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원 나잇 - 5부

다 쌌다.

그러나 미소의 입은 쉽게 날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마지막 쾌감까지 만끽하게끔 혀를 굴려주기까지 했다. 그 부드러움에 쭈그러들려던 것이 다시 커질 뻔 했다. 참 무지막지한 스킬이다. 사정 후엔 고통스럽기 쉬운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즐기게 해준다니. 이만큼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수를 사정시켰을지 쉽게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저 혀뿌리 안으로 넘긴 액만 모아도 몇 리터는 되겠지.

미소가 입을 떼자 은색 실이 길게 늘어졌다. 침인지 액인지. 미소가 입을 벌려 그 실을 끊었다. 그리고 붉은 혀를 내밀어 번질거리는 입술까지 핥자 내 뿌리가 다시금 움찔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으려는 모습은 가히 광적일 정도의 관능이었다.

“야, 너.”

목이 잠긴 탓에 말소리가 흐릿했다. 미소는 내가 일어난 것을 보고는 살짝 웃었다.

“깼어?”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는 태도였다. 오히려 내 쪽의 소파로 걸터앚으며 반쯤 고개 숙인 아랫것을 쥐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애무하며 속삭였다.

“쪼았어? 헤헤.”

끈적끈적한 무언가가 내 귀 안으로 파고들었다.

“많이 싸더라, 우리 연규. 안한지 좀 됐나봐.”
“왜, 왜….”
“덕분에 나도 흥분했다. 봐봐, 만져 봐.”

미소가 내 손을 움켜쥐었다. 그제야 미소의 옷차림이 얇은 슬릿 한 장으로 변해있음을 눈치 챘다. 미소는 내 손을 펄럭이는 아래로 넣더니 다리 사이까지 인도했다. 손가락 끝이 닿자마자 느껴졌다. 젖었다. 주체 하지도 못할 만큼.

“많이 젖었지, 나. 사실 너 쌀 때 한 번 갔어.”

혀를 귀엽게 삐죽 내밀며 말한다. 미소는 이미 내 손을 놓았지만 내 손가락은 그녀의 손가락에 척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손가락 넣어도 돼. 만지고 싶은 대로 만져.”

미소의 달뜬 숨이 귓속에 파고들었다. 의식이 점차 몽롱해졌다. 몸에 닿는 살갗 한 올 한 올이 내 피부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착각. 서로 하나로 합쳐지듯, 연체동물처럼 끈적이는 것에 그 어떤 거부도 무용했다. 크라켄이 블랙 펄을 집어 삼키듯이.

이런 섹스가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상상하긴 했다. 친구 녀석들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내게도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라 생각했다. 창녀 이상으로 음란의 태를 만끽하는 정사가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우리는 이런 원 나잇 따위의 정사를 벌일 사이가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 그만. 잠깐만.”

잠긴 목을 뚫고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미소는 이미 팬티까지 벗어버리고 내 위로 올라타던 찰나였다. 좌우로 흔들리는 우유 빛 육신과 다리 사이에 옅은 터럭으로 숨겨진 동굴. 그 모습에 뒷골이 띵해지는 것을 참고 겨우 말을 이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에이, 약한 소리한다. 젊잔아요, 연규씨. 겨우 한 번 싼 거 가지고 왜 그래.”
“뭐라…”
“이렇게 키워놓고 말만 많아. 이걸 어떻게 그냥 냅두냐. 불쌍하게.”

미소가 자신의 동굴 아래로 까딱 거리는 것을 움켜쥐었다. 내 몸은 지조에서 벗어나 행동하고 있었다.

“나 이건 잘하니까 믿고 맡겨봐.”

대꾸할 겨를도 없이 내 것이 동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내 짧은 경악성은 곧 이은 미소에 입맞춤에 묻혔다. 두 연결부가 끈적거리며 서로 열기를 교환한다. 생생히 느껴졌다. 이미 술기운은 증발해 버린 걸까.

“쌀 거 같으면 싸.”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미소는 해맑게 웃었다.

“괜찮으니까 안에 싸라고.”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대신 풍경의 흔들림이 시작되었다. 내 위에 탄 채 상하로 요분질하는 미소에 내 머리통도 힘없이 흔들렸다. 다시금 온 몸을 휘감는 쾌락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고작해야 몇 방울의 정액과, 그것에 동반되는 고작 몇 초의 쾌락을 향해. 허무의 극을 향해 달리는 시간 속에 의식이 혼탁해졌다.

이 여자는 미소가 아니다. 내 기억속의 미소를 떠올리게 하지만 미소가 아닌 무언가다. 그 역설이 빚어내는 위화감은 섬뜩할 정도로 강렬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바에서부터 느낀 위화감만 해도 그랬지. 내가 가식의 탈을 써 연규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녀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았던가. 말투, 버릇, 습관, 제스처. 그 모두가 내 기억과 일치했지만 미소가 아니다.

그 말은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된다. 그녀는 거짓을 꾸며내야만 ‘내가 기억하는 미소’로 있을 수 있었다는 소리다. 가식 떨어 본 모습을 숨겨야 했던 나와 다르게, 그녀는 가식으로 ‘본래의 모습’을 꾸미려 한 것이다.

이는 미소가 변했다는 소릴까. 예전의 모습을 더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물론 사람은 변하고 미소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으로 변했냐는 것이 중요하겠지.

강간당하고 가족에게 배신당한 여자.
동창들과 스스럼없이 섹스를 즐긴 여자.
화류계에서 몸 팔고 술 팔다 스폰서 찾아 은퇴한 여자.
그러나 여전히 밤거리에서 남자를 찾는 여자.

그 모든 레테르의 공통점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섹스다. 누구와도 쉽게 섹스 하는 헤픈 여자.

좋다. 변했다고 치자.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그럼 왜 이 사단이 났지? 이만큼이나 어색한 소꿉친구 사이에 섹스의 손길을 뻗쳐온 이유, 그것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처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원 나잇을 즐기려면 나 아닌 다른 남자를 붙잡는 게 더 나았다. 몇 백짜리 술을 사주지 않아도 그만한 돈을 받으면서 잠자릴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나란 말인가?

“여, 연규야.”

미소가 헐떡이며 내 생각을 끊었다.

“저, 젖도 만져줘.”

미소가 머리칼을 흩날리며 소리쳤다. 향수와 달콤한 땀내가 섞였다. 그 은은한 향기와 달리 미소가 보여주는 것은 거의 발광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미소의 엉덩이는 계속해서 요동치며 날 깔아뭉갰다.

“그, 그만.”
“왜? 쌀 것 같아? 그냥 싸도 된다니까.”

미소는 아예 작정한 듯 했다. 허리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어졌고 조임도 강해졌다. 난 신음을 삼키며 미소의 허리를 껴안았다. 이대로 가다간 또 얼마 못 버티고 사정할 테고, 그건 바라는 결말이 아니다. 억지로 움직임을 멈춘 상태로 호흡을 교환하고 있을 때였다.

