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 5일 목요일

첫사랑 - 9부

그렇게 쫒기듯 현관을 나선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범죄자처럼 험상궂게 생기지
는 않았지만 표정 자체가 어둡고 성격이 거칠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하긴, 범죄자가 얼굴에
범죄자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게 아니듯 그 남자 역시 얼굴로만은 나쁜 사람이다 아니다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그는 분명 나쁜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내 여자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누나가 저런 놈에게....’

찝찝한 그녀의 표정을 뒤로하고 건물을 돌아 다시 우리 집으로 향하려는데 그녀의 안방 창
문이 활짝 열려진 게 보였다. 그 사이로는 여전히 서 있는 그녀와 밥을 먹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여전히 그녀는 부자연스러운 표정과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도대체 왜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에게 육중한 엉덩이를
내밀며 환락으로 빠져들던 그 행복한 표정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는 벽면에 바짝 붙어 몸을 숨겼다. 아무래도 두고 나온 나의 그녀의 마지막 눈빛이 마음
에 계속해서 거슬렸기 때문이다. 대문과는 거리가 있고 외지다면 외진 곳이었지만 훤한 대
낮이었기 때문에 혹시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를 두고 방으로 올라가
버리기에는 찝찝한 면이 없지 않았다.

말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 상 그 남자가 밥을 거의 다 먹은 것 같은 느낌이
었다. 나도 그러했지만 그 남자 역시 거의 밥을 마시듯이 급하고 서둘러 식사를 마쳐갔다.
그리고 그 둘은 안방으로 들어왔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이 사이에 낀 음식물을 우물거리는
남자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그녀는 여전히 어둡고 무거운 표정이었다.

“바쁘다면서?”
“아이, 얘가 오늘 왜 이래? 정말?”

“바쁘다는 사람이 이러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아~ 진짜! 빨리 끝낼게!”

주먹이 불끈 쥐어지고 있었다. 그들이 안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더욱 벽면에 달라붙어
야 했기에 더 이상 그들의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대화내용만으로도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싫어! 나 오늘은 싫어!”
“아! 진짜 짜증나게 왜 이래?”

대화를 들어보니 한동안 들을 수 없었던 그녀의 고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녀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녀의 색스러운 신음을 듣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착잡해지며 내
가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샘솟는 분노와 질투심에 눈알이 돌아버릴 것 같기도 했다.

“오빠!”
“아! 진짜! 빨리 이렇게 해 봐!”

“싫다고...”
“아잇! 씨발 진짜 확!”

그 남자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정확히 창문 밖으로 튕겨져 나오는
담배꽁초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처럼 나의 머리꼭대기에서
도 그렇게 연기가 피어오를 것만 같았다.

‘누나! 하지 마... 응? 오늘 만큼은 그냥 좀 넘어가 주면 안 될까?’

어쩌면 그녀가 아닌 그 남자에게 애원을 해야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슨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게 그 남자는 상상이상으로 높은 자세를 취하고 있었
다. 그게 싫었다. 내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느끼게 하는 패배감을 물씬 던져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오늘은... 아니 이제 그만...”
“아니, 너 오늘 왜 이래? 진짜 확 씨발....”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에 들고 있던 재떨이를 던졌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던졌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멀리 떨어진 나조차도 움찔하게 만들 만큼 강한 파괴음이 귀에 꽂혀왔
다.

“아...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꼭 이렇게 화를 내야... 이렇게 해 봐!”

창문으로 고개를 넣어보고 싶은 마음을 굴뚝 같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솔직히 겁도
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옥문을 허락하고 말았
다. 확실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귀에 들리는 살결에 스쳐 지나는 옷깃의 소리가 들려왔
고 쾌락의 폭풍을 준비하는 침대 매트리스의 스프링소리 마저 생생히 들려왔다.

“아! 아파... 살살해...”

역시 그녀의 입에서는 달뜬 코맹맹이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직 달뜬 목소리까지는 아니
었지만 그녀가 침대에서만 내는 그 콧소리가 들려왔다. 그 남자는 정말 바빴나 보다. 지난
밤처럼 느긋하고도 여유 있게 즐길만한 상황이 아니었던지 그녀의 입에서는 벌서부터 고통
에 흐느끼는 고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면서 뭐가 아프다 그래... 참아!”
“아! 아흑... 오...옵빠....”

양손에 조막만한 두 개의 돌멩이를 움켜잡은 채 나는 나의 그녀가 아파하는 신음을 들어야
했다. 이제 내것이 되었다는 작은 생각이 산산히 부셔지고 있었다. 그녀가 거친 호흡을 뱉
어낼 때 마다, 아픔에 호소하며 그 남자를 불러댈 때 마다 알 수 없는 전의를 상실해 가고
있었다.

‘아직 난 어리다. 어리기 때문에 그녀를 구할 수 없다...’

그저 내 머릿속에 어쩔 수 없음을 알리는 신호를 감지해냈다. 그가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무슨 대수인가? 그가 조금은 거칠게 나오기는 했지만 그녀 스스로
옥문을 개방한 것이 아닌가?

‘나도 성현이 좋아해...’

그 거짓말에 속아 난 기분이 들었다. 날 좋아한다면, 진정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조금이나마
내가 있었더라면 그녀는 그렇게 허무하게 옥문을 열어주면 안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그 남자에게 몸을 내맡긴 채 신음해대고 있었다.

피부와 피부가 마찰되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오고 있었다. 거친 호흡과 함께 그녀의 색스러
운 고성이 터져 나왔고 지반이 일렁일 만큼 강한 에너지가 창밖으로 흘러나오는 느낌이었
다.

“후우.... 허윽.... 흐윽! 꺄윽....”

그녀는 참을 수 없는 신음이었던지 이를 악문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듯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내 몸은 흥분이 되질 않았다. 언제나 들어오던 그녀의 달뜬 신음소리였지만 왠일
인지 자지는 요지부동 움직이질 않았다.

“어윽! 오... 옵빠... 어흑.... 아흐... 아읏! 끄읏! 꺄흣!”

