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1일 화요일

약사아줌마 - 8부

점심전 영이를 데려오고 아줌마는 약속이 생겼다며 서둘러 나갔다.

뭔가 불안했다. 
선미라는 분 전화를 받은 후 농담을 해도 잘 웃지 않고 약간 초조해 
하는 거 같았다. 

저녁때가 돼도 들어오지 않는다.
전화해서 왜 안 들어오냐고 걱정한다고 말하고 싶어도
괜한 오지랖으로 보일까봐 서재에서 컴퓨터만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11시가 넘어서 핸드폰이 울린다.
-성일아.. 헤헤 누나야.. 
취했나 보다. 전화기 너머로 소음이 시끄럽다.
-성일아 누나가 많이 취했는데 이쪽으로 와줄래?

서둘러 나갔다. 
걱정스러우면서 짜증도 났다.

술자리가 있어서 늦어지면 전화로 이야기를 해주던지. 
초조한 얼굴로 나가서 연락도 없고 술이 떡이 되어서 전화하고.




말해줬던 술집으로 진짜 힘들게 물어물어 찾아갔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어서 지도를 볼수가 있나 생전처음 보는 곳에서
술집을 찾는건 안습이다. 

자리를 찾아가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아줌마는 벌써 꽐라가 되서 울다가 웃다가 술주정을 하며 앉아있고
선미라는 친구분은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저희 누나 많이 마셨어요?
=성일씨라고 했지? 한잔받어.
ㅆㅂ 아무리 두번째 만남이지만 초면부터 반말이다.
=내가 성일씨 누나 친구니까 말 편하게 할께. 나 존대하는거 밥맛이라고 생각해
아.. 예 편하게 말씀하세요. 쪼...쫄았다. 
=나 주리(약사아줌마)30년 친구야. 어릴때부터 알어.
아.. 예.. 
=그래서 묻는거야. 너 솔직히 말해. 주리사촌동생 아니지?

심장이 쿵... 소리를 내며 발바닥 까지 떨어지는 느낌이였다.



뭔가 분위기를 바꾸는 액션을 취해야 겠다는 생각에
맥주를 따르던 글라스잔에 소주를 가득 부어 그대로 원샷을 하며 앞에 앉은
선미누나의 얼굴표정을 살폈다. 
쓰바... 얼굴 표정하나 안바뀌고 날 노려본다. 
팔장을 끼고 손가락에는 담배가 끼워있고 다리는 꼬고 앉은 상태에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날 노려보고 있다.
그 잠깐사이 머리를 굴려봐도 '넘겨집는다' 라는 단어만 머리속에 맴돌았다.

=너네 둘 사이 다 알아. 

술기운이 확 하고 올라온다.

기싸움에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그래로 눈을 치켜뜨고 처다봤다.
남자라면 헛소리 말고 불만있으면 계급장 띄고 맞장한번 뜹시다. 
라고 하겠지만 여자와의 기싸움은 경험이 없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선미누나는 깊은숨으로 담배를 빨더니 상채를 숙이며 내 얼굴에 후~불며 말한다.

=야 어린놈. 주리 잘 챙기고 나중에 나랑 연애한번 하자.

나랑 연애한번 하자. 
나랑 연애한번 하자.. 
나랑 연애한번 하자... 
나랑 연애한번 하자....

당황스러웠다.

=나 간다. 술값 남자니까 너가 계산해라. 누나 간다~ 

대답도 안듣고 그대로 일어서더니 뒤도 안돌아 보고 또각 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밖으로 사라졌다.

이번엔 황당했다. 지갑도 안들고 나왔는데..아는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옆에 꽐라가 되서 널부러져 있는 아줌마 핸드백을 뒤져보니 다행이 지갑이 있다.
후.... 깊은 안도의 한숨이.. 

계산을 하는데 ㅆㅂ.. 뭔 여자둘이서 소주를 8병이나 마셨는지.. 

택시 뒷자리에서 호기심에 아줌마 지갑을 뒤져봤다. 
영이스티커 사진이 있고 안쪽에 선미라는 사람과 찍은 사진도 있는걸 봐서 
둘이 정말 친한가 보다. 그것보다 '나랑 연애한번 하자'라는 말이 자꾸 맘에 걸렸다.

