUILA

됐다. 좀 전까지만 해도 데킬라가 D로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무슨.

“맥주는?”

미소의 손가락이 그 밑으로 주욱 미끄러졌다.

HOMEMADE DRAFT BEER (350 CC) ……… \ 15.000

뭐냐 이건. 홈메이드 드래프트란 건 수입 맥주 상푠가. 대체 무슨 술이기에 350 CC 주제에 호프집 3000 CC 가격을 받는 것인지.

“맥주 마실래?”
“아, 음. 아니야. 됐어.”
“그럼?”

역시 무책임을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가 보다.

“아무거나.”

선택권이 다양해질수록 포기권의 유혹이 강해진다. 그런 말을 들은 적 있는데 역시 거짓말이 아닌가 보다.

“그럼 내가 자주 마시는 걸로 할게. 괜찮아?”

난 그냥 힘없이 끄덕였다. 미소는 메뉴판을 덮고 바텐더를 불렀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왜 메뉴판을 보여줬는지 모르겠다. 위축된 내 몸은 술을 들이키기도 전에 어색함에 한껏 취했다. 미소는 바텐더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능숙하게 주문했다. 난 벌 받는 꼬마처럼 잠자코 눈치만 보았다.

바텐더는 금세 술 한 병과 얼음을 날라 왔다. 저 태그에 적인 것을 뭐라 발음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위스키겠지. 하긴, 애초에 위스키 말고 다른 양주를 알지도 못한다. 미소가 뚜껑을 열자 투명한 병 안 쪽에서 호박색이 일렁였다. 그 청명한 빛깔은 여태껏 먹어 본 스카치블루나 시바스리갈 따위랑 비교도 못할 만큼 청명했다. 이에 비하면 캪틴큐는 똥물이지 싶다.

그러는 사이 미소가 내 글라스를 채웠다. 황급히 술잔을 받자 미소가 피식 웃으며 타박했다.

“어우야. 뭐야, 그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른에게 술 받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 그게.”
“좀 편하게 있어라. 내가 다 긴장 된다.”

나라고 안 그러고 싶겠냐. 그러나 평정심을 유지할 수가 있어야지.

내 앞의 여자가 정말 그 미솔까. 그녀는 그런 의심이 들 만큼 아름다웠다. 귀동냥으로 이태원이나 청담동쯤의 여자들이 그렇게 예쁘다 듣긴 했다. 실제로 보기에도 그랬고. 그러나 미소는 그보다 더 했다. 이 정도면 거의 연예인 급이다. 그렇다고 딱히 차려입은 것 같지도 않다. 코트 속엔 얇은 재질의 블라우스와 가죽 스커트가 전부고, 시계나 반지 같은 장신구도 하나 없다. 그런데도 슬쩍 다리 꼬아 앉은 것만으로 갖은 기품의 태가 묻어 나왔다. 아마 이만한 수준의 여자를 만나는 것은 평생 요원하겠지. 로또 비슷한 확률일 거다. 소꿉친구란 사실이 아니었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일 거다.

이것만 해도 버거운데 지난 기억들까지 날 괴롭힌다.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되살아나는 옛 기억들. 삐뚤어진 열등감과 바닥까지 추락했던 추한 내 꼬락서니. 그리고 미소의 마법이 빚어내는 우열관계까지. 그 모두가 한데 엮이며 쓴 맛을 자아냈다.

위액이 역류하나. 아니면 백태가 썩는 걸까. 혹 무엇이 되었다 해도 이보다 더 쓰진 않겠지. 혀를 차며 침을 삼켜보지만 그 소태 같은 쓴 맛은 여전했다.

“짠?”

미소가 잔을 들어 올렸다. 그래. 차라리 술이나 마시자. 술이 아무리 써봤자 이보다 더 쓰겠냐. 쓴 맛 때문에 지어지는 쓴 웃음 속에 잔을 마주 댔다.

“짠.”