“에그, 누나하고 오래 하고 싶어서 그래? 귀여운 것, 참기는.”

미소는 피식 웃으며 힘을 풀었다. 꽉 조였던 질감이 느슨해졌다. 미소는 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땀방울을 핥았다. 동상이몽이다. 하지만 시간이 주어진 것만도 다행이다. 난 황급히 입을 뗐다.

“왜, 왜 이래. 진짜.”

미소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이런 사이 아니잖아.”
“한참 잘하다가 뭐야.”
“이상하잖아.”
“뭐가 이상한데?”
“그거야 당연히…”

거기서 막혀버렸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좆같은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미소가 다시 몰아붙여왔다.

“뭐가 이상한데? 자세? 일어나서 할래?”
“장난 해, 지금?”
“아, 그럼 뭐. 말을 하라고, 말을.”

내가 지금 미친년과 말을 하고 있나? 얘는 이게 이상하지 않다는 소린가? 그녀의 태도가 너무나 뻔뻔했기에 내가 미친놈이고 미소가 정상인가 싶을 정도였다. 미소는 얼마동안을 내려다보더니 땀에 젖은 머리칼을 모아 넘겼다.

“나, 나하고 이러는 거. 넌 아무렇지 않아?”

황급히 말을 던졌다. 아까보다 무거워진 미소의 무게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뭐.”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부른 거 였어?”
“뭐, 겸사겸사.”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 사이에….”

그러나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무슨 사이지?

꼬여버린 소꿉친구 사이? 위선을 가식으로 맞받아친 사이? 뭐가 되었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섹스를 거절하려면 내가 그렇게나 피했던 친구 사이를 입에 담아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혹시 친구끼리 이러는 거 아니다. 뭐 그런 이야기 하는 거야?”

미소가 살짝 코웃음을 쳤다.

“남자랑 여자가 하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냥 하면 되는 걸. 혹시 나 별로라서 그래?”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미소는 흐음, 하며 팔짱을 꼈다. 정사는 멈췄지만 삽입은 아직 여전하다. 정액을 애액으로 교환하는 남녀가 입으로는 그만두자는 이야기를 한다. 우스꽝스럽고 역설 자체였다. 그러나 미소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듯 했다.

“이렇게 서 있으면서 말은 잘 해요.”

미소는 제 아랫배 안쪽에서 여전히 꼿꼿이 서있는 것을 문질렀다. 이어지는 코웃음에 아무 말도 못했다.

“누구랑 하건 그게 그거 아냐? 다 똑같은 것들끼리.”

아, 미소에게 난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동창이나, 소꿉친구나, 스폰서나, 길거리 노숙자나. 그 모두가 특별한 존재감 없는 다 똑같은 남자구나. 그 허무함에 무너지려는 찰나 그녀가 날 붙잡았다.

그 때 미소가 입을 맞춰왔다. 멍청한 표정으로 설육의 장난을 그대로 당했다. 미소는 입을 떼며 말했다.

“농담이야.”

미소가 제 입술을 살짝 핥았다.

“당연히 너는 다르지. 다른 사람도 아닌 홍연균데.”
“뭐?”

미소의 손이 내 턱을 살며시 쓸었다. 그리고는 대화를 끝냈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네.”

미소는 다시금 움직였다. 풍만함 속에 날 파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별로 의미는 없을 것 같다. 다시 시작된 조임은 무엇이 재개될지 더 잘 말하고 있었으니까.


* * *  


 삶은 무뎌짐이다. 마음의 헤짐이기도 하다. 어릴 적의 게임만 해도 그렇다. 팩을 후우, 불어 슈퍼패미콤에 끼워 넣은 후 로딩을 기다리던 초조함이나 소닉&테일즈에서 너클즈를 고르게 됐을 때의 기쁨. 그 감정은 모두 처음이기에 가능했던 것들이다. 처음이란 울림만큼 깊고 강한 것도 없다.

그렇기에 그 두 번째부터는 무뎌질 수밖에 없다. 시큰둥하게 로딩을 기다리고 너클즈도 당연한 듯 고른다. 익숙함이 처음의 울림을 앗아가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 첫 경험의 짜릿함은 사라지고 반복의 지루함만을 느끼게 되겠지. 첫 연애는 달콤한 좌충우돌이지만 두 번째부턴 경험의 답습에 불과한 것처럼.

나체 사진이 박힌 성인광고지 주우며 가슴 졸였던 사춘기 소년. 그는 이제 없다. 그것을 숨겨두고 몰래 꺼내보는 일도 없고, 광고지 보고도 시큰둥하니 가슴 돌릴 만큼 무뎌진 성인 남성만이 있을 뿐이다. 설사 관심 가져봤자, 광고지의 여자를 보고 어? 나 인터넷에서 저 은꼴 봤는데, 하며 웃을 정도뿐이다. 옛날에 심장 쾅쾅 뛰게 한 벗은 사진 보면서도 요즘은 별로 야하지도 않구나 하면서.

결국 무뎌진 것이다. 하드코어 무삭제 포르노도 시큰둥하니 10초 뒤를 연타하게 되었다. 이 나이쯤의 섹스엔 끓는 욕정이란 이름이 어울리는 젊은 날의 초상은 없다. 아주 차분한 마음으로 애무와 삽입, 사정에까지의 수순을 밟는다. 아랫도리가 머리보다 먼저 나가는 일도 없다. 헤매지도 않는다. 이 모두가 가슴의 떨림이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질주하지 않는 심장에 위화감도 느끼지 못한다. 성에 무뎌지는 것은 그런 법이다.

이런 나를 보며 내가 이상한가도 했다. 섹스다운 섹스가 없었다. 섹스의 목적은 사랑이고, 또 성스러운 수태를 위함이지 않나. 2세의 탄생. 사랑의 결실. 기뻐할 축복. 이런 것들이어야 했다. 그런데 나만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랑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2초의 오르가즘을 위한 갈구뿐이었다.

나의 섹스는 섹스가 아니다. 내 추한 모습에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어느 날, 인터넷에서 임신했다는 익명 글을 본 순간까지.

남치니랑 콘돔 없이 하다가 임신 했어요....아.......미친...ㅡㅡ........아존나씨발 썅개좃같네

그 순간 탄성이라도 질러야 했을까. 나만 이상한 게 아니었다. 이 여자도 임신을 놓고 아존나씨발 썅개좃같은 일이라잖아? 기뻐해도 충분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건 내 쪽만이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세상이 미친 거구나. ㅡㅡ같은 표정 지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을 테고. 그런 말 하는 나도 미친놈일 테고. 결국 미친 세상 속의 미친놈이 한마디 해야 한다면 이것 밖에 없으리라.

“아존나씨발 썅개좃같네.”