그녀의 죽을 듯한 신음소리가 애처로웠다. 그녀를 두고 올 때 본 느낌처럼 그녀의 신음도
슬픈 느낌이었다. 물론 나만이 느끼는 착각일 수도 있었다.

“아악! 하악! 악! 악! 까윽!!”

점점 고조되는 그녀의 신음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꼈다. 억울했다. 내가 그토록 아끼
고 사랑하는 여자가 그 불쌍한 남자에게 몸을 내맡긴 채 신음하고 있는 것을 그저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그랬다. 또 나를 좋아한다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어오기도
했다. 양손에 쥐어진 돌멩이로 그 남자의 대갈통을 후려 찍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또
한 하지 못했다. 나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그녀의 은밀
한 부위를 탐내고 있는 한 마리의 수컷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손바닥의 두툼한 살점이 있는 부분을 입에 물었다. 가슴이 쓰리고 발끝부터 손끝까지
전해져오는 찌릿한 느낌에 슬프다는 느낌을 다시 한 번 깨우칠 수 있었다.

‘씨발새끼...’

후끈한 열기가 창을 통해 흘러나왔다. 분명히 그는 또 다시 땀에 범벅이 되어 사정없이 빠
른 속도로 그녀의 보지를 왕복하고 있을 것이었다. 부러웠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녀를 그
상황에서 구출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생각에서만 이뤄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학! 하악! 오... 옵빠... 끄흐.... 아악!”

그녀의 끔찍한 고함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의 눈엔 그 돼지 같은 남자의 뒷모습만이 보였다. 상의를 그대로
입고 한쪽 발목엔 바지와 팬티가 걸려진 발정난 돼지 한 마리가 거칠고 빠르게 허리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저 그렇게 억울하지만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보고 다시 고개를 빼내야만 했
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찾았다. 그녀의 치욕스런 모습에서 그녀의 얼굴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애처롭게 잔뜩 찌그러져 엉덩이만 치켜 올린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
고 말았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입에서는 한없이 구슬프고 애처로운 신음
이 계속됐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서도 그녀처럼 눈물이 흘렀다.

‘누... 누나.......’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동공이 흔들리는 듯 하더니 그렇게 한참동안 나와 눈을 마주쳤
다. 한참을 나와 눈을 맞춘 그녀가 두 눈을 꼬~옥 감았다. 윗니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채, 그 남자에게 잘록한 허리를 붙잡혀 피하지도 못하는 몸을 고스란히 대준 채 그의 폭풍
같은 움직임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내가 어리다는 것을... 만약 내가 성인이었다면, 아
니 그녀가 진정 나의 여자였다면 그 끔찍한 장면을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었을까 하는 의문
마저 들었다.
그렇게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는 동안 그녀는 분명히 나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그 피하는 눈길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예 침대에 뭉개진 채
그의 좆질을 받아주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창녀와도 같았다. 그것도 닳고 닳은 창녀의 모습
이 비쳐졌다. 물론 창녀라고 불리우는 여자를 한 번도 본적은 없었지만 그녀의 모습일 것만
같았다.

‘흑... 누... 누나......’

다시 그녀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다시 나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곧 깨물었던 입술을 놓아
주며 두 눈이 쏟아질만큼 커다라졌다. 발광을 하듯 허리를 비틀었고, 어금니를 꽉 깨무는
그녀의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다.

“아윽... 오빠... 나... 나 죽어... 죽을 꺼 같아.... 아악!”

미친년처럼 머리를 흔들고 잘록한 허리를 마구 비틀어대던 그녀는 다시 눈을 감으며 침대로
널부러졌다. 온몸에는 힘이 전부 빠져버린 듯 늘어져버렸고 조금씩 조금씩 떨림이 시작되었
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힘겹게 눈을 떴다. 눈가엔 맑은 이슬자욱이 맺혀 있었다.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웃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웃음을
보내주었다. 잠시 잠깐 미간이 찌푸려지는 듯 했지만 햇살과도 같은 미소가 나를 웃게 했
다.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보이려는 듯 그녀는 그렇게 내게 행복한 웃음을 던져주었다. 그
러나 그녀의 밝은 웃음이 그저 슬피 우는 표정보다 더욱 마음을 갈갈이 찢어놓았다. 어쩌면
그런 그녀의 웃음은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또는 자신을 좋아하는 한 남자에게 정을 떼
기 위한 수단으로도 보였다. 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 더욱 파고
들어오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씨발... 차라리 울어!’

손바닥을 깨문 악다구니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 손이 아픈 것보다 내 마음이 더욱 아
팠다. 그녀의 고운 하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 남자와 그녀는 아랫도리만 벌거벗은
채 나란히 붙어 있었다. 차라리 그녀가 울었다면 나는 그녀에게 오만가지 정이 떨어졌을지
도 모른다. 사람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달아나면 잡고 싶고 다가오면 멀어지고 싶은 청개
구리 심보가......

“꺄윽... 하읏... 꺄악~~~~”

그녀가 다시 한 번 눈알의 흰자위를 보이며 침대에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곧 그 남자는 황
급하게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며 그녀의 입 안으로 세워진 자지를 꽂아 넣었다.

“끄흣! 끄흐~~~~~~~~~~~~”

그의 목이 뒤로 제켜졌다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그녀는 그의 자지
를 입에 물고 무언가를 꾸역꾸역 삼켜내고 있었다.

‘씨발새끼!’

그 남자는 그 자세로 얼마 지나지 않아 쪼그라든 자지를 빼어 냈고 몸을 돌리는 순간 나도
다시 벽으로 몸을 숨겼다. 마지막 그녀의 얼굴은 입 주변에 걸쭉하고도 미끈한 액체로 더럽
혀진 상태였다.