서로 잔을 맞대고 각자 입을 맞댄다. 난 그 순간 굳어졌다. 이게 정말 술인가? 아니, 이만큼 부드러운 술도 있었나? 식도로 넘기지도 못하고 입 안에서 머금고 있으니 강렬한 향이 한 번 더 휘몰아쳤다. 보통 술이 아니다. 소주나 마시는 나지만 알 수 있었다. 조심스레 삼켜보니 목 넘김의 질감 또한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조심스레 음미하고 있는 사이 미소는 이미 두 번째 잔을 넘기는 중이었다. 마치 물마시듯 꿀떡. 마시는 기세를 보니 술자리가 금방 끝날 것 같진 않았다. 아마 이 병을 반 이상 비우지 않고선 못 일어나지 않을까.

“연규야.”
“어, 응?”
“술잔 쥐고 고사 지내?”

억지웃음과 함께 답했다.

“아냐.”
“우리 사이에 왜 그래. 자꾸.”

우리 사이? 내 자신에게 되물었다. 나와 미소가 무슨 관계였나. 명목상 친구 관계쯤은 되겠지. 누가 묻는다면 친구라 답할 테고. 그러나 딱 그 정도 관계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피하고 싶은 상대, 남보다 못한 관계, 친구이지만 친구 아닌 사이. 이거 아주 주르륵 나오네. 결국 우리 사이는 안 좋은 쪽으로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복잡함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생각하는 중이었다. 순간 뭔가가 번뜩였다. 깨달음. 그것은 번뇌를 끊는 해탈처럼 일순 분출했다.

엄밀히 말해 미소와 난 친구가 아니다. 그런데 왜 친구 대하는 것처럼 속내 다 터놓은 걸까. 맑아진 머리로 미소를 마주했다. 열등감이 끓어오른다 해도 아닌 척 의뭉 떨 수 있지 않나? 거래처 접대 한 두 번 해본 것도 아닌데 그 비슷하게 하면 된다. 못할 바도 없다. 어른답게 어른의 술자리처럼. 그러면 되는 건데. 이게 만화였다면 물음표 안에 !!를 그려 넣을 상황이었다.

“미안, 좀 피곤해서 그랬나 봐.”

미소가 나의 이런 행동을 불편해 하고 나 또한 미소가 불편하다면? 가식 떨면 된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를 뻔 했다. 아무래도 난 병신과 머저린가 보다. 이토록 간단한 것을.

“일 이년 친구 사이도 아닌데, 그러게.”

능글맞게 대꾸하자 미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녀는 갑작스런 변화를 재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관두었는지 제 술잔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자작하려는 것을 보고 난 재빨리 끼어들었다.

“왜 자작하냐.”

병을 빼앗아 잔을 채워주었다. 아예 접대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자작하면 3년 간 재수 없다는데.”
“그 3년 이미 다 지나갔거든?”

미소는 웃으며 잔을 삼켜버렸다. 그 스탠드 플레이에 옛날 룸살롱에게 수십만 원을 뿌려대던 졸부가 떠올랐다. 접대만 아니었다면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 미소에게서 그 모습을 떠올린 것은 술이 아무리 비싸봤자 얼마나 하겠냐는 듯 한 행동에 기인한 탓일지도 모르겠다. 미소는 이 비싼 술을 싸구려 맥주 들이키듯 마셔대고 있었으니까. 마치 돈 넘쳐난다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 술 좀 받나 봐. 잘 마시네.”

말을 하며 은근슬쩍 미소의 샷 글라스를 빼앗았다. 그리고 얼음 채운 잔에 술을 타 그녀의 빈손을 메워줬다.

“그래?”

아이고, 사장님. 왜 그렇게 급히 마시십니까. 그런 뉘앙스를 말 뒤에 감추고 잔을 밀어준다. 골뱅이나 취객 뒤치다꺼리는 사절이다. 이 자리를 일찍 끝내고 빨리 집에나 가자. 그런 생각으로 이루어진 컨트롤이었다.