어느새 침대까지 넘어왔나 기억나지 않는다. 침대 시트를 질펀하게 적시는 것이 우리의 땀인지, 분수처럼 터진 미소의 절정인지도 모르겠다. 하복부에서 퍼져나가는 아찔한 쾌감에 이성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섹스였다.

결국 미소의 목적은 처음부터 섹스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홍연규와의 섹스. 그 지명의 이유는 일단 제쳐놓는다 치고, 행동만 놓고 보면 참 교묘하고 간교했다. 조종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예전부터 생각해뒀는데 때마침 나란 놈은 열등감과 죄책감의 분위기를 퐁퐁 풍겨댔으니. 미소로선 이걸 이용하자 싶었을 테고 몇 시간의 술자리는 그것을 찔러보기에 충분했을 터. 그리고 난 예상대로 못 이기고 오피스텔까지 왔다.

아마 이렇게 생각했겠지. 얘, 내 말 거절 못하네?

그 이유가 열등감이란 것을 모르진 않을 거다. 초중고를 같이 보냈으니까. 만일 정말 모른다면 멘사에 희귀 표본으로 수집을 원할 만큼 IQ가 낮거나, 기억상실증의 드라마 주인공이 되었다거나 할 거다. 많은 남자를 손짓 하나로 흔들어놓던 여자는 거기서 한 발을 더 나아갔다. 지난 시간의 공백이 더 이상 비어있지 않음을. 죄책감이 공백을 메워버린 것을 눈치 챘다고 생각한다.

물론 처음에는 추측에 불과했다. 그러나 가정만으로 충분했다. 확답을 원하는 찌질이조차 이젠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물증? 있지. 그 노래. 올드 슬럿 엘레지. 그 노래를 틀은 것이 확고한 물증이다.

결국 그 끝은 이 모양 이 꼴이다. 이 이상의 가식과 거짓은 불가능하다. 난 거부의 무기 하나 없는 맨 몸이 되어서 미소가 원하는 대로 먹힐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약탈 아니면 강탈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 대상물이 섹스란 것이 참 어울리진 않지만.


두 번째 사정에 임박하는 것과 사정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미소는 그 조짐을 캐치하자마자 잔인할 정도로 힘을 주었다. 중력에 역행하는 질주가 미소를 꿰뚫었다. 좁은 길을 꾸역꾸역 채우는 감촉이 무어라도 되는 것인지 미소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달콤한 신음성을 내질렀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수고했다며 내 머리 쓰다듬는 것에 황망히 천장만 볼 뿐. 미소는 아무렇지 않게 제 몸을 빼냈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능숙히 막았다.

희뿌연 점액질로 뒤덮여있던 아랫도리가 침으로 범벅이기 시작했다. 아주 확실한 애프터서비스에 남녀의 역할이 바뀐 것은 아닌가도 했다. 그래 보이겠지. 남자는 흡사 강간이라도 당한 듯 멍청하니 동공을 풀어내고 있는 반면, 여자는 비스듬히 누워 담배 한 대를 꺼내 무니. 이건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왜?”

담배를 반쯤 태우던 미소가 물었다. 그녀는 내 멍청한 표정을 요리저리 살피며 한 마디 했다.

“얘가 복상사라도 오나. 너 왜 혼 빠지는 얼굴 하고 그래.”
“왜….”

더듬거리면서도 말했다.

“왜, 그랬어.”

미소는 다음 한 모금을 빨며 날 마주했다.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뭐가.”
“꼭 말로 해야 돼?”

미소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워버린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나 원래 이런 여자야.”

대답의 연체는 주저함이나 서글픔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나 당연한 질문에 생긴 의아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 질문은 미소에게 있어 너 여자지? 하는 질문과 같았던 것만 같았다.

“나 원래 섹스 좋아해. 남자 없인 하루도 못 자.”
“그래서 누구랑 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어. 상관없어.”
“…그게 나라도 상관없는 거였고.”
“그건 아닌데.”

내 표정은 아마 뭐라 표현 못할 만큼 엉망이지 않을까. 미소는 나와 달리 아주 정상적인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린 친구잖아. 동창이고. 게다가 그냥 친구야? 부랄 친구, 어머. 나 좀 봐.”

미소는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니까, 에. 맞아. 소꿉친구. 특별하지.”

점점 더 알 수가 없었다.

저 웃음이 이해가지 않는다. 말도, 표정도, 행동도 이해 가지 않는다. 미소는 가만히 누워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광란일 만치의 정사였기에 땀투성이가 되어 엉망이었다. 미소는 머리칼을 정리한 후에 내 가슴에 안겼다.

“한 번 더 하자.”
“…뭘.”
“꼭 말로 해야겠어?”

키들거리면서 말을 잇는다.

“직접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엉큼하게. 남자들, 여자가 야한 말 해주면 그렇게 좋아하더라니.”

갈수록 심해지는 표현에 내 귀를 의심해야 했다. 이건 아무리 봐도 현실성이 없었다. 그러나 미소는 실제로 그리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을 철저히 비하하면서 존재했다.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실제로도 그리 보였다. 미소의 표정 또한, 자신이 정말 그렇다고 믿는 표정이었다.

“왜 그렇게 말해?”

다음 말을 입에 담았다.

“왜 그렇게까지 자길 욕해? 왜 그래, 너.”

그러자 정말 간단하게 대답이 돌아왔다.

“나 원래 그런 여자였다는데 무슨.”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으레 사람이란 동물은 자기 자신을 이야기 할 때 좋게 포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미소에게선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미소의 말에선 그녀 자신이 그렇게 형편없을 수 없었다. 그저 돈을 주면 액을 빨아주고, 몸이 땡기면 다리를 벌려준다. 그 모습에 사람의 냄새는 없었다.

미소는 제 몸을 내려 볼 때마다 무엇을 느낄까. 아마 정육점이 아닐까. 소나 돼지 같은, 생전에 무엇이었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 고기 덩어리. 미소의 몸은 그 돈만 낼 수 있는 살덩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결국 ‘자신다움’이 없는 것이다. 이젠 돈 얼마의 가격표만이 그 살덩이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겠지. 하룻밤에 얼마나 할까? 오백? 천?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물건일 뿐이다. 그녀에겐 사람다움과 미소다움이 없고, 나로선 그런 삶을 사는 미소의 속마음이 어떨지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그러나 미소는 그 광기의 세계 속에 살고 있었다. 자신의 평가를 한 없이 깎아 내리면서.

그제야 전부 이해가 갔다. 내 몸 위로 포개진 육질 덩어리는 나와 같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옛 모습과. 그 둘은 데칼코마니처럼 나란히 포개질 것이기에 이해 못할래야 못할 수가 없었다.