분명히 뭔가 의미하는 단어인데. 
정말 자기랑 섹스를 하자는 말인가? 아니면 니가 주리 사촌동생이 맞다면 
누나 친구니까 사귀자는 뜻인가? 술기운이 올라와서 머리도 아픈데 더는 머리 굴리기가
싫었다.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게 밝혀지겠지. 
이 아줌마가 술기운에 친구에게 털어놨던지, 선미 누나가 넘겨 잡은건지.
이도저도 아니면 술자리에서의 헛소리였던지.

월요일 아침.
면허학원 기능시험이 오전에 있어서 10시가 넘어서 약국에 출근했다.
쯧쯧 얼굴표정을 보니 아직도 술이 덜깨있는 표정이다.

누나 나왔어.
-으응.. 시험은 잘봤어?
응 도로주행만 합격하면 끝나. 그런데 어제 무슨 술을 그렇게 먹었어?
-아오... 말 시키지 마. 선미 그 계집애랑 술먹으면 내가 필름이 끊어진다니까.

의자에 앉아있는 아줌마 뒤에 다가가서 천천히 어깨를 맛사지 했다.
-아.. 시원하다. 
누나 그런데 혹시 어제 술자리에서 선미누나한테 우리사이 털어놨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 아줌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휙 돌리며 되려 묻는다.

-무슨소리야?

어제 술자리에서 일을 이야기 했다.
아줌마가 꽐라가 되서 널부러져 있는동안 선미누나의 추궁을 받았고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연애한번 하자는 말 그리고 술/값/도/안/내/고/가/더/라 까지.

이번에는 키보드 옆에 고개를 숙이더니 한숨을 여러 번 내쉰다.
이 아줌마 술 먹으면 다 털어놓는 부류구나... 쯧쯧쯧 
이거 도로주행만 합격하면 면허증 나오는데 당장 짐 싸서 도망가야하나. 
혹시라도 선미 누나가 아줌마 집에 연락해서 가족들이 몽땅 들이닥쳐서 나 산으로 끌고 가서
거꾸로 묻어버리는건 아냐? 머릿속에서 온갖 추축이 난무했다.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다.

점심을 먹을때도 날이 어두워저 약국문을 닫을때도 아무 말이없다.

더 불안했다.

집에 전화하더니 가사도우미에게 뭔가 이야기를 한다. 오늘 늦을꺼 같아서 영이혼자 자면 불안하니
작은방에서 같이 자달라고, 고마워요 아줌마.라는 대답을 듣는거보니 뭔가 할말이 있으려나 보다.
심각한 상황을 보니 섹스를 하는건 아니고..

-성일아 조용한곳 가서 이야기좀 하자.

아..속으로 자꾸만 욕이 나왔다. 쓰바... 이제 필요없으니 짐싸서 가라는건가? 
아님 친구에게 들켰으니 사라져줘라. 그것도 아니면 다 알려졌으니 이번기회에 결혼식 올리고 같이 
살자는건가? 졸라 불안했다. 자꾸만 아줌마 눈치를 보며 졸졸 따라갔다.
아..띠파... 집에 가라고 하면 어쩔수 없지만 도로주행 까지만 합격하고 간다고 할까? 잠은? 
잠은 약국에서 잔다고 할까? 잠깐만 다른 시도에서 도로주행시험이 가능한가? 
에이..나도 졸라 유치한놈이다. 이런상황에 도로주행이나 걱정하고..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말을 이어간다. 
거기서 나온 내용은 충격이였다. 

나와 선미는 유치원때부터 친구였어. 초,중,고를 같은학교를 나왔어. 난 약대, 선미는 미대를 갔어.
그런데 중학교때 같이 잔적이 있는데 그때 선미가 이상했어. 
자는 내 입술에 입마춤을 하고 몸을 만지는데 그게 싫지는 않더라. 고등학교에 가면서 서로를 향한 
스킨쉽 강도는 강해져 갔고 지금도 한달에 한두번씩은 잠자리를 한다고. 남자와의 관계가 싫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여자에게 흥미를 느끼지도 않는 동성연애라고 하기도 양성연애라고 할수도 없는
그 어느쪽에도 정의내릴수 없는 관계를 이어나간다고. 