미소는 그 속내를 알기라도 하듯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좀 전처럼 잔을 대뜸 삼켜버렸다. 페이스를 늦출 생각 따윈 없어 보였다. 오히려 능청스레 빈 잔을 내밀며 다음 잔을 요청했다.

“뭐 이리 잘 마시냐.”

영업용 미소가 무너지진 않았겠지. 안면 근육을 만지고 싶은 마음을 눌러 담으며 잔을 채웠다.

“나 예전부터 잘 마셨잖아.”

변명하고 있네. 그런데 내가 미소와 술을 마셔본 적이 있었나? 아니, 없었다.

“옛날에 거북알 사건 기억 안나?”
“웬 거북알?”
“있잖아. 네거 다 뺐어먹었다고 너 찔찔 짰던 날.”
“아.”

기억난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다. 용돈 받아서 거북알 하나 사들고 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집에 가위가 안 보였다. 난 거북알을 들고 미소 집으로 내려갔다. 미소는 헤헤 웃으며 교환 조건으로 맨 처음 한 입을 요구했다. 꼭지 잘라도 쫄쫄 새어나올 뿐이니 뭐, 얼마나 먹겠어. 난 그렇게 생각하고 거래를 수락했다.

그런데 미소의 가위질은 너무 깊숙이까지 파고들었고-어쩌면 일부러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아이스크림 알맹이는 뽕, 하며 고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미소는 아차 싶었는지 그 큰 덩어리를 그대로 삼켜버렸다.

“미아우.”

미소는 조막만한 입을 가득 메우고 중얼거렸다. 난 그 모습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내 건데. 내가 사온 건데. 오라질년.

“기억 나?”
“덕분에 아주 잘 떠올랐다. 이 도둑놈아.”

미소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근데 이거랑은 다르지 않냐?”
“이거나 그거나. 넘어가면 똑같지.”
“똥꼬집이네.”

일부러 강하게 발음하자 미소는 더욱 크게 웃었다. 왠지 민망해져서 슬쩍 변명했다.

“근데 찔찔 짜다니. 그 정도까진 아니거든?”
“너, 너희 아줌마한테 닌텐도 사달라고 땅바닥 굴러다닐 때보다 더 울었거든?”
“그런 적 없어.”
“내가 다 봤네요. 그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니야?”

뱀 굴도 아니고 파고들수록 더 튀어나온다. 무안해져 술잔만 비웠다. 그러나 미소와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이런 장난스러움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유들유들한 성격이기도 했고, 장난 쳐도 도를 안 넘는 절제심에 친구도 많았지. 아마 지금도 그럴 거다.

“하여간 기억력도 좋아.”
“너니까 기억하는 거야.”

미소는 혀를 살짝 내밀며 웃었다. 일순 심장이 두근거릴 뻔 했다. 만약 멍청히 있었다면 이것만으로 혹 했겠지. 그러나 가식의 탈을 쓰고 있는 덕분에 천연덕스러운 대꾸가 절로 튀어나왔다.

“나니까 앞으론 잊어줬으면 하는 바람.”

말을 마치며 가식의 탈을 한층 더 단단히 했다. 미소에게서 옛날 모습이 엿보일수록 버티기가 힘들다. 슬금슬금 심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동시에 내가 묻어둔 열등감 또한 스멀스멀 기어 나왔기 때문이다.

“절대 안 잊어.”
“아이구야.”

우리 둘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웃어 제쳤다. 그러나 내 허파는 공갈 웃음으로 가득차기만 했다.

웃음이 가라앉자 타이밍 좋게 바텐더가 다가왔다. 그는 카나페와 마른안주를 내려놓고 자연스레 물러났다. 미소는 테이블 위의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주며 말했다.

“먹어, 부족하면 더 시키고.”
“왜. 그 때 거북알에 대한 사죄냐?”

미소는 대답 대신 잔을 내밀었다. 뻔뻔스럽다.

이건 무슨 주량 내기 하는 것도 아니고. 병을 보니 벌서 삼분지 이 가량으로 줄어 있었다. 아직 30분도 안 지난 것을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하이 페이스였다.