* * *

늙은 창녀는 추억했다. 처녀 적 브로드웨이를 꿈꾸었던 시절을. 박복했어도 꿈이 있기에 비루하지 않을 수 있었다. 숨어들어간 소극장에서 몰래 훔쳐본 프리마돈나는 여자 눈으로 보기에도 참 아름다웠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도 저 자리에 서고 말리라 다짐했다. 그 마음 변치 않으리라 마음 굳게 먹고 노래를 불렀다. 그 시절의 다짐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길을 잃고 말았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른다. 그녀가 걸었던 길이 시작부터 잘못된 것일 수도 있었겠지.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는 이미 무언가 어긋나 있었다. 더 이상 노라 존스를 부르지 않고 쳇 베이커와 빌 에반스의 리듬이 기억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대신 부르는 것은 거리의 노래였다. 매일이고 빨간 조명의 무대에 서서 흥정의 인트로로 하루로 목을 열었다. 남자들의 욕정어린 숨결과 꾸며낸 신음성의 중첩은 관객과의 소통이라고 해야 했을까. 또,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는 가수와 관객이 하나 되는 순간이었을까. 그곳이 분명 브로드웨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대인 것 같기는 했다. 사정 후 늘어지는 남자들의 작태는 노래의 여운을 즐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그녀는 문득 다리 깊은 곳에서 질척임을 느낄 때마다 이것이야 말로 관객의 눈물이라고, 그리 믿기로 했다.

어느 블루스 싱어는 말했다. 무대야말로 물질을 벗어나 에너지를 공유하는 에덴이라고. 그녀는 어느새 그곳에 온 것만 같았다. 물질밖에 없기에 정신만을 생각하게 되는 곳에서 처녀는 중년에까지 늙었다. 그 누구도 더는 그녀를 찾지 않았다. 여인은 텅 빈 무대에서 홀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소린 마치 울음소리 같았다.


올드 슬럿 엘레지의 그런 비애가를 들으며 나 또한 울었어야 했으리라. 그러나 눈물 한 방울 흘릴 애잔함도 없이 그 노래를 묻었다. 내가 보고 들은 미소의 소식도 함께 묻었다. 그날 부른 미소의 노래는 에둘러 청한 도움이었다. 그러나 난 그것을 외면했다. 훗날 모든 것을 알게 되었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래, 비겁했다. 욕을 들어도 싸다. 해결할 시도도 않았으니까. 난 그저 도피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젠 그로부터 어언 몇 년이 흘렀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원래부터 더러운 여자였다. 창녀 같은 년이다. 그렇게 자신을 홀대하며 추락을 정당화했다. 추락을 추락이 아니라 자위한 것이다. 본래부터 헤픈 여자라면 강간에 마음 아파할 이유 없고, 배신에 슬퍼할 필요 없다. 이름 모를 남자들과 잠자리 갖는 것에 자괴감 느낄 필요는 더더욱 그렇겠지. 동창들과의 섹스도 그런 종류일지 모른다. 일부러 섹스를 하고, 누구라도 섹스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몰아붙인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 담긴 섹스도 아니었을 테니 쉬이 상상이 간다. 오르가즘만을 위한 공허한 움직임. 미소는 그 어긋난 섹스에서조차 더더욱 어긋나야 했으리라. 남자들이 손가락질 할 만큼의 거리의 여자로 자신을 꾸며내면서 더더욱 추락했겠지.

그 바텐더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거다. 미소에게 헤프게 몸 굴리는 것은 마지막 도피처였다. 그것으로 겨우 생의 동아줄을 쥐고 있었다. 화류로, 원 나잇으로, 헤픈 섹스로 자신을 겨우 유지하는데 그것을 빼앗는다? 그건 동아줄을 쥔 손을 잘라 버리는 짓이다.

사람은 밥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미소는 섹스 없이 살 수 없었다. 그녀를 지탱하는 것이 불특정 다수와의 섹스인 만큼 그것은 필수불가결 했다.


문득 울고 싶어졌다. 지난 몇 년간 미뤄왔던 눈물을 이제야 터트리고 싶었다. 지금의 미소는 내 옛날의 모습과 같다. 그녀에게선 추락을 곱씹으며 난 쓰레기라 자책했던 그 시절의 냄새가 났다. 다름 아닌 포기의 길. 그러나 나는 차라리 나았다. 미소가 망가지는 것을 듣고 박수치며 난 그나마 낫다고 도피했으니까. 어쨌든 그렇게라도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미소에겐 그마저도 없었다. 그녀는 지난 시간 동안 제자리만 걸음 했을 뿐이다. 자신의 몸을 학대하며 나락으로 떨어지는 생을 겨우 부지해 온 것이다.

그 순간 다시금 직감했다. 아. 이 섹스를 거부할 수 없겠구나. 단순한 섹스가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를 거부한다면 또다시 그녀를 외면하는 것이며 몰락을 방조하는 것이기도 하겠지. 바텐더의 말처럼 내가 친구라면 섹스를 해야만 했다.

그 끝에 과거와의 결별이 있음도 알고 있다. 미소에게 있어 난 어린 날의 추억이다. 동창들과 섹스하면서 학창시절의 순수함을 부정한 것처럼, 나와의 섹스로 소꿉친구 시절을 지우려는 것은 아닐까. 그 시절의 심상은 지금과 같은 잿빛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신기했던 시절. 색종이 몇 장만으로도 유토피아에 온 듯 하루 종일 웃고 떠들던 때. 미소는 그 다채로운 추억에 구역질나도록 똥칠을 할 생각인 거다. 그녀는 추억에 담긴 마지막 순수성마저 부정하면서 자신을 추락시키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서글픈 것일지도 모른다. 이 도피는 머지않아 끝난다. 종막의 커튼이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커튼콜이 없는 인생이니 그것으로 끝일진대, 이런 섹스는 끝을 아주 조금 늦추는 것에 불과하다. 허기에 미쳐버린 사람이 제 살 뜯어먹는다고 얼마나 버틸까. 그것이 이 섹스의 전부다. 안다, 나도 전부 알고 있다.

그렇지만 섹스하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 것은 아닐까?


“하나만 물을게.”

최대한 각오를 담아 말했다.

“뭔데?”
“우리가 섹스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되는 거야?”

미소가 눈을 치켜 올려 떴다.

“뭘 또. 밥이라도 사주리?”
“그 말 하는 거 아닌 거 알지.”
“뭔 소리야.”
“알잖아.”
“몰라.”
“됐어, 그럼.”

미소는 투정 부리듯 혀를 찼다.

“나 계속 연락 할 거다.”
“어?”
“문자도 하고, 전화도 하고, 편지도 하고. 아무 것도 안 끊을 거야. 그럼 어쩔래?”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지금껏 만났던 남자들이 이런 말을 했을 리는 없겠지. 미소는 나름대로 뒤끝 없는 남자들만 골라 깔끔하게 하룻밤으로 모든 것을 끝냈겠지. 그게 원 나잇의 기본이니까.

“소꿉친구라면서.”

