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4일 금요일

소꿉친구 길들이기 - 6부

다음 날, 재혁은 틀림없이 등교를 했다. 담임에게 미리 찾아가 어제는 아파서 못 나왔노라고 이야기도 전했다. 담임은 그런 재혁을 보며 실실 웃더니 알았다며 그를 자리로 돌려보냈다.

[오늘도 대학교 도서관 가서 공부하†rㅋㅋ?]
[응.]

쉬는 시간이면 예지는 재혁과 문자를 주고 받았다. 주로 재혁이 먼저 보내는 쪽이었다. 답변을 하지 않으면 답을 할 때까지 문자를 보내오며 귀찮게 하기에 예지는 별 수 없이 꼬박꼬박 답을 해주었다.

[거길 왜Jㅋㅋㅋ?]
[원래는 학교에서 야자하는데 축제때까지는 안하잖아]
[문예부실은어쩌고?]
[거긴주변이시끄러워서안돼]

맨 앞자리의 예지와 맨 뒷자리의 재혁이 떨어져 있는 거리는 불과 십 미터도 채 되지 않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학교에서는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는 쉬지 않고 주고 받았다.

[그럴거면 그냥 우리집 가서 해. 책상줄게.]
[싫어.]
[왜?ㅋㅋㅋ밥도준ˆい빱빱?

예지는 한숨을 쉬고 키패드를 두드렸다.

[너...또 그럴려고 그러잖아.]
[내가 뭘 했다고 그래. 대?ㅋㅋㅋ]
[암튼 싫어.]

문자가 전송이 되었다. 그러나 거의 1초만에 답장을 하던 재혁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예지는 왜 그런가 싶어서 궁금해하고 있는데, 교실 뒤쪽에서 재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오늘 클럽 갈래?

예지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물론 재혁이가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아니었다. 그의 패거리에게 한 소리였다. 그러나 근처에 있는 친구에게 하는 소리치고는 목소리의 데시벨이 조금 높았다. 조금 떨어져 있는 예지에게까지 아주 잘 들리는, 그런 크기의 목소리였다.

클럽? 좋지. 안 그래도 장흥동에 새로 오픈한데 있다던데? 갈래?
그러지, 뭐.

예지는 핸드폰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서둘러 교실을 나왔다. 곧 재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왜?
야! 나 오늘 니네 집에 갈래.
안되겠는데... 나 바빠.

예지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클럽 간다면서? 가면 또 술 먹고 그럴 거 아냐?
그러겠지. 여자애들 좀 꼬셔서 따먹고 시비 거는 새끼 있으면 때려 눕히고... 뭐, 그런 맛에 가는 거니까 말야.

예지는 기가 찼다. 그러다가 또 밖에서 문제가 생기면 안에서 애써 평범하게 지내는 것이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가지마.
내가 왜?
내가 가지 말라고 하니까.
니가 뭔데?

재혁의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예지는 빠르게 말했다.

나보고 너네 집에 오라면서? 내가 갈테니까, 그러니까 괜히 나가지 말고 집에서 나랑 같이...
너랑 같이? 뭐?

순간 예지는 아차싶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런 소리를 한거지?'

....같이 공부하자고.
푸하하하! 내가 공부?

재혁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예지는 내심 불안했다. 그러나 웃기를 마친 재혁은 시원스레 말했다.

니가 온다고 한 거야, 알았지?
....그래, 알았어.

간신히 수업종이 울리기 전에 그녀는 재혁에 대한 설득을 마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수업이 모두 끝나고, 재혁의 집으로 가기 전에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행여 팬티에 분비물 등이 묻어있지는 않나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깨끗했다. 제혁의 집으로 가자 일하는 아줌마가 문을 열어주었다. 방으로 올라가자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먼저 돌아간 재혁이 침대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녀가 방에 들어서는 걸 힐끔 본 그는, 왔어?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예지는 가방을 책상 옆에 내려놓고 자기 공부할 걸 꺼냈다. 

처음에는 재혁이 쪽을 의식하느라 공부가 잘 되지 않았다. 또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 또 보자고 할지 모른다. 그랬다가는 자신도 거부하지 못 하리라....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든다.... 안 그래도 그런 식으로 신경 쓰이는데 재혁에게는 수시로 전화나 문자가 오곤 했다. 결국 예지는 참지 못하고 재혁을 째려보았다.