“또 달라고?”
“응.”
“뭐가 그렇게 급해. 누구 쫓아오냐. 아니면 통금 전까지 달리자 이거야?”

미소는 바보 같을 정도로 활짝 웃었다.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서.”

정상적인 웃음인데도 이상하게 부자연스럽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딱히 해후의 기쁨을 나눈 사이는 아니다. 그렇다고 싸우고 절교한 것은 아니다. 어릴 적 약혹이 파혼을 맞은 것도, 혹은 파경을 맞은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뒤틀렸던 관계 그대로 헤어진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나 혼자만의 뒤틀림이기에 나만 의식하고 불편해 할 수는 있겠지. 그러나 내 찌질한 행동으로 미소가 상처 안 받았을 리가 없다. 그녀 또한 조금 불편해 해야 정상인 것이다. 그런데도 왜 이리 살가울까.

“그러게. 좋다.”

난 본심을 숨기고 짧게 대꾸했다. 미소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미소는 말의 여운을 즐기며 잔을 흔들었다. 그리고 흘러가듯 물었다.

“근데 요즘 뭐하고 지내?”
“나야 뭐, 일하지.”
“무슨 일 하는데?”

올 게 왔다. 무방비 상태에서 질문 받았다면 어버버하며 무너졌겠지.

척 봐도 지금의 미소는 나보다 잘 벌고 잘 먹고 잘 산다. 그것은 곧 미소 밑에 깔려버린 내 과거와 연결되는 것이다. 과거의 열등감과 지금의 열등감이 연결되어 자격지심으로 발전하기 전에, 난 먼저 선수를 쳤다.

“그냥 평범한 회사 다녀.”
“할 만 해?”
“그냥. 다들 그렇잖아. 똑같지.”

두루뭉술하게 넘어갔음에도 미소는 수긍했다.

“하긴.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난 술을 한 모금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 넌 뭐하는데?”

사실 묻고 싶지 않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미쳤다고 내 열등감 키울 만한 짓을 할까. 미소의 근황은 그런 의미에서 지뢰와도 같았다. 그러나 대화의 흐름상 피해갈 수 없었다. 난 이를 악 물며 지뢰 위로 발을 내딛었다.

“나도 그냥 일하면서 살아.”

불발 지뢴가? 처음의 돈 이야기처럼 반 쯤 자랑하며 이야기 할 거라 생각했는데.

“하긴 백수 같아 보이진 않더라.”

미소는 깔깔대며 웃었다. 모습을 보니 더 이야기 할 마음도 없어 보였다. 지뢰인줄 알고 밟아야 해서 마음 단단히 먹었는데 어 깡통이네? 이런 니미. 그 쯤 될까.

“아, 배 땡겨.”
“땡길 뱃살도 없으면서.”
“못 본 사이에 입만 늘었어.”

미소는 어느새 옅어진 웃음기 속에 백을 뒤졌다. 그러다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혹시 담배 펴?”
“아니. 안 피는데.”
“나 펴도 돼?”
“응, 펴. 난 상관없어.”

미소는 슬림한 담배를 꺼냈다. 그 때 알아차렸다. 미소의 다섯 손톱이 붉게 칠해져있음을. 눈에 확 띄는 색첸데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미소는 자연스레 두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넣었다. 손가락이 담배를 좌우에서 애무하는 것 같았다. 라이터를 켜는 손놀림은 아예 관능적이기까지 했다. 미소가 요염한 동작으로 불을 붙이자 담배 연기가 테이블 위 정지된 공기 위로 피어올랐다.

내 침 넘어가는 소리가 몸속에서 크게 울렸다. 그러나 관능에 혹한 정욕과 별개로, 내 버리는 붉은 매니큐어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중이었다.