나의 사랑하는 여자가 또 다시 처참한 꼴로 무너져버렸다. 섹스를 싫어한다던 그녀였다. 그
러나 그녀는 눈알을 뒤집으며 그 불한당 같은 자식에게 무척이나 색스러운 모습을 드러내고
야 말았다. 억울했다. 그 남자가 내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내 여자가 그러고 있는 모습 자체
가 싫었다. 누가 뭐래도 그 여자는 내 여자였다. 이미 내 마음을 흔들어 놓았고, 내 마음안
으로 들어와 있었으며, 내 마음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떨리는 몸을 어쩌지 못하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주저앉아 버렸다. 그렇게 더러운 기분
을 느끼기 위해 훔쳐본 건 아니었다. 곧 대문소리가 나며 누군가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
음에도 나는 그저 그렇게 앉아 있었다. 울타리 너머로 그녀를 그토록 처참히 뭉그러뜨린 그
남자가 유유히 사라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지 못했다. 그녀가 수습
을 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창문에서 고개만 내밀어도 엄마에게 걸릴 수 있는 곳
에서 용감하게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뻑! 뻑! 후이유~~~~~”

미치도록 쓰리던 가슴이 담배연기로 코팅이 되는 듯 한결 나아지고 있었다.

“뻑! 후우~~~~”

한 모금 더 빨자 막혔던 숨이 단번에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담배를 피워내며, 막힌 호흡을 뚫었다. 그렇게 호흡을 뚫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녀
에게 다가갈 땐 그녀가 내게 보여주었던 맑은 웃음처럼 나 역시 맑은 웃음으로 다가가고 싶
었다. 비록 정상적이지 않은 사랑이었지만 그 비정상적임이 더 아프지 않게, 더 상처받지
않도록 말이다.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른 채 다시 그녀의 집 현관 앞에 섰다. 그 어느 때보다 두근거림이 강
했다. 두근거림과 함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일렁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똑! 똑!”
“들어 와~”

어느 때보다 낭랑한 그녀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그런 목소리에 나는
그나마 안심을 했다. 그녀의 인생에 나란 놈이 끼어들면서 어쩌면 나보다 더욱 힘든 하루하
루를 겪고 있을지도 모를 그녀였다. 최소한 나란 놈 만큼은 그녀의 속을 좀 편히 해주자고
마음 먹어보지만 그게 잘 될지는 의문이었다.

“어? 설거지 해?”
“응~ 빨리 들어 와... 소파에 잠깐만 앉아 있어~”

그녀의 말대로 나는 장난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 남자가
스치고 지나갔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탱글하게 올라붙은 엉덩이도 여
전했고, 얇고도 가는 유연한 허리도 여전했다. 그녀의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도 여전히 빛
났고 쭉 뻗은 길다란 다리도 시원시원했다.

‘아~ 근데 왜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이유모를 눈물이 다시금 샘솟고 있었다. 차라리 그녀가 울고 불며 힘들어 했으면 나의 마음
은 더욱 견고해졌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녀가 욕을 하고 난리를 피웠으면 나의 억울함이
덜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바보 같은 여자는 여전히 고운 얼굴을 한 채 아무렇지도 안
게 나를 보며 웃어주고 있었다.

하긴... 뒤늦은 생각이지만 그녀가 17살 짜리 어린 남자에게 안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자의적으로 몸을 준 남자를 원망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비록 원하는 섹스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시쳇말로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에게 서른 둘의 유부녀가 그럴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성현아! 어디가?”

어쩌면 그녀는 나의 위로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위로해 줄 만큼 마음
의 여유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그를 쫒아가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 외엔 내 마음엔 그 어
떤 것도 담고 받아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오로지 나만의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그녀가 흘렸던 맑은 웃음처럼 내키지 않았던 섹스이지
만 황홀한 쾌락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직 나만의 착각에서 그녀가 위로가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이 행복함을 잔뜩 느낀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집
으로 뛰어 올라가면서도 정리가 되지 않은 머리를 마구 쥐어짜고 있었다.

“아들! 왜... 왜 그래?”
“엄마~아~”

그녀의 말대로 나는 아직 어린이였나보다. 집으로 올라와 엄마의 걱정 어린 눈빛을 보자 나
도 모르게 엄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듯 눈물을 터뜨려버렸다. 억울했다. 엄마에게 모
든 걸 말하고 떼를 써서라도 그녀를 갖고 싶었다. 나만의 전유물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왜 그래? 우리 아들! 응? 왜 그래?”

세상에서 아무리 넓고 따뜻한 곳이 있다해도 엄마의 가슴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푸근하고
도 넉넉한 엄마의 가슴에 한동안 울던 나는 격한 감정이 안정된 후에야 벗어날 수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일은... 무슨... 그냥... 울고 싶었어...”

이 세상 모든 엄마가 그러하듯 자식의 울음 앞에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
가? 하지만 우리 엄마는 달랐다. 캐묻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녀석, 다 큰 녀석이 엄마 찾아와서 울기나 하고....”

나를 안은 채 엄마의 손바닥이 나의 엉덩이를 토닥여주었다. 그녀가 토닥여 주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은 비슷했지만 엄마의 손길은 큰 울타리와도
같았고, 그녀의 손길은 지켜 달라 애원하는 느낌과도 같았다.

“근데, 너 아랫집 새댁네에서 온 거 아니야?”
“왜? 그건 왜 물어?”

“인석아! 요즘 그 집을 밥 먹듯 기웃거리잖아!”
“헤헷! 그냥... 그 누나 그림 되게 잘 그려... 그림 좀 배우느라고...”

“그림?”
“응... 미술 실기도 잘해야 내신 관리 하지...”

“으구~~ 기특한 것! 엄만 그것도 모르고 의심했잖니?”
“무슨 의심? 쳇! 내가 그런 아줌마한테 관심 있을 줄 알고?”

“네가 걱정이니? 그 새댁이 너 잡아 먹을까봐 그랬지~”
“엄마!”

역시나 눈치 빠른 엄마는 나의 행동반경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엄마를 안심시
켜 놓지 않으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울어대고도 언제 그랬냐는
듯 후련한 가슴으로 돌아온 나였다.

“그리고 아들?”
“응?”

엄마의 말투엔 갑자기 가시가 잔뜩 돋혀 있었다.

“그냥 모른 척 하고 있을 때 끊으렴?”
“뭐... 뭘?”

“니가 더 잘 알텐데... 이 세상에 끊을 것이 참 많다만... 꼭 끊어야 한다.. 알았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겁에 잔뜩 질려있으면서도 애써 부인하고 있었다. 아니 아예 모르는 척을 하고 있었
다.