나보고 여기서 공부하게 해주겠다며? 그러면 좀 면학분위기를 조성해줘야지!
면학...? 어. 그래라. 그럼.

재혁은 핸드폰을 껐다. 그에게 나오라고 닥달하는 무리와의 연락은 그렇게 끊어졌다. 재혁은 벽장에서 만화책을 가져오더니 그걸 읽기 시작했다. 방은 다시 조용해졌고 예지는 가까스로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간이 되어, 아줌마가 올라오더니 저녁을 차려놓았다고 알렸다. 재혁과 예지가 내려가니 아줌마가 퇴근을 하고 있었다. 바람처럼 휑하니 가버린 아줌마가 떠난 부엌의 식탁에는 2인분의 저녁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예지는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저 분은 매일 오는게 아냐?
매일 오면, 내가 외박을 못 하잖아.
외박....

외박을 하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예지는 참았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나니 재혁이 커피까지 끓여주었다. 커피를 마시며 재혁이 예지에게 물었다.

또 공부할거지?
어? 어...

재혁이 앞장 서서 방으로 올라갔고, 예지도 그 뒤를 따랐다. 평소 하던대로 11시까지 공부를 하고 난 예지가 책상에서 일어났을 때, 재혁은 침대에서 이미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예지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재혁의 잠든 모습을 찬찬히 살핀다. 어렸을 때의 귀여움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예지는 그 얼굴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내었다. 잠시 후, 예지는 재혁이 깨지 않도록 가방을 챙겨 방을 살짝 나섰다. 발걸음 소리를 죽여 2층 복도를 지나 내려가려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딜 가?
......깨..깼어?

오늘은 그 확인인가 뭐시기인가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건가 싶었던 예지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시간이 늦어서 가보려고. 너도 자고 있길래.
기다려.

재혁이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예지는 안절부절했다. 자신도 방으로 따라 들어가야 하나. 괜히 여기 있다가 복도에서 바로 보자고 하면 그것도 난감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예지는 옷을 입고 나온 재혁에게 말을 건네면서 퍽 쭈볏거렸다.

저...저기...
응? 왜 그래?
아니, 그게 아무래도...

그러나 이쪽으로 걸어오던 재혁은 예지를 지나쳐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 다 내려간 재혁은 예지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간다면서?
어?
가자.

예지는 얼떨결에 재혁을 따라나섰다. 재혁이 앞장 서서 걷고 예지는 그 뒤를 따랐다. 예지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냥 방에서 확인작업을 하게 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복도에서라도. 그래도 거긴 실내가 아닌가. 지금 길을 걷고 있는데, 대체 어디서 확인 작업을 하겠다고 덤빌지 몰라 그녀의 불안은 자꾸 증폭되었다. 설마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그러자고는 하지 않을테고... 그녀는 재혁의 집에서 자신의 집까지의 동선을 그려보았다. 그 안에 사람들이 그나마 적게 오가는 곳이 어디일까 머리 속에 떠올려본다. 공원? 늦은 시각이니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다. 나무나 시설물로 드리워진 그늘도 꽤 있을 거다. 거기가 나을려나. 아니면 놀이터 같은 곳에 가면 동굴 같이 생긴 놀이물도 있고....

들어가.
엑! 어딜?!

그녀는 재혁의 말에 화들짝 놀라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싶어 둘러보던 그녀는 두번째로 놀랐다.

우리 집?

그러자 재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럼 너 집에 안 가고 어딜 가려고 그랬어?

예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물론 우리 집에 지금 아무도 없기도 하고... 그렇지만... 그래도 왠지....

예지는 눈 앞이 캄캄했다. 자신의 집에 재혁을 들이고 싶지 않은 건 둘째치고 어쩐지 그를 자기 방에 들였다가는 걷잡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확인이 확인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재혁의 혀가 닿았던 지난 번 일을 떠올려 본다면....

그럼, 난 간다.
.........가?

재혁의 말에 예지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재혁은 그녀에게 손을 들어 보이곤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가고 있었다. 예지는 의아했다. 눈을 깜빡이고 있느라 재혁에게 인사 할 타이밍도 놓친 후다.

'서..설마, 데려다 준 거야?'

예지는 재혁이 자신에게 확인 작업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이런 식으로 데려다 준 것에 대해 의아해졌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고보니 재혁은 여태까지 항상 예지를 데려다 주었다는 게 생각이 났다.

'이상한 녀석.'