일상은 자연스러움을 그 특징으로 삼는다. 내가 저 매니큐어를 눈치 못 챈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요염함이 그녀의 몸 곳곳에서 피어나니 매니큐어 또한 그냥 지나쳤겠지. 저것이 미소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지뿐이던 것을 인식한 지금, 그 이유를 생각해 봐야 했다. 중학생 때처럼 나를 변화시킨 것이 있을 터였다.

위화감 때문 일까? 옛날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세련되고 관능적인 미소. 그 변모한 정도 때문인지. 아니면 이 술자리의 시작부터 느끼고 있었던 이유 모를 위화감 때문인지. 그렇게 자문자답 할 때였다.

“네가 회사 가는 거 상상이 안 간다.”

미소가 연기를 훅 뱉어내며 중얼거렸다. 농담조로 던진 말이겠지만 농담처럼 들리진 않았다. 미소의 존재 자체가 껄끄러웠으니까. 정신을 차리자 나도 모르게 가시 뱉은 말이 튀어나오는 중이었다.

“나도 너 가수 될 줄 알았거든?”

병신.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실수하는 거냐. 난 아차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미소가 만일 가수가 되었다면 음악과 관련된 뭔가가 있어 보이겠지. 그러나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폭음하며 담배까지 한다면 끝난 이야기다. 결국 이 한 마디는 뼈 있는 조롱일 뿐이었다.

“아, 그거.”

그러나 미소의 어투는 담담했다.

“뭐 비슷하게 살아. 노래나 이거나.”

미소는 그 말만 마치고 입을 다물었다. 담배 연기가 좀 더 뿌예졌다.

뭐 하냐고 물어야 할까. 말해도 될까. 미소는 날 힐끔 보고는 덧붙였다.

“전부 그게 그거다 싶더라고.”

그게 그거다. 거기서 거기다. 그 비슷한 말이 몇 번째인지. 방금 전 것까지 다섯 번은 듣지 않았을까. 자포자기 같은 표현에 위로를 건넬까도 했다. 그러나 미소는 덤덤해 보이기만 했다. 체념인지 인정인지 알지는 못해도, 별반 관심도 없어보여 위로해야 할지 맞장구 쳐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안 그래?”

난 잠시 고민하다 고개만 끄덕였다. 미소는 마른 웃음을 지어보이며 건배를 청했다.

“친구란 거 역시 좋다.”

난 떨떠름한 심정으로 잔을 들었다. 역시 뭔가가 어긋났다. 그녀의 말이 계속될수록 확신이 들었다. 미소를 힐끗했으나 그녀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잔을 삼키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나와 같은 위화감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이 이상할 만큼의 살가운 태도는 뭘까. 나의 심리적 우리의 물리적 거리의 수십 수백 배 였다. 8년간의 침묵과, 학창 시절의 열등감과, 접대용 태도가 빚어내는 거리감이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미소도 이런 거리감을 느껴야 했다. 미소도 사람이라면 응당 그래야 했다. 우리가 가족도 아닌데. 그렇게나 뒤틀린 채로 헤어졌는데 이만큼이나 친근하다? 대화가 이토록 매끄럽다?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 순간, 다 비워진 잔에서 풍기는 잔향을 뚫고 익숙한 내음이 내 코를 찔러왔다. 거짓의 향취. 허무함으로 코를 마비시키는 가식의 냄새. 내 쪽의 것이 아니다. 미소의 향수 냄새 속에 미약하게 섞여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미소도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나처럼 친구인 척, 친한 척 가식 떨고 있구나. 멍청하긴. 미소의 겉모습이며 말이며 모두 다 믿은 거다. 둘 다 가식을 떨고 거짓말을 하니 대화가 안 매끄러울 수가 있나.

옛날이야기를 꺼낸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 대화는 우린 이만큼이나 친하다는 것을 ‘의식’ 이었으니까. 우리가 만일 정말로 그만큼 친했다면 말할 필요도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우리에겐 필요한 과정이었다. 우리는 서로가 납득할 만한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담배 파이프가 아니라던 르네 마그리트처럼, 그 순간의 미소는 미소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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