그녀가 대답하기 전에 먼저 치고 나갔다. 어디에 이런 용기가 있었나 모르겠다.

“남자가 죄 거기서 거기라도 난 다르다면서.”
“내가 그런 말 했나?”
“안 했나. 아, 그랬을지도.”

도망치려는 미소를 붙든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라 그게 그거라 했는데. 착각했다.”
“자꾸 이상한 소리 할래?”
“소꿉친구랑 계속 쭉 만나는 게 이상하냐?”

미소로선 여기서 끝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짓밟는 건 단 한 번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미소 같은 상황이라도 이 한번으로 끝냈을 거다. 괜스레 더 만나다간 옛날 생각 떠올라 원하던 것도 못 얻을 수 있으니까. 아마 미소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봐, 저 표정 봐. 움찔하네. 그리고 안 그런 척 표정 짓는 거 봐라. 아무리 지난 몇 년간 지우고 살았다지만 20년 가까운 세월을 붙어 지냈는데 모를 리 있나.

한 때는 신을 원망했다. 졸업하고서야 겨우 해방시켜준 것에 분노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사했다. 이런 작은 낌새도 알아차릴 만큼 오랫동안 만나게 한 것에 감사하고 싶었다.

“맘대로 해.”

미소가 쀼루퉁 하게 대답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좋다. 내가 그 흔한 남자 중 하나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좋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니까.

결심을 굳히고 미소를 살짝 밀쳤다. 콩 하면서 침대 위로 벌렁 넘어지는 그녀를 덮치다시피 쫓았다.

“사람 놀라게.”
“그럼 이제 뭘 하지?”

미소가 퉁명스레 대답했다.

“괜스레 분위기 잡지 마. 안 어울려.”
“…사람 무안하게 만들지 좀 마라.”
“그러면 쌤쌤으로 쳐줄까?”

미소는 깔깔 웃었다. 그리고 은근슬쩍 움직였다. 한 손으론 내 후두부를 휘어 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이것으로도 부족한가요?”

이제는 다리로 내 허리를 감싸 안기까지 한다. 말투까지 고혹적인 게 뒷목이 당겨온다. 얘 스킬은 정말 가차 없구나. 내 몸의 반응을 굼뜨게 만든 앞선 사정들에 감사하고 싶다.

“컴.”

피식 하니까 또 한 마디 한다.

“다 스킵하고 바로 가줘.”

도발이다. 그러나 넘어가지 않았다.

“왜 안 해? 안 서?”

정신 차리자. 도피의 시절은 여기서 끝내자. 반쯤 날아간 술기운의 자리를 마지막 각오가 채웠다. 늦었지만 이 자리에서 어떻게든 해보자.

이미 충분히 도망쳤다. 되돌아가는 길이 고될 지라도 해 보는 거다. 어떻게? 섹스라고 다 같은 섹스가 아니지 않은가. 지금 미소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는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 생각한다. 퇴폐적인 키스가 아니라 살짝 입 맞출 뿐인 풋풋함. 입을 떼자 미소 또한 조금 놀란 표정으로 이마를 만지고 있었다.

“뭐…”

의구심을 표하기 전에 입을 막아버렸다. 아까와 마찬가지의 키스. 떨리는 심장 소리 안 들리게 감추려 애썼던 첫 키스. 그 아득한 옛날의 따뜻함을 기억 속에서 꺼냈다. 그 풋풋함이 미소의 입술 위에서 그대로 재현 됐다.

미소는 이제 의아함을 숨기지도 못했다. 눈 끔뻑이는 모습이 왠지 귀여웠다.

“야.”

오늘 처음으로 미소에게 쏘아붙인다.

“누구 맘대로 키스도 스킵하래.”

애초에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목 아래 부분에 팔을 넣어 부드러이 감싸 안으며 시작했다. 옛날에 잃어버린 섹스를 이제사 되찾아보고 싶다. 서툴러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던 시절. 기억을 더듬어 그 순수함을 표하고자 한다. 어차피 섹스 해야 한다면 그 쪽이 나으니까.

사람이 한 순간에 바뀔 수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뭔가를 얻으려면 그만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이 한번으로 미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거야 말로 도둑놈 심보다. 때문에 이 순간에 충실하려는 것 뿐, 그게 전부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미소를 더 욕되게는 하지 말자. 어차피 가식의 탈도 다 벗겨진 마당에 숨길 것도 없는데.

섹스다운 섹스.

생각해보면 원 나잇 스탠드란 이름답게 고작 하룻밤일지 모른다. 하지만 시작의 하루는 다르다 믿고 싶다. 이미 기억의 장에 무수한 도피의 기억을 쌓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조금 다른 것을 남겨도 될 때겠지. 하루 분량의 기억에 불과할 지라도, 그 의미만큼은 하루분량이 아니었으면 한다.

내 넓은 오지랖으로도 여기까지가 한계야. 그러니까 잘 좀 해. 이 바보 같은 친구야.

문득 그 바텐더가 떠올랐다. 지금 뛰는 이 가슴에 그녀가 툭 쳤던 감촉이 남아있었다. 레프리가 힘내라고 기합 넣은 것 같은 촉감에 더 파이팅의 마모루와 관장이 된 것 같다. 그녀가 건넨 보드카는 오늘 인생의 한 라운드가 끝날 테니 입 헹구라 준 것은 아닐까. 새로운 라운드를 위한 축배일 지도 모르지.

웃긴다. 갖다 붙이기는 작작 하자.

“야, 빨리 넣기나 해. 되도 않는 뜸들이지 말고.”

미소가 보채며 내 허리를 잡아 끌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끌려갈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버티는 게 옳겠지.

“네가 이해 못한다고 이상하다는 게 어딨어.”
“웬 똥 싸는 소리야.”

…역시 아직까진 힘들구나. 난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포스트모던에선 다양성을 인정해줘야 한 대.”
“뭔 소리야.”
“나도 좀 이해해 달라는 거지.”

이 마당에 웃긴 이야기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다. 연인과 잠자리 가져 봤고, 원 나잇도 해봤다. 결국 사랑을 위해서 하고, 쾌락을 위해서 하고, 갖은 섹스를 겪어 봤다. 그렇지만 친구의 마음으로 하는 섹스는 처음이었다. 결국 동정 탈출의 순간인데 능숙함은 무슨 개뿔이 능숙함. 게다가 첫 경험은 대부분 실패로들 끝나지 않나. 그저 비기너즈 럭을 기대해야만 했다.

미소의 입이 살짝 벌어진 것을 포착하고 다시 입을 맞췄다. 반쯤 닫힌 틈을 혀로 조심스레 열었다. 내 혀끝에서 미소의 혀를 느끼며 문득, 친구의 마음으로 하는 섹스보다는 이 슬로건이 낫다 싶었다.

친구의, 친구에 의한, 친구를 위한.

섹스.