그녀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날, 그 다음 날도 재혁은 계속 이상했다. 학교에서는 지극히 얌전했고 줄여입었던 교복 바지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담임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우호적인 의견이 돌고 있다고 예지에게 귀띔해 주었다. 예지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머리 속으로는 생각이 복잡했다. 오늘 확인 작업을 하지 않았으니 내일은 또 이상하게 나올 거야. 그러나 내일의 재혁은 괜찮았다. 심지어 다음 날의 모레와 글피까지도. 그럴수록 예지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래서 재혁이 또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주면서 이런 말을 꺼냈을 때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일은 뭐해?
뭐...뭐하다니!
왜 그렇게 놀래? 너 요새 내가 무슨 말만 하면 깜짝깜짝 놀라더라?
어...어...그게.. 암튼 내일은 왜?

내일은 토요일이었고 거기다 놀토였다. 재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영화라도 하나 보러 갈래? 이번에 재미있는 거 하나 개봉하던데.

예지는 머리 속에서 이런 연상을 했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본다. 영화관은 어둡다. 어두운 곳에 재혁과 그녀가 간다! 꺄악! 안돼! 게다가 재혁이 말하는 '재미있는 거'라니. 대체 어떻고 어떤 내용이길래 '재미있다'고 하는 걸까. 생각 만으로 예지의 얼굴은 빨갛게 익어버렸다. 꺄악! 절대 안돼! 라고 생각했다.

아, 안돼! 나 공부해야 돼. 영화는 너 혼자 보러 가.

재혁이 혀를 찼다.

영화를 혼자 보러 가는 사람이 어디있냐? 알았어. 그럼 그냥 우리 집에 와.

예지는 펄쩍 뛰었다. 방금 전까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던 그녀였기에 재혁의 말은 도심지에 투하된 폭탄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머리 속에서 비상등이 번쩍이며 민방위 훈련을 소집한다. 예지는 소리를 빽 질렀다.

내가 너희 집에 왜 가!!

그러자 재혁은 한층 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차피 도서관 가서 공부할 거면 우리집에 오라고. 너 요새 맨날 우리집 와서 공부하잖아. 안 그래?
어? 그.. 그랬지.

그러고 보니 그랬다. 재혁은 그녀를 손 끝하나 건드리지 않고 말 그대로 공부장소를 제공했고 예지는 거기서 계속 공부했다. 딱딱한 의자와 잘 나오지도 않는 에어콘, 그리고 수시로 오가는 사람들로 인해 번잡스럽고 불편한 도서관보다야 재혁의 방이 백 배 편한 것도 사실이다. 의자도 편안하고 책상도 딱 좋다. 참고서도 다 있고 재혁의 문제집도 그녀 차지가 된지 오래다. 게다가 맛 좋은 밥도 공짜였다. 이제 곧 축제가 지나고 나면 다시 또 야자를 하게 될텐데 지금 같아서는 학교에서 야자를 하는 것보다는 재혁의 집에서 공부를 하는 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곧잘 하게 될 정도였다. 

그... 그래? 알았어. 내일 봐.

재혁은 그녀에게 손을 들어보이고 몸을 돌렸다. 집으로 뛰어들어간 예지는 새로운 고민에 휩싸였다.

'뭘...입고 가지?'

여태까지는 항상 방과 후에 재혁의 집에 갔었기 때문에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내일은 교복을 입지 않는다. 즉, 사복을 입어야 한다는 건데...

'진짜 옷 없네...'

옷장을 뒤지던 예지는 울상이 되었다. 여태까지 옷에 대해 관심이 없던 그녀였다. 내일 당장 입고 갈 옷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의 서랍을 열었다. 매달 받는 용돈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보고 싶은 책을 사 모으는 거 외에 딱히 쓸 곳이 없어 그냥 모아만 두던 걸 꺼낸다.

'이 시간에 옷가게가 연 곳이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대체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옷을 사입는단 말인가. 예지는 그 누구가 다름 아닌 재혁이라는 사실에 스스로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돈을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일부러 서랍을 세게 닫고 침대로 확 들어갔다.

'이게 다 재혁이가 이상해서 그래. 나까지 이상해지고 있어.'

그렇게 스스로를 애써 변명한다. 해놓고도 본인도 믿지 않을 변명이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계속 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새로운 고민에 휩싸였다.

'치...마로 입어야 할까? 아님 그냥 바지를....?'

그걸 결정하느라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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