“담배! 이누무새꺄! 어린 놈이 벌써부터 담배 냄새 폴폴 풍기고 말이야!”
“아! 아냐... 내가 무슨 담배를 피운다고...”

“정말이야?”
“그럼~ 엄마는 엄마 아들을 뭘로 알고...”

“하아~ 해 봐!”
“됐어!”

나는 찔리는 가슴을 부여안고 혹시나 떨어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겨나갔다.

“잠깐!”

아놔! 엄마의 추리력에 걸려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뜨끔하는 마음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위풍당당한 엄마의 기에
눌려 죽을 것만 같았다.

“아! 왜! 또!”

무조건 큰소리다!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질질 쳐 울 땐 언제고... 또 찔리는 게 있으니까 소리 지르는 것 좀 봐! 저 화상!”
“찔리긴 뭐가 찔려!”

“너! 요즘 왜 팬티 안 갈아입어! 날도 더운데... 그러다 꼬추에 습진 생긴다!”
“안 갈아입긴 뭘 안 갈아입어~”

“니 팬티가 하나도 없던데?”
“그... 그래? 요즘 더워서 안 입어~”

“아휴~ 더러워 죽겠네 이누무새끼! 너 팬티 안 입으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뭘 또 어떻게 돼?”

“바지 입다 자크에 꼬추끼면 어떡할려그래! 이 엄마가 니 꼬추를 어떻게 만들어 줬는지 몰
라? 내가 너 나중에 사랑받으라고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함부로 하고 다녀!!”
“알았어... 알았어... 입어! 입는다구!”

“꼭 챙겨 입어라~”
“알았어... 그리고! 엄마도 좀 이제 그런 말 좀 하지 마... 격 떨어지게...”

“허이구... 격? 나중에 고맙다고 절이나 하지 마... 인석아...”
“아~ 네!”

이 세상 모든 치유약 중에 엄마만한 약이 또 있을까? 어느새 나의 마음은 치유가 다 된 듯
홀가분해져 있었다. 내가 홀가분해진 만큼 그녀도 홀가분해지길 바라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당장 달려 내려가지 못했다.



누군가를 그저 멀리서 지켜보는 일...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일...
어쩌면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나였음에도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일
이었다. 사랑? 그깟 사랑이라는 단어를 알지도 못했던 나였다. 그저 한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 여자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것 외엔 이토록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만 생각하면 아련해졌고 그녀만 떠올리면 못 견디게 보고파졌다.
한 여자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은 죄 치고는 겪고, 보고, 들어야 하는 모든 것이 너무도 가
혹했다.

그렇게 방학은 끝이 났다. 누구나 다 그렇듯 방학이 끝나고 학교를 가면 몰라보게 달라져
있는 친구들을 보게 된다. 살이 엄청나게 빠진 놈, 키가 엄청나게 큰 놈, 여드름이 엄청나게
많이 생긴 놈... 나는 그들 중에 키가 엄청나게 큰 놈 축에 속해버렸다. 정확히 재보지는 않
았지만 178cm정도는 된 것 같았다. 담임선생님조차도 키가 왜 이렇게 컸냐며 놀라는 눈치
였다.

키도 컸지만 내 스스로 가장 많이 큰 것은 단연 마음이었다. 15살의 연상을 사랑하고 사귀
면서부터 나는 좀처럼 친구들 틈바구니에 낄 수 없었다. 아니, 끼지 않았다. 그제서야 포르
노를 접해가지고는 테이프를 빌리러 다니는 놈, 야설집과 야한책 등 그들은 내가 몸소 보고
겪은 것들에 환장하는 어린 영혼들이었다.

‘쯧쯔... 어린것들....’

물론 비디오나, 책과 같은 서적들은 이미 중학교 시절 석민 덕에 떼었지만 나 역시 총각딱
지는 여전히 떼지 못한 동정의 몸이었다. 실제로 그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 당시 17살에 첫경험을 한 친구들이 몇이나 되었겠는가! 하지만 난 그들이 너무
어리게만 느껴졌다.

개학식을 마치고 적응 안 되는 학교생활에 조금씩 버릇을 들여가던 나는 여전히 무겁고 재
미없는 생활의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여전히 더운 날씨는 이어졌고 여전히 그녀라는 이
름 아래서 가혹한 성인식을 이어가고 있었다. 형식상, 법률상 행해지는 성인의 의식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성인식 말이다. 길기도 길었다. 중학교 2학년 때 부터 시작된 성인식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연장의 연장을 겪는 끝없는 랠리와도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게 신기한 것은 지치지도 않는 다는 것이었다. 조금 지친다 생각이 들 때면 그녀의 고운
미소가 달래주었고, 그 마저도 지친다 싶으면 그녀가 고운 손으로 힘을 보태주었다. 야속하
고 잔인하리만치 그녀는 적당선에 서서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사람의 속을 새카
맣게 불태워가고 있을 뿐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자전거에 자물통을 채우고 있는데 슬픈 눈빛을 보여준 이후
보지 못한 그녀가 흰색의 어여쁜 원피스를 입고 내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나풀대는 흰색천
에 둘러싸인 그녀는 진정 천사와의 모습과도 같았다.

내겐 엄마라는 치유약이 있다지만 그녀는 혼자서도 꿋꿋이 마음을 잘 달래는 여자였다. 그
렇게 보였다. 아마도 나 같았으면 그 험한 꼴에 험한 일을 당하면서 몇 번이고 쓰러지거나
넘어져 울었을 것이다.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섹스를 즐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보고 있을 거라는 예상으로 그녀가 그 남자를 거부 했을리는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나란 놈에게 보이기 싫었다면 그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것으로
대신하면 됐을 테니까 말이다.

“성현아!”
“오~ 우리 마누라?”

일부러라도 나는 그녀를 더욱 반기며 얼른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고 난 그녀에게 달려갔
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안으며 며칠간의 회포를 풀 듯 볼에 쪽소리가 날 듯 키스해주었다.
정말이지 그녀가 나의 아내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정성들여 입을 맞추자 그녀는 놀라며 나를
살짝 밀쳐냈다.