* * *


언제였던지. 옛날 살던 집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더 이상 나와 미소의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 옛날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1990년대를 끝내고 새천년으로 넘어간 게 바로 어제 같았는데. 그 후로 또 십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참 많이도 흘렀다.

그곳엔 그리움이 있었다. 재개발 계획에서 빗나간 다세대 주택일지라도 내 고향임은 분명하니까. 3층 연립 주택이 고향이라니 좀 이상한 모양새긴 한데 뭐, 고향에 별 게 있나. 어릴 적 살던 곳이다 하면 다 고향이지. 숨바꼭질 하다가 부쉈던 계량기는 먼지를 머금었으나 그 때 그대로였다. 바닥에 그림그린다고 빨간 벽돌 빼내던 담은 여전히 뻥 뚫려 있었다. 난 우수를 느끼며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오묘한 기분이었다. 어릴 적엔 폴짝 폴짝 뛰어놀아도 어디 안 부딪힐 만큼 크고 넓었다. 그런데도 이젠 몇 걸음 하는 것만으로 어깨를 좁힐 만치 쪼그라들어 있었다. 소인국에 온 걸리버가 이러할까. 눈에 쉬이 닿지 않는 곳에 파놓은 낙서들을 보니 오묘함은 더했다. 난 왜 그래트다간! 이라고 낙서를 했는지 생각해보며, 삐뚤빼뚤 연규바보멍청이라 쓰인 것들을 보았다. 그리웠다. 근처에 왔다 아무 생각 없이 한 걸음이었을 뿐인데 돌아가기 아쉬워졌다. 몇 번이고 주저하다 돌아섰다.

향수를 느끼는 이유가 뭘까 싶었던 적이 있었다. 대답은 간단하다. 추억은 아름다우니까. 그런데 왜 아름답냐 물으면 아, 저, 그게. 저,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돌아오는 길에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변한다. 삶에 무뎌진다. 그러나 추억은 그대로 남아 변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로 박물관에 박제되어 그냥 남는다. 결국 변하는 나와 불변의 추억은 역설이 되어 가슴의 애잔함을 만들어낸다.

생각해보면 추억이 그 자체로 아름다울 수는 없는 법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랬다. 대여섯 살 꼬마가 아, 세상은 아름답구나, 했으면 미친놈이겠지. 시간이 흘러 시간이 흘러 그 때의 일상이 비 일상이 되고나서야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추억은 그냥 오지 않고 때때로 눈물을 몰고 온다. 무뎌진 삶의 물결에 놓쳐버린 것들이 그 시절엔 있다. 그렇기에 사람은 상실이건, 후회건, 그리움이건, 어떤 의미에서건 눈물 한 방울 쯤은 흘리기 마련이다. 나 또한 그렇다. 돈에 물들지 않은 사랑, 순수한 대화, 애정 어린 입맞춤, 이젠 과거에만 있는 것들을 떠올리며 눈물 몇 방울씩을 삼켰다. 추억의 찬란함에 눈부셨을 뿐이라고 자위하면서.

지금은 잃어버린 것들이 그 시절엔 있다. 그래서 아름답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시절을 더듬으며 살아간다.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인간은 어제를 품고 사는 동물이란 말도 있으니까. 추억이 사람을 살게 한다. 잘 안다. 그래서 미소의 손을 잡았다.

어제를 품는 것이 추억이라면 내일을 품는 것은 꿈이다. 가수 되고 싶다며 꿈을 노래했던 더 이상 없다. 결국 미소는 내일을 품지도 않으면서 무의미한 생만을 늘리기만 할 뿐이다. 그런 그녀에게서 어제마저 빼앗은 것은, 뭐랄까. 자신의 마지막까지 전부 놓아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품었다. 따먹거나 덮친 것이 아니라,

안았다.

그래. 알량한 죄의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추락을 또 방조했다간 죄책감이 더 커질 테니까. 그런 이기심의 발로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그 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나도 날 모를 만큼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으니까.

내가 모르겠는 그 뿐이 아니다. 어젯밤도 마찬가지다. 사랑과 여자와, 섹스에 무뎌진 내가 그렇게 사랑을 나누는 것만큼 이상한 일이 또 있을까. 어젯밤은 쾌락이 지워진, 상대를 위한 봉사였다. 봉사라 하니 접대같이 들리기도 하겠지만 둘은 부리부터 다르다.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간단하지 않나.

미소를 여자로 사랑하진 않는다 해도-기저귀 차고 서로 꺆I 거리던 사이에 무슨- 친구 이상의 존재로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형편없이 정액받이로 휘둘렸던 것을 잊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중간부턴 아무 생각도 없었다. 생각 없는 텅 빈 머리로 미소를 안았고, 안을 수 있을 때까지 안았다. 그리고 끝에 가선 그대로 골아 떨어졌던 것 같다. 내 품에 안겨 소곤소곤 자는 미소를 보니 분명 그랬으리라 생각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군데군데 기억마저 끊겨있었다. 좀 한심하네. 됐다. 소중한 사람이기에 생각보다 마음이 앞섰다 생각하자.

힐끗 시계를 보니 여덟시였다. 어찌할까 고르기도 참 뭐하다. 평범한 원 나잇이라면 반은 민망, 반은 어색한 기분이 되어 곧장 택시타고 집으로 갔을 터. 그렇지만 이 여자는 미소다. 전날 밤을 떠올리며 뭐 이따구로 생겼냐 욕하는 일도 없다. 덕분에 도주극을 벌이는 것도, 좀 더 자두는 것도 선택하기 묘한, 기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몇 선택지를 고심한 끝에 내가 택한 것은 도피였다. 일단 있어보자. 뭔가 길이 있겠지, 하는 마인드로 얼렁뚱땅 넘어갔다.

밝은 빛 아래서 보니 미소는 확실히 아름다웠다. 8등신 글래머 미녀라는 표현은 미소를 위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기처럼 한껏 웅크리고 있으니 성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맞기라도 한 듯 불쌍하게 누워 있으니 보호 본능이 발동되었으면 발동되었지. 퍽 안쓰러워 몸이라도 가려주려고 이불을 찾았다. 나 또한 나체였지만 일단 여자부터, 라는 맘으로 내 몸 아래 깔려있던 이불을 빼냈다. 그리고 조심스레 덮어주려는 찰나였다.

“음.”

미소가 낮게 신음했다. 한껏 웅크린 몸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맨 살에 닿은 이불 감촉에 움찔한 건가. 근데 잠깐, 잠든 사람이 보통 그러나. 게다가 내가 알기로 얘만큼 잠 깊이 자는 사람도 없었는데.

“야.”

대답이 없다. 돌아온 반응이라곤 속눈썹 움찔한 것뿐이다.

“너 깼지?”

여전히 대답이 없다.

“안자는 거 알거든.”