이런 사실을 털어 놓는게 너가 처음 이라며 말을 끝냈다. 

입이 딱 벌어져 할말이 없었다.
뭐라 대꾸를 해야는데 마땅히 말할 단어가 생각이 안났다.

할말이 없었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도 아줌마도 아무 말이 없다. 

그럼 그 관계가 누나 첫 경험이야? 말을 해놓고도 내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아줌마는 아무말 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그럼 선미 누나는? 선미 누나는 지금 만나는 사람 없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동성연애 그런 거 없어지지 않을까? 내가 동성연애를 폄하하는건 아니야. 인정하고 존중해.
그런데 내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서 당황해서 그래.

솔직한 생각은 지금의 관계를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선미 독신주의야. 남자한테 정주고 그런거 싫데... 감정 소비하는거 같아서.


문득 군시절 후임이 생각났다. 분대장 시절 입대한 신병인데 여자친구가 얼마후 결별을 통보했다.
우리는 입대후 의례 깨지는 부류의 커플인줄 알았는데 휴가복귀후 털어놓는 후임의 이야기는 
충격이였다. 자신의 여친이 동아리 선배와 바람이 났는데 그 선배가 여자선배였다. 바람난 상대
가 남자라면 주먹다짐이라도 해서 화를 풀어버리고 올 텐데 여자라 아무것도 할수 없이 그냥
복귀했다고. 남녀관계와 다른 어떻게 접근할수 없는 관계가 여자와 여자의 관계라는 말이 생각났다.

커피숍을 나와 집앞 놀이터 그네위에 앉았다. 
이대로 집에 들어갈수 없었다.

누나. 나 짐싸서 집에 갈까?
-가고싶어?
난 누나 옆에 있고 싶은데 선미누나가 나 싫어하잖아.
-...
누나 생각은 어때?
-...
내년이면 복학해서 만나기 힘들잖아. 여기서 통학하기도 힘들고
-너 가고 싶으면 도로주행 시험 보고 가.. 실기까지 합격했는데 지금 포기하면 아깝잖아.

아.. 도로주행. 참 그게 남았지. 이틀동안 충격적인일의 연속이여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도로주행이 중요한게 아니라 누나 생각이 듣고싶어.
-나 솔직히 잘 모르겠어. 선미도 중요하고 너도 중요해.
그럼 선미누나 포기하고 나랑 살수 있어?
-...
혹시 몇주전 누나 모임있다고 늦게 들어온거 그거 선미누나랑 같이 있었지?
-응...

내가 남편도 아니고 남친도 아니니 둘 사이를 간섭할 자격도 마음도 없었다.
나는 나 나름의 사생활이 아줌마는 아줌마 나름의 사생활이 있으니 존중하고 이해하고 싶었지만
질투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혹시 이여자가 날 붙잡으려 친구를 이용해서 쑈 하는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했지만
그건 너무 앞서나가는 스토리였다.

집에 들어가 방에 누웠는데 그동안의 일들이 꿈만 같았다.
일장춘몽 네 글자 밖에 생각이 안 났다.

이왕 이렇게 된거 어떻게 되던지 붙잡고 싶었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아줌마 집에 살면서 안방에 처음 들어간다.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다. 샤워중인가?
방에 들어가서 욕실문에 귀를 대보니 물소리가 들린다.

누나.. 나 누나랑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어. 선미 누나가 나 싫어해도 어쩔수 없지만
그래도 시간이 될 수 있는한 같이 있고 싶다. 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오그라 들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같이 지내고 싶었다. 

아무 말도 없더니..
-성일아 건너가서 자. 우선 자고 내일 이야기 하자. 영이나 가사도우미 아줌마가 보면 오해하겠다.

다음날 오후 약국 문을 닫을때쯤 선미누나가 약국에 왔다.
=야! 너네 둘 저녁에 술한잔 하자.

영화에서 보던 처녀귀신같았다



졸...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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