“엄마 보시면 어쩌려고~ 들어가자!”

그녀는 나의 손을 잡고 집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내게 안겨왔다.
이상했다. 왠만해서는 그녀가 그렇게 애교 있게 다가서는 법이 별로 없었기에 더욱 기분이
좋았다.

“왜 그래? 남편 직장 다녀온 선물인가?”
“직장? 푸핫! 학교가 직장이야? 대학교도 아니고 고등학교가?”

“그럼! 엄연히 직장이지! 크흣”
“그런가?”

“그래... 근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차려입으셨어?”
“우리 데이트 하자!”

“데이트?”
“응!”

그녀는 돌망돌망한 눈빛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평소와 다르게 마누라 운운하며 걸어오
는 장난에도 그녀는 거부는커녕 오히려 맞장구를 쳐주며 나와 기분을 맞추었다.

“뭐야~ 언제는 미운 모습만 보여준다더니...?”
“싫어? 나랑 데이트하기?”

갑자기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무나 힘주어 말을 하던 그때의 그녀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과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당장 오늘부터 사귀자! 내가 얼마나 밉고 저급한 여자인지 보여줄게!’

어쩌면 나는 그녀의 가장 밉고 저급한 모습을 모조리 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난
그녀가 밉지 않았다. 저급해보이지가 않았다. 눈에 콩깍지가 씌여도 제대로 씌였는지 너무
어리석게도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닌 그 남자만의 잘못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런 모습은 좀 그런데?”
“이런 모습이라니?”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만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채영이는 어려보이니까... 교복 없어? 교복?”
“교복? 너... 진짜 변태지?”

“그래... 나 변태다~~~~흐흐흐흐”
“잠깐만... 고등학교 교복이 어딘가 있긴 있을건데....”

그녀를 지켜보며, 그리고 훔쳐보며 생겨버린 환상 중에 하나가 그녀와 교복을 입고 시내를
거니는 것이었다. 나중에 ‘엽기적인 그녀’라는 영화에서 재연이 되기는 했지만 그 때의 환상
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믿지 못할 만큼 어려보이는 동안의 그녀와 연인이 된다는 가정
하에 생각하고 환상에 젖은 것이 바로 나와 같은 교복을 입고 데이트를 하는 것이었다. 우
선 그녀의 교복을 입은 모습이 궁금했다. 서른 두 살의 아줌마라는 호칭을 얻은 그녀가 교
복을 입으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고, 두 번째는 15살 차이가 나는 우리 둘을 어느 시선으
로 바라볼지 궁금했다. 그들처럼 교복을 입고 나이트클럽을 들어가지는 못할지언정 그저 그
녀도 나와 같은 학생으로 되돌아가 나와 같은 어린 심정으로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하는 바
람도 섞여 있었다.

“찾았다!”

그녀가 서랍 속 깊은 곳에 숨겨둔 건 자주빛 자켓에 빨간 체크무늬가 수 놓여진 교복이었
다. 강원도에서 학교를 나온 그녀의 교복주머니엔 한자로 학교이름과 정 가운데엔 ‘高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근데 동복이야....”
“뭐 어때?”

“으이그... 이 한여름에 누가 동복을 입냐?”
“그럼 마이만 벗으면 되지?”

“그럼 상의는... 블라우스는?”
“블라우스?”

그 학교의 전통인지, 아니면 친구들의 장난인지, 블라우스에는 빨갛고 검은 글씨들이 잔뜩
수 놓여져 있었다. 뭐... 나 잊지마 채영아... 우리 죽을때까지 친구하자... 같은 유치하기 짝
이 없는 그런 글귀들이 가득해서 도저히 입을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입냐구... 그리고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이런 교복을... 쪽팔리게...”
“아냐... 이 아줌마가 뭘 모르는 아줌마인가본데... 요즘은 교복치마에 그냥 티만 입는 게 트
랜드라구, 그러니까 일단 입어!”

“나, 가방도 없고, 신발도 없어...”
“일단 입어! 가방은 없이 나가면 되고 신발은 그냥....”

나는 그녀의 신발장으로 향했다. 왠지 모르게 신이 난 나는 이것저것 둘러보다 검은 색 단
화를 구석에서 찾아냈다. 그 사이 교복치마를 입고 나온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 수줍게 서
있었다.

“이거 봐... 이상하잖아...”
“아니! 하나도 안 이상해! 너 화장했어?”

“응... 조금...”
“그럼 빨리 화장 지워! 화장 지우구 뭐지? 파우더 뭐냐... 아무튼 최대한 안 한 것 같이...
아니 하지 마!”

어른이 되면 여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화장을 한다. 그게 남들에 대한 예의니 어쩌니 하면
서도 자신의 나이를 지우기 위해 화장을 한다. 즉 예뻐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다.
또 학생들도 화장을 한다.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에 화장을 하는 것이다. 결국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을 하고 어른처럼 행동을 하지만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이상하다. 하지만 그녀는
화장을 지우니 더욱 화사하고 맑은 피부가 드러나고 있었다. 정말 그녀와 어울리지 않고 나
이가 들어 보인다면 그녀를 좋아 했을리도 없었겠거니와 그런 그녀에게 교복을 입혀 나가자
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돼... 됐어?”
“응? 으...응 돼... 됐어~”

그녀가 마지막으로 딸기가 그려진 하얀 티셔츠를 입고 안방문을 나섰다. 발가락과 발가락을
교차하고 두 손을 모아 수줍게 선 그녀는 영락없는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고1로는 좀 그렇
다면 고3정도 되어 보이는 조금은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특히 하얗게 윤기 도는 피부
와 전혀 아줌마스럽지 않은 핫 한 바디를 소유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저.. 정말 괜찮아?”
“진짜 예쁘다니까? 정말이야~”

그녀는 묻고 또 물었다. 실제 고등학생인 나의 눈이 가장 확실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로 그녀는 전혀 서른 둘로 보이지 않았다.

“이거?”

그녀는 신발을 내려다보며 난생을 표했다. 굽이 전혀 없는 앞 코가 동그란 모양의 단화였
다.