그러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설픈 숨소리를 낸다. 턱 괴고 누워 그것을 보고 있으니 분명 유쾌한 구경거리였지만, 못할 장난이기도 했다. 어색하지 않게 일으킬 방법이 뭐 있을까 고심하다 머리를 반대쪽으로 해서 돌아누웠다. 그리고 발을 간지럽혔다. 다른 곳으론 간지럼 안타도 발은 심하게 탄다.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아, 뭐야!”

몇 초 채 간질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미소는 번쩍 일어나더니 제 몸을 가렸다. 그리고는 미동도 않은 채 누워있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엉덩이를 찰싹 울리게 때렸다.

“아파. 왜 때려.”
“그럼 넌 왜 간지럼 태우는데?”
“굿 모닝이라서.”
“나도 굿 모닝이라 때렸는데, 왜.”

그리고는 여전히 엉덩이 보이는 내가 못마땅한지 혀를 한번 찬다.

“야.”
“왜.”
“머리 이쪽으로 안 돌아눕냐.”

일부러 시큰둥하게 왜? 하니 눈매를 흘긴다.

“육 백만 불의 엉덩이야? 자랑하는 거야?”
“아니.”
“짱구 흉내라도 내는 중?”
“아니.”
“그럼 당장 돌아누워.”
“볼 거 다본 사이에 왜 그래.”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그러자 미소가 엉덩이를 더 세게 때렸다. 무슨 곤장이냐. 미소가 스팽킹도 섭렵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반응이 돌아오니 마음이 편했다.

“내가 네 엉덩이 보면서 말해야겠냐.”
“나 복화술 할 때 엉덩이로 말해.”

결국 세 번까지 맞았다. 사과처럼 발개진 엉덩이를 문지르며 돌아누웠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무슨 영화에서 보던 자세였다. 덕분에 헛기침이나 하는 어색함이 감돌았다. 어떻게 해보고는 싶었지만 원 나잇 스탠드 후에 이렇게 다정히 이야기 하는 일은 없다. 게다가 그 상대가 알몸의 소꿉친구라면 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만도 없는데. 그러나 뭘 어찌 해야 하는지. 결국 난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런데 미소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힐끗 보니 창밖으로 향하는 미소의 눈빛 또한 멍하니 풀어져 있었다.

“표정 봐라. 복상사 오냐.”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남자가 나서는 것이 낫겠지. 미소가 눈을 흘겼다.

“진짜 오게 해줄까?”
“아뇨, 죄송해요.”
“나 휴 헤프너한테 갈까도 했던 여자거든?”
“그 플레이보이 사장? 왜?”
“자기 복상사로 죽게 해주면 돈 준대. 나 자신 있거든.”

한다는 말이 또. 미소의 엉덩이를 소리 나게 때렸다. 미소는 움찔했지만 뭐라 말하지 않았다.

“너 몸 좋더라.”

미소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는 넌 뱃살 좀 빼야겠더라.
“…봤냐.”

미소는 흥, 하며 조소했다.

“그래도 36인치까지 간 거 겨우 뺀 거야.”
“그래서 30까지 라도 빼셨나?”
“…33.”
“숨 들이쉬고, 남은 3인치 집어넣고. 힘 빡줘서 버텨.”
“…예입.”

우린 잠시 동안 멈칫했다 서로 맞춘 듯 웃음을 터트렸다. 가슴 속 앙금까지 쏟아낼 만큼 강렬한 웃음이었다. 숨까지 콜록대면서 한참을 웃어대고 나자 방금 전 가득했던 어색함이 가신 것 같았다.

“헛소리 말고 씻기나 해.”
“그럼 밥 줄 거야?”
“오트밀이라고 먹어봤어?”
“…라면은 없나요.”

미소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네 번째 곤장이 작렬했다. 그러나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쓰다듬어주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편해진 맘으로 일어서는데 미소가 신경질 적인 투로 소리쳤다.

“아 쫌!”
“왜.”
“뭐 잘난 거라고 덜렁거리면서 일어 나냐. 안 가려?”
“…시, 신라면.”
“야!”
“계, 계란….”

내 쪽으로 날아오는 베개를 피해 급히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미친놈처럼 입 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일부러 찬 물을 틀어 머리부터 적셨다. 그러자 안개처럼 뿌예졌던 머리가 개는 것 같았다. 어려웠다. 참 어려운 밤이었다. 그렇지만 미소를 보니 안하는 것보단 나았지 싶다. 고작 하룻밤에 불과한 일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고, 미소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도 요원하다. 지금 모습이 또 다른 가식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젠 그것도 별 상관없다 느껴졌다.

“야, 야야.”

막 비누칠을 하고 있는데 미소가 문을 벌컥 열며 소리쳤다. 그녀는 가운을 입은 채로 헐떡이고 있었다.

“으헉!”

놀라서 어정쩡하게 국부를 가렸다.

“말 좀 하고 들어와!”

미소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이한테 연락 왔어. 지금 온대. 빨리 나와.”
“뭐?”
“스폰. 이 집 주인!”
“안 온다면서!”
“아, 몰라. 그 사람 집인데 어쩌라고.”
“진짜 미치겠네.”

대충 비누를 닦아내고 소리쳤다.

“수건, 수건.”
“없는데?”
“이만 한 집에 무슨 수건이 없어!”
“아, 맞다. 있다. 일로 와봐.”

미소가 부름대로 황급히 뛰어나갔다. 이거 자칫 잘못하다간 에어장을 뛰어야 할지도 모른다. 때문에 조급해 하다가 욕실 문턱에 걸려 자빠졌다.

“꾸물 대지 말고!”

아, 내 새끼발가락. 눈물까지 찔끔 났다. 그러나 좆 됐다, 가 이미 혀끝에서 대롱대롱 대고 있었으니 아파할 겨를도 없었다. 뒤뚱거리며 미소를 뒤쫓았다. 그런데 미소는 좀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 옆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빨리 줘.”

재촉하자 침대를 가리키며 태연히 대꾸한다.

“여기.”
“아, 뭐.”
“없어. 진짜로. 그러니까 여기서 뒹굴 대서 대충 물기라도 닦아.”

어처구니가 없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침대를 향해 뛰어버린 후였다. 침대 시트위에서 발버둥 치며 물기를 닦아냈다. 급하다. 빨리 빨리. 한국인 뭘 해도 빨리 빨리.

“아하하!”

그러고 있는데 미소가 갑자기 박장대소 했다. 이불 틈으로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왜 웃어!”
“쥐며느리 같잖아.”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오냐.”
“당연하지. 구란데.”

…응?

“뭐, 뭐라고?”

미소는 이 상황을 딱 한 마디로 설명했다.

“바보.”

그녀의 얼굴이 환한 미소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이름에 걸 맞는 미소를 마주한 순간, 머리가 상황을 이해했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해와 동시에 미소를 잡으려 뻗어나간 팔이야 말로 이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하니까.