“그럼? 이 복장에 뾰족 구두 신을래? 말 들어 쫌!”
“그래도... 이건 유행도 너무 지났고... 굽이 하나도 없어서...”

“채영이 너는... 헤헷! 그렇게 입고 있으니까 반말도 쉽게 나오잖아... 아무튼 너는 다리도
길고 예뻐서 괜찮아... 유행은 무슨... 학생이 무슨 유행타령이야!”
“그.. 그래도...”

거의 반 강제적으로, 반 협박으로, 반 부탁으로, 반 애원으로 단화를 신기고 엄마의 눈을 피
해 집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긴 해가 저녁 7시가 다되었음에도 한 낮처럼 비쳐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어색한지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도 보고, 쇼윈도에 자신을
비쳐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괜찮다니까~”
“지.. 진짜 괜찮아?”

“그래~ 빨리 와~”
“근데 어디가게?”

“어디긴... 시내가야지...”
“시내?”

그녀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는 팔짱을 끼며 붙어 섰다. 조금은 타이트한 티셔츠 때문인지 팔
에는 그녀의 아담한 가슴이 눌려왔다.

‘크으~ 짜릿한 거...’

그녀가 학생답지 않은 건 단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속옷이었다. 흰색티에 어울리지 않게
빨간색이 드러나는 속옷 외엔 그녀는 누가 봐도 여고생이었다.

“야! 정채영! 요즘 고딩들은 팔짱 안 껴... 손잡고 다니지...”
“그.. 그래?”

나는 그녀의 작은 손을 끌어내려 깍지를 끼워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몸이 바짝 긴장하듯
얼어붙는 것처럼 뻣뻣해지고 있었다.

‘귀여워... 순진해...’

누가 그녀를 결혼 한 유부녀로 볼 것이며, 자신의 남편이 아닌 그 불쌍한 남자에게 몸을 희
생한다고 생각할 것인가? 갑자기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마음속 한 구석이 쇠잔해지는 느
낌이었다.

“오늘 뭐할까?”
“뭐할거야?”

“뭐야~ 니가 데이트 하자며~”
“이렇게 입혀서 데리고 나가는 사람이 책임져야지!”

“그래? 그럼 우리 오늘은 진짜 학생처럼 놀까?”
“콜!”

“콜?”
“콜콜콜!!!”

그녀와 나는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뭐야.. 그 장지갑은? 아줌마 티내는 거야?”
“신분증은 있어야지... 그리고 손에 아무것도 안 드니까 불안하잖아~”

“야! 교복이 신분증이고 손엔 내 손을 잡으면 되지... 으이그...”
“쳇! 나 안 나갈래... 계속 그렇게 구박만하고... 나 안 나가!”

“알았어.. 알았어! 미얀... 미야~~~안!”
“그러니까 잘 해....”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입고 있는 옷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는 모양이다. 영락 없는
여고생처럼 행동하는 그녀를 보니 더 할 나위 없이 기쁜 마음이 샘솟고 있었다. 생각 같아
서는 그녀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려주고 싶었지만 동네인지라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아쉬
웠다.

“채영아! 버스왔다!”
“버스? 알았어...”

그녀를 먼저 올려 태우고 뒤를 따라 내가 올라탔다. 그녀는 잔돈이 없었는지 천 원짜리 지
폐를 냈고 나는 회수권을 낸 뒤 학생들만의 자리인 맨 뒷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이 봐 학생!”

나는 자동적으로 학생을 부르는 기사아저씨를 쳐다봤다.

“네?”
“자네 말고, 그 여학생!”

자리에 앉으려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이 동그래진 그녀는 말없이 버스기사를 쳐다봤다.

“잔돈 받아 가야지!”
“아! 네...”

그 당시 어른은 700원, 학생 요금은 450원이었다. 그런 그녀가 천 원짜리 지폐를 낸 후에
경황이 없었는지 그대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녀는 창피한지 쪼르르 달려가 잔돈이 나오
는 입구로 가자 버스기사는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풉!”

그녀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며 자그마한 손바닥을 벌려 잔돈을 보여주
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550원이 들려 있었고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웃음을 참지 못했
다.

“아! 그만 웃어!”
“큭! 아.. 아니.. 그게.. 쿠큭!”

“왜! 학생이 학생요금 낸 건데 왜 그렇게 웃냐고!”
“아~ 웃기잖아....”

버스안의 승객들은 우리를 미친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것보다도 그들의 그런 눈빛에
창피해져 왔다.

“채영아... 너 그거 알어?”
“큭! 뭘...”

“너, 그냥 있을 땐 진짜 모르겠는데... 그렇게 웃으니까 나이 들어 보여!”
“쳇!”

잠시 동안 정색한 그녀였지만 결국 그녀는 다시 웃음이 터졌고 그 웃음은 어느 할머니의 주
의로 인해 멈출 수 있었다.

“이제 알겠지? 채영이 니가 얼마나 완벽한지?”
“응! 이제야 좀 용기가 나는데?”

하루에도 수 백 명의 학생들을 보는 사람이 버스기사일 것이다. 그런 그의 눈을 속일 정도
면 그녀가 얼마나 학생의 모습과 가까운지 알 수 있을 만큼 자신감을 얻은 그녀였다.
시내로 나오자마자 수많은 학생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의심의 눈초리
로 쳐다보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뭐할까? 뭐 먹을까?”
“응... 배고프다... 뭐 먹자!”

나는 그녀를 데리고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쫄면집으로 데려갔다. 2,000원짜리 쫄면이었지만
맛 하나만큼은 2,000원 그 이상을 하는 학생들이 가장 운집한 공간이기도 했다. 쫄면과 고
기만두를 시키고 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다 봤다. 그녀는 더웠던지 길다란 생머리를 한데
모아 묶어내고 있었다.

“예쁘다... 내 여친 예뻐!”
“푸흣! 조용히 해....”

꿈만 같았다. 그녀와 처음 하는 데이트가 가슴 설렜고, 서른 두 살의 아줌마가 교복을 입고
나와 같이 고교생의 모습을 한 채 거니는 것 또한 스릴 있었다. 설사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
도 만나게 된다면 그녀는 순식간에 정신 나간 여자로 보여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왜? 내 여친 예쁘다는데?”
“어흐... 넌 지금 내가 제 정신으로 보이니?”

“그럼? 뭐가 어때서? 내 여친 정말 예쁘다!”
“후우~~~~”

아직은 어색한지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두고 있었다. 손가락에 칠해진 빨간색 매니큐어
역시 학생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때? 오랜만에 학생 신분으로 돌아온 기분이?”
“몰라~”

만두 하나를 입에 넣으며 수줍어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예뻤다.
수줍어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보였다. 물론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것을 서서히 즐기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 학생답게, 정말 건전하게 노는거야...”
“콜!”

배도 채웠겠다 우리가 향한 곳은 바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스티커 사진기 앞이었
다. 이미 스티커 사진기계 앞에는 여러 학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우리도 그들 틈에
껴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녀 역시 스티커 사진은 처음인지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고생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각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여학생들과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의도적으로 비교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처럼 콩 깍지가 씌어진 내
눈에만 학생으로 보일 수 있다는 걱정에서였다.

주관적인 잣대 안에서도 그녀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고생이었고, 실제 여고생들과의 비
교에서도 그녀는 당당히 수위를 차지하는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
다. 순한 얼굴에서 풍겨오는 이미지는 그저 학급에 착한 친구로, 손톱과 브래지어 끈에서
풍기는 붉은 계열의 색채는 날라리 여고생 같은 이미지가 마구 섞여 묘한 이미지를 만들어
주었다.

더구나 한창 예민한 여고생들 밭에서 그녀가 조금이라도 주책스런 모습이었다면 분명 그녀
를 두고 여기저기서 수근 거릴 것은 분명했지만 다행히 우리를 두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
다거나 수근 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 성현아!”

그녀와 나란히 손을 잡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어깨를 치며 나
를 불렀다. 석민이었다. 민영과 손을 나란히 잡은 석민이 베시시 웃고 있었다.

“이야... 공부벌레 강성현이를 시내에서 볼 줄이야...”
“미친놈! 아.. 안녕하세요 누나?”
“어머~ 성현아~ 오랜만이다~~~~”

호들갑스레 인사를 하는 민영의 얼굴 대신 나는 가슴을 바라봤다. 굽이 있는 신발을 신어서
인지 대충 키가 나와 비슷한 그녀는 다시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커다란 가슴을 지니고 있
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만약 그녀가 곁에 없었다면 나는 그 커다란 양감을 자랑하는
가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을 테지만 나의 그녀도 민영 못지않게 예쁜 가슴을 가지고 있다
는 걸 눈으로 확인 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누구야? 응? 야!! 누구야~”

나의 옆구리를 찔러가며 그녀의 정체를 묻는 석민은 배신감이 든다는 표정으로 일관하더니
곧 낯짝 두껍게 나의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전 성현이랑 제일 친한 친구 김석민입니다.”
“아...네... 안녕하세요~”

“우와~ 미인! 예뻐! 오~~~ 강성현....”
“후훗!”

사실 시내로 나오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 마주쳐도 단 한 사람, 석민과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워낙 극성 맞고 활달한 친구라 조용히 그녀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 계획이 전부 망
가져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기 좋게 그들에게 들켜버린 나는 괜스레 마음이
좋질 않았다. 시끌시끌한 녀석이 싫지는 않았지만 조용하고 자유롭게 그녀와 단 둘이 하고
팠던 데이트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잘 됐다! 같이 놀자!”
“아~ 됐어~”

‘아~ 석민아... 제발... 제발 좀 꺼져 줄래?’

은근히 눈빛으로 거부의 시선을 마구 보내는 나였지만 석민의 시선은 이미 그녀의 전신을
훑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분명 ‘이 여자 꽤나 괜찮은데?’라는 표정과도 같았다.

“아~ 왜! 저...기... 같이 놀아도 되죠?”
“절루 꺼지라고!”

원래 오지랖이 넓기도 하지만 석민은 나를 그냥 보낼 인간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묻는 그를 보며 나의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만 바라보고 있
었다.

결국 석민의 끈질긴 대시에 나와 그녀는 그들을 따라 시내에서 가장 왁자지껄 한 음식점으
로 향했다. 물론 그녀와는 스티커 사진도 찍지 못한 채 따라나선 게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
았다. 석민을 뒤따르는 동안 나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챘다. 부드러우면서도 매끈한 촉감
에 심장에서는 스파크가 튀는 느낌이었다.

‘에잇! 김석민... 너 내가 언제간 복수한다!’

민영과 장난을 치며 앞장서 걷는 석민의 뒷통수를 바라보며 은근한 복수심을 불태웠다. 언
젠가는 석민에게 복수로 되갚아줄 것을 다짐했다.
우리가 찾아간 곳은 100% 고등학생들만 들락거린다는 술집이었다. ‘인터뷰’라는 술집으로
이미 학급에는 공공연히 소문이 퍼지던 곳이기도 했다. 물론 나는 석민에게 가장 먼저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 고1이라는 타이틀로 술집이란 곳을 기웃거린다는 게 내겐 거부감으
로 다가왔던 기억이다. 석민 역시 어느 정도 까졌다고 보면 까진 민영을 통해 알게 된 곳이
라는 술집에 들어서자 담배연기는 자욱하고 나와 그녀처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바글바글
했다.

“야! 술은 좀 그렇지 않냐?”
“야! 잔말 말고 따라와!”

정말 학생답게, 건전하게 놀자는 제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두 개 층을 쓰
는 그 술집에서 2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쌍쌍이 온 우리들이 눈
꼴 사나운지 옆 테이블의 험상궃은 사내 녀석들이 한 동안 우리를 째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싸움을 잘하지도, 학교에서 조금 놀지도 않는 나에겐 무척이나 부담되는 눈길들이었
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는 모델에 가까울 정도로 예쁘고 몸매도 끝내주는 여자와 비록 나
이를 많이 먹긴 했지만 여고생과도 같은 얼굴을 한 천사같은 나의 그녀가 함께였기 때문일
것이었다. 묵묵히 내 옆을 지키고 선 그녀는 나와는 달리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한 표정으로
그들을 따르고 있었다.