“오홋.”

미소가 뒤로 훌쩍 뛰며 내 손을 피했다. 덕분에 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미소는 혀를 쑥 내밀며 웃었다.

“이거 멍청한 거야, 띨띨한 거야. 베에.”

이 년이.

번개처럼 일어나 미소를 쫓았다. 알몸으로 덜렁거리며 달린다. 우스꽝스러울 테지만 난 주저 없이 강행했다. 부끄러움마저 초월한 질주는 오피스텔을 길게 가로질렀다. 미소는 창 쪽까지 도망가서야 멈춰 섰다.

퇴로를 막아선 후에 자신만만하게 밀어붙였다. 이제 넌 죽었어, 하려는데 미소의 반응은 내가 기대한 것과 달랐다. 햄스터처럼 눈 끔뻑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크게 웃으며 날 손가락질 했다.

“너 진짜 죽어.”
“아 웃겨, 뭐야. 이건.”
“야.”
“것보다, 아 웃겨. 부시맨이야 무슨. 아, 잠깐만.”

호흡을 고르며 웃음을 참나 싶었다. 그러나 눈을 맞추자 웃음이 재차 터졌다. 아래를 힐끗하는 것이 민망해 슬쩍 가리니 더 크게 웃는다.

“진짜 웃겨.”

왠지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쩐지 지금이 술래잡기 하던 옛날과 겹쳐보였다. 그리고 늦게나마 미소가 이런 애였단 사실을 재확인했다. 그녀는 이렇게 장난스러운 방법으로 사람마음에 성큼성큼 들어오곤 했다. 그리고 뻔뻔하게 척 앉아 여기가 내 자리요! 했다. 그것에 골머리 싸매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떤 의미에서든 소중한 사람이 되는, 참 뻔뻔한 여자였다.

그래. 그런 여자였다.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심장 터지는 줄 알았는데. 내 발가락은 어쩔 건데. 계속 당하는 것에 울컥해 그녀를 쓰러트렸다. 가까이 있던 피아노 의자 위에 그녀를 반쯤 눕히고 그녀의 종아리부터 허벅다리를 쓸었다.

“넌 죽었어.”

그 말로 시작해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자 표정이 아주 가관이었다. 당황과 웃음이 뒤섞인 뭔지 모를 표정이 떠올랐다.

“뭐야. 갑자기. 왜, 히끅!”

말끝에 딸꾹질이 터지자 더 크게 당황한다. 좋아. 이런 반응.

“너 우리가 소꿉친구 인거 아냐?”
“뭔, 히끅. 소리야. 아 왜 이래, 나.”
“소꿉친구 플래그 세우면 넌 끝이야. 너 아차 하다가 아차 싶은 수가 있다.”

물론 그럴 마음은 없지만 반 협박으론 충분하겠지. 미소의 얼굴에서 황당함이 번졌다. 그녀는 딸꾹질을 삼키고는 낭랑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미안해. 그러니까 느끼한 소리 하지 말고 좀 떨어져.”

이 한마디를 노렷다. 난 미소가 지었던 장난스런 미소를 그대로 돌려주며 대답했다.

“왜. 부끄러워?”
“…뭔 소리래.”

어? 봤다. 나 봤다. 이 년 방금 눈 피했지?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비웃음을 지어보였다. 미소는 그제야 당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장난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내가 네 식모냐.”
“말했지? 아차 싶은 수가 있다고.”

아. 좀 전에 멈췄어야 했다. 날 너무 과신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래? 아차하면 어떻게 되는데?”

미소가 다리를 쭉 뻗어 종아리부터 허벅다리까지를 더듬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내 다리 사이의 것을 살짝 건드리기 까지 했다. 아. 나 맨 몸이었지. 그제야 정신 차리며 피하려 했다. 그러나 미소는 날 다리로 휘감으며 놔주지 않았다.

“아차하면 어, 떻, 게, 되, 나, 요?”

미소의 양 손이 내 턱을 꽉 움켜쥔다. 뭐 이런 관능적인. 미소는 그 동작 그대로 날 끌어와 내 귀속에 속삭였다.

“알려주세요. 하아.”
“으흐흐.”

간지러움에 움찔거리자 미소가 키득거렸다.

“우리 한 번 더 해요. 그러면 라면에 계란 넣어서 해줄게요.”
“어, 뭐?”

내 얼굴에서 손을 떼더니 아주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어제 같이 한 번 더 하고 싶어.”

이 역설은 뭘까. 분명 말은 성숙한 여성의 것이다. 그렇지만 얼굴에 피어난 웃음에선 어린 시절의 향수가 강하게 풍겼다.

“콜?”
“야, 야. 이젠 서지도 않아.”
“내가 있잖아. 친구끼리 도와줘야지.”

미소의 다리가 날 더욱 세게 조여 왔다.

“이런 남자 어디서 또 구하겠어.”
“이거야 원. 여러 가지로 난리도 아니네.”

짐짓 긴장 안한 척 하고 있는데 미소의 가운이 흘려 내렸다. 덕분에 다리 안쪽이 훤히 보였다. 황급하게 시선을 올리는데 미소는 그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대담히 행동했다.

서로 때때거리며 바닥 기어 다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 그렇다면 형제만큼 잘 알게 되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 행동이 장난이란 것을 안다. 내 장난에 대한 역습인 것도 안다. 장난은 치되, 성인 여성의 관능을 섞어서. 내가 그러나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어제 그녀의 가식과 상처를 곧바로 못 읽어낸 것처럼 이 말의 진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순전히 장난뿐인지. 장난 속에 진심을 섞은 것인지. 아니면 거짓을 섞었는지.

당연한 일이겠지. 고작 하룻밤이었는데 내 촉이 그 정도까지 성숙해졌을 리 없다.

미소가 내 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끌어당겼다. 서로 숨결을 느낄 만큼 가까워지자 미소가 조용하지만 강하게 속삭였다.

“어게인.”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외친 것 같이 무척이나 강직했다. 당장이라도 네,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랬다가 또 메롱, 하면 그만큼 웃긴 일도 없다.

다시 한 번 미소의 표정을 살폈다. 여전히 모르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상황의 주도권은 분명 미소에게 있었다.

아무래도 남자는 여자에게 잡혀 사는 종자들 아닐까. 애초에 유전자가 그렇게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남자들 대부분이 나랑 다를 것 없는 것 같던데. 슬픈 남자로서의 운명에 대해 자조하며 눈을 감았다.

어휴, 졌다. 그래도 이 패배는 기억하리라. 대신 피아노 치며 노래 부르는 것쯤으로 보상받고 말리라. 그리 생각하자 웃음이 새어나왔다. 별 것도 아닌 승패나 우열 놓고 무슨 생각하는 건지. 그렇지만 생각 한 김에, 노래는 언제 꼭 듣고 말리라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훗날, 미소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추억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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