“피처 하나랑요... 마른 안주 하나랑 골뱅이 주세요”

나의 그녀에겐 묻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주문을 해버린 그들이 야속했지만 조용히 가게안
을 살피며 젊은이들의 환락가에 들어선 아주머니 한 분은 처음과는 달리 시끄러운 분위기에
적응이 안 되는지 연신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볼 것도 없는 그저 그런 호프집이었는데도 말
이다.

“저기 나이가...”

석민은 뻥튀기를 알바생이 올려 놓고 가자마자 한 웅큼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그녀에게 말
을 걸었다. 가장 친한 친구의 여자친구에게 무척이나 큰 관심을 쏟는 그였다.

“아~ 이름은 채영이고 나이는 고3!”

대신 해서 대답을 하자 석민은 ‘너한테 안 물었거든?’라고 타박하며 얼음물을 한 모금 들이
켰다.

“어? 그럼 우리 민영이랑 동갑이네?”

석민이 말하자 민영은 금세 동갑인 그녀에게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나의 여자
친구인 그녀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어느 학교야? 교복은 제일여고인거 같은데, 몇 반이야?”
“아~ 채영인 서.. 서울로 다녀...”

“아~ 그래?”
“응...”

그녀가 가장 난감할만한 질문은 내가 먼저 선수를 쳐 대답해주었다. 괜스레 그녀에게 미안
했다. 팔자에도 없는 고딩 노릇하기가 그녀로서는 너무나 힘이 들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
지만 나름 재미가 있기도 했다.

“야! 근데 왜 자꾸 니가 대답을 해?”
“왜? 뭐? 내가 하면 어때?”

어린 두 남자의 유치한 장난질이 우스웠던지 나이 많은 두 여인들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야! 너 그거 봤냐? 이번에 서태지와 아이들 캬... 장난 아니지 않냐?”
“끼아~ 서태지! 서태지 완전 좋아...”
“하여가 이번에 가요 톱 텐에서 라이브로 하던데?”
“라이브 아니야...”
“라이브 맞거든?”
“됐어! 서태지 짜지라 그래... 듀스 오빠들이 훨 멋있거든?”
“채영아 넌 서태지가 좋아, 듀스 오빠들이 좋아?”
“나? 난 그.. 그냥 둘 다...”

지금생각하면 시시콜콜했던 것들에 대해 무한한 에너지를 쏟은 기억뿐이었다. 이런 유치한
대화에 그녀는 아마도 속으로 우리를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대중문화에서 완전히 멀어
진 나이는 아니겠지만 우리와 같은 10대만큼이나 관심이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말이다.

“자! 한 잔씩들 쭉 하자고!”

잔을 부딪치고 각자 받아 낸 술을 전부 비워내기 시작했다. 사실 집에서는 그녀를 생각하며
소주를 홀짝거리기는 했지만 막상 술집에 와서 이렇게 술을 마시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녀
도 석민이 주는 술잔을 곧잘 받으며 마셔내고 있었다. 나는 더욱 어른이 되고 싶었다. 만약
내가 어른이었다면 그녀는 나의 추파를 뿌리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미성
년자인 나를 아낀다면 아낀다고 생각 할 뿐이었다. 어른이 되지 못한다면 어른의 흉내라도
내야 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뭐냐? 너?”

석민이 담배갑과 나를 번가르며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뭐긴 새꺄... 형이 담배를 배웠다. 늬 형수 때문에...”
“지랄을 하세요... 찌질아...”

“아 왜~”
“노인네냐? 한라산이 뭐냐 한라산이! 쪽팔리게......”

불을 붙이려다 말고 나는 석민이 꺼내 놓는 담배갑에 눈길이 갔다. 확실히 한라산의 디자인
보다 훨씬 강렬하고 매혹적인 담배갑엔 필터의 색도 달랐다. 주위의 테이블을 둘러보며 올
려진 담배갑을 보자 하나같이 말보로에 마일드세븐, 살렘과 같은 외산담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아 씨... 쪽팔려...’

나는 한라산이라는 담배가 가장 좋은 담배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담배에도 급이 있다는
사실을... 아니, 트랜드가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전에도 말을 했지만 나는 고집이 있다. 사실 석민이 태워내고 있는 말보로란
담배가 궁금했지만 나는 꿋꿋이 한라산을 고집했다.

“어허! 이 어린 녀석들이... 누나들한테 묻지도 않고!”

지켜보던 민영은 장난스레 나이 운운하며 나무라는 척 했지만 역시 석민의 담배를 꺼내 물
더니 멋들어지게 담배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로는 석민도, 민영도 둘 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언제 배웠는지 너무나 능숙
하게 담배를 피워내고 있었다. 확실히 고등학생과 중학생은 한 살 차이지만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이 다른 것이라 생각됐다.

‘피~ 우리 채영이한테 다들 혼날라고... 어디서 어린것들이래? 어디서...’

나는 속으로 웃음이 터져버렸다. 나도 이렇게 웃긴데 그녀는 얼마나 웃길까 생각을 하자 웃
음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이렇다 할 대꾸도 없
었다. 무척이나 조용한 요조숙녀처럼 그저 맑은 웃음과 차분한 음성만을 내어 놓고 있었다.

‘어린 놈들...’

주제 없는 대화와 쓸데없는 화제안으로 그녀는 섣불리 들어오지 못했다. 나이도 나이었겠지
만 피곤함이 밀려오는 듯 작은 하품을 하며 맥주만을 홀짝이는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러자 그녀 역시 손에 힘을 주어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표시를 했다. 이미 세 번째 피처를
비우고 네 번째 피처가 들어올 때였다.

“아... 씨발... 단속! 단속 떴어! 단속!”

갑자기 술집 분위기가 전쟁통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잽싸게 비상구로 뛰쳐나가는 사람들이
뒤엉켜 욕과 비명이 마구 오가며 순식간에 많은 인